9th Circle Lord

Prologue # 1

평원의 중심에 한 노인이 서 있다.

흰 수염을 길렀고, 장포로 몸을 둘렀으며 한 손에는 마력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있다.

노인은 하늘을 올려봤다.

세월을 간직한 깊은 눈빛이 회한을 담고 있었다.

노인이 바라보는 하늘은 비라도 쏟아낼 것처럼 어두웠다.

콰르르릉!

번개가 동북부에서 나타났다.

세상을 환히 비춘 섬광은 몰려오는 기사들을 비추었다.

콰르릉!

이번에 내리친 번개는 남서 방향을 비췄는데, 노인과 같이 장포를 두른 마법사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평원의 중앙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위협적이고 살기등등한 모습이었으니 좋은 뜻으로 나타난 건 아닌 듯 했다.

허나 노인은 편안한 모습이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이구나.”

지긋지긋한 전쟁도 이제 마지막이다.

한 평생 굴렀고,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굴레에서 해방된다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사이 접근한 기사들이 순식간에 노인을 에워쌌다.

살기등등한 분위기 속에 중장갑을 두른 은기사가 나와 외쳤다.

“마법사 알센 래터번! 구스트 황제 폐하를 시해한 죄명으로 즉결 처형을 내리겠노라!”

외치는 그와 에워싼 기사들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사이 마법사들도 도착했다.

그들 중 한 늙수그레한 노인이 앞으로 나와 고함을 질렀다.

“알센! 이 미친 자식! 팔레온 마도사님을 죽이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더냐! 죽인다! 죽여버리겠다!”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말에서 내린 마법사들이 즉각 마법진을 그렸다.

검을 뽑은 기사들의 검신에는 오러가 일렁였고, 주변은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변모했다.

포위당한 노인. 알센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를 향해 외쳤던 마법사가 이를 갈았다.

위기 속에서도 태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곧 죽을 마당에 웃음이 나오나?”

“나올 수밖에. 드디어 내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이다.

위화감을 느낀 기사가 인상을 그리며 물었다.

“퍼즐? 그게 무슨 소리냐?”

알센이 나직이 말했다.

“사는 게 지겨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자니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한 가지 계획을 세웠지.”

계획이란 말에 포위한 사람들이 흠칫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8서클 마도사 알센 래터번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심상찮음을 느낀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계획이라는 게 무엇이냐?”

“피와 비명으로 점철된 전쟁에서 물러나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자연을 관찰하고 세상을 연구하며 조용히 지내려 했다. 그러자니 나와 얽힌 인연과 숙명이 가만히 놔주질 않더군. 그래서 궁리했지. 어떻게 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방법은 뻔하지 않은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모든 인연을 끊어 내야지.”

알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알아냈다. 과거로 돌아갈 방법을 말이다.”

쿵!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기분이다.

모두가 입을 벌렸다.

마법사가 말을 더듬었다.

“과, 과거로 돌아간다고? 그게 가능한가?”

“이론은 가능하다. 막대한 마력을 응축하여 폭발시킨다면 시간과 공간이 일그러져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그 균열을 지나친다면 시간을 가로지를 수 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알센은 기사와 마법사 무리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문제는 이 이론을 실현시키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한 번에 뽑아내야 했지. 구스트와 팔레온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소드마스터와 8서클 마도사의 에너지라면 충분하니까. 그래서 죽였다.”

듣다 못한 기사가 고함을 질렀다.

“이 미친놈! 그깟 목적을 위해 제국의 황제 폐하를 죽인 것이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 거냐?”

“잘 안다. 구스트는 배부를 줄 모르는 돼지였어. 세상을 끝없이 먹어치우려고 했지. 가만히 두었다면 대륙 전체를 피로 물들였을 것이다. 팔레온도 마찬가지다. 욕심이 많은데 세력도 강하고 힘도 있다. 그 두 놈은 죽는 게 세상을 위한 길이야.”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저지른 결과에 확신이 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뿐더러, 어차피 할 생각도 없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눈을 맞췄다.

한때는 적이었으나 이제 공동의 적을 막기 위해 힘을 합쳐야 했다.

마법사가 으르렁거렸다.

“네놈의 정신 나간 이론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

“죽어라! 미친 마법사!”

기사들이 진형을 펼치고 서서히 포위망을 좁혔다.

마법사들은 일제히 캐스팅을 일으켰다.

알센은 그런 그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너희들이 마지막 퍼즐이다.”

그는 바닥을 향해 지팡이를 때렸다.

쿠궁!

갑자기 평원에 지진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흠칫하는 사이, 바닥에 붉은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닥을 둘러보던 한 마법사가 비명을 질렀다.

“마법진이다!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어!”

“빨리 놈을 죽여!”

기사들이 오러를 뿌리고 마법사들의 다채로운 마법이 쏟아졌다.

콰아아앙!

오러가 알센의 몸을 때렸고, 마법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됐다!”

외친 기사의 얼굴이 이내 일그러졌다.

알센은 멀쩡했다.

은은한 붉은 기류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알센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을 재물로 나는 다시 태어나리라.”

심상찮음을 느낀 사람들이 물러서려 할 때, 갑자기 온몸에 힘이 쑥 빠졌다.

마법사가 외쳤다.

“에너지 드레인이다!”

8서클 마법. 에너지 드레인.

피어 오른 노란 아지랑이가 사람들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체력과 마력이 쏜살같이 빨리기 시작하자 모두가 마법진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 신세다.

드드드드!

지면에서 거대한 마력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법진에 새겨진 룬어 위에 오롯이 선 반투명한 마력석이 새하얀 빛을 토하자 사람들의 몸이 점점 미라처럼 말라갔다.

“살려줘!”

“으아악!”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알센은 지팡이를 역수로 쥔 뒤, 마력석을 스스로의 심장에 박았다.

힘을 머금은 마력석은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심장은 마법사에게 아주 중요한 신체 부위다.

기사들이 배꼽 아래에 뱀이 똬리를 틀 듯 마나를 모은다면, 마법사의 마나는 심장을 기점으로 고리를 이룬다.

심장이 으스러졌으니, 고리가 붕괴를 일으켰다.

폭주한 마법진이 폭발하며 그 위에 오롯이 선 마력석도 하나둘씩 깨졌다.

콰아아앙!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그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알센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실패해도 좋고, 성공해도 좋다.’

피비린내 나는 인생을 마감할 수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모든 것을 끝마친 알센은 죽어가는 가운데 미소를 띠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의 시작은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