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th Circle Lord

# 61 Evil Spirit

키아라의 실전 상대로 오스틴은 적절했다. 정형화되었고, 능동적으로 전투를 이끌어간다.

게다가 지금은 형편없는 꼴이라지만 그래도 제국의 근위대장이다.

한가락 하는 실력과 경험이 있으니 키아라에게 안성맞춤인 상대였다.

지면에 부딪혀 고통스러워하던 오스틴이 루터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패닉 그 자체였다.

마법사가 자신보다 빠르고 힘이 세다.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의문은 잠시였다.

키아라가 다가온다.

루터는 다른 생각 못 하게 그를 압박했다.

“대련에서 이기면 살려주겠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라.”

오스틴은 자신이 덫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이놈들이 날 가지고 놀려고 하는구나.’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키아라는 강했지만, 공중에 둥둥 뜬 채, 자신을 냉엄히 내려다보는 마법사는 훨씬 강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자들이란 말인가.

오랜만에 즐기려던 그의 가벼운 산책은 지옥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천천히 일어선 그가 갈등 어린 눈으로 키아라를 바라봤다.

눈앞의 상대를 꺾으면 자신을 살려 보내 줄 것이다.

‘싸워서 이기면 된다. 이기면.’

마법사의 말대로 이기면 된다.

하지만 거침없이 다가오는 키아라를 보자니 자신감이 쏙 사라졌다.

아무리 투지를 일으키려 하지만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많고 셈법이 늘었다.

그는 잠깐 동안 상대와 검을 나누면서 전력을 파악했다.

자신이 한 번 검을 내지를 시간에 상대는 서너 번은 더 휘두른다.

이미 그 시점에서 전의가 죽었다.

소드마스터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의 대전이 낯설어한다.

정점에 오른 자들이 오랫동안 평화에 젖어 있으면 나타나는 현상인데,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정진하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의 오스틴만 해도 그랬다.

불세출의 검사였고, 위명만 들어도 적들이 벌벌 떨었다.

주변에선 추켜세우고 권력과 명예가 끝없이 쏟아졌다.

사치와 향락은 오스틴을 알게 모르게 잡아먹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과거의 혈기 어린 시절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런 오스틴이 이제 막 날개를 펼쳐 몰 볼 안 가리는 키아라의 투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오스틴은 점점 위축이 되었다.

동수의 실력에서 심리적 우위는 승패에서 결정적이다.

헌데 오스틴은 실력도 뒤처지는 데다가 심적으로 지고 들어갔다.

아무리 일으켜 세우려 해도 도무지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터가 답답함에 혀를 찼다.

“고작 한 번 졌다고 벌벌 떠는군.”

키아라가 다가올 때마다 뒤로 주춤거린다. 이미 오스틴의 심리를 파악한 루터였다.

전의를 잃었으니 차라리 더미와 붙이는 게 낫다.

루터의 시선이 착 가라앉았다.

‘그럴 수야 없지.’

놈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다.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이빨을 드러낸다. 

그런데 벌벌 떨기만 한다.

‘안되면 억지로라도 끄집어내야지.’

흐릿해진 루터의 몸이 어느새 오스틴의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흠칫하는 오스틴의 등에 손을 얹은 루터가 싸늘히 말했다.

“용기가 나지 않으면 내가 불어넣어 주마.”

그의 손바닥에서 열화와 같은 마나가 흘러들어 오스틴의 몸에 침투했다.

침투한 마나는 오스틴의 마나홀을 부쉈다.

“커헉!”

죽은 피를 토하는 오스틴을 향해 루터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폭주하는 마나를 머리로 이끌었다.

마나를 잘못 연공 하다 폭주하면 이성이 끊기고 광기가 차오르는데, 이를 버서커 상태라 한다.

루터는 강제로 오스틴을 버서커 상태로 만들었다.

“크아아악!”

흉포한 노성에 루터가 등을 떠밀었다.

“이만하면 되겠지.”

버서커는 평상시보다 배로 강하다.

생각이 없고 오로지 본능대로만 실력을 발휘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키아라에게 좋은 공부가 된다.

핏물에 잠긴 눈동자가 키아라를 사납게 노려보더니 이내 자리를 박찼다.

쾅!

오러가 전보다 강맹하다.

방심하던 키아라가 흠칫하더니 이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검에서 새하얀 오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힘을 쓴다는 뜻이고, 상대가 그 정도 수준은 된다는 얘기다.

루터가 만족하는 사이 전황은 이미 끝이 났다.

돌켄 등은 오합지졸인 적을 무참히 무찌르다 전의를 상실한 이들은 일부러 살려 두었다.

먼저의 경험을 살려 항복하는 이는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자비심보다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장내는 정리되었지만 키아라와 오스틴의 전투는 이제 막 시작이다.

이성이 끊기고 광기에 물든 오스틴의 살기 어린 공격을 키아라가 받아넘기며 되받아친다. 루터는 키아라의 재능을 높이 샀다.

스스로 마나를 연공하고 검술을 창안했다. 그런 천재가 버서커라 할지라도 이성이 없는 오스틴을 상대로 버거워 할 리가 없었다.

오스틴의 피부에 잔챙이 같은 상처가 점점 늘어나 피에 뒤집히게 만들었다.

저대로라면 싸움은 곧 끝난다.

루터는 고개를 저었다.

버서커로 만들어도 키아라에게 상대가 되질 않는다.

‘애당초 안 되는 싸움이군.’

경험은 되었어도 수련 상대로는 미치지 못했다.

‘역시 내가 봐주어야 하나?’

만족을 모르는 키아라에게 적합한 상대는 결국 자신밖에 없었다.

그 사이 칼루아가 다가왔다.

“마스터. 치료를 마쳤어요.”

루터는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여자들을 쳐다봤다.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이도 있었지만, 아예 충격으로 넋을 잃은 이도 있었다.

“어디서 온 이들이냐?”

“기억을 못 하고 있어요. 충격이 너무 큰 것 같아요.”

“그렇군.”

“앞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겠죠?”

안타까워하는 칼루아에게 루터가 해답을 알려 주었다.

“방법이 있다.”

“그게 뭔가요?”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괴로운 기억을 힘들게 안고 살아가는 것 보다 차라리 묻어버리는 게 낫지.”

현실을 부정하며 도피하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앞으로 살아갈 이들에게는 현재의 기억은 큰 충격이다.

칼루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게 좋겠어요.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요?”

“나도 모른다.”

“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이참에 해 볼 참이다.”

루터의 뻔뻔한 대답에 벙 찐 칼루아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어쩐지 너무 매끄럽더라니, 시도하시려는 거군요?”

“그래. 하지만 될 거다.”

9서클 마법사에게 불가능은 낯선 단어였다.

루터는 여자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일단 백치가 된 이들이 먼저였다.

멍하니 있는 여자에게 다가간 그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새로운 마법을 시도할 때에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 룬어였다.

‘상대의 기억을 비추는 기능이면 되겠지.’

의지는 실체가 되었다.

새로 만든 룬어를 새기며 마나를 발현하자 백치가 된 여자의 기억이 환상처럼 발현되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칼루아의 얼굴이 감탄사를 뱉었다.

“지금 보이는 환영이 이 여자의 기억인가요?”

“그래. 좀 더 빨리 살펴보자.”

루터는 문제가 된 기억으로 이동했다.

여자는 화전민 출신이었다.

가난했지만 즐거워했다.

듬직한 남편이 있었고,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나 산적이 나타나면서 모든 게 날아갔다.

모두가 죽고 그녀는 납치당했다.

가족을 잃은 순간부터 그녀는 백치가 되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칼루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너무 슬퍼요.” 

“잔혹한 현실이지. 기억을 지워도 다시 전처럼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성 노리개 때문에 백치가 된 게 아니라 그 전의 기억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고민이다.

칼루아도 골머리를 앓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족을 잃은 기억부터 없애는 게 맞을까요?”

“그게 문제다. 만약 가족이 있었던 기억을 없애면 그들과의 추억도 사라진다. 좋은 기억과 슬픈 기억은 동반되기 마련이야. 어쩌면 이 여자에게 필요한 건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보살핌일지도 모른다.”

칼루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려운 일이로군요.”

“욕망이 일으킨 결과고 어느 동물이건 간에 갖고 있는 근본적인 본능이지.”

“하지만 이건 과해요.”

“약자는 어떤 고통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 또한 숙명이지.”

루터의 조언에 칼루아가 시무룩했다.

“가혹하네요.”

“세상의 섭리가 그렇다. 생존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지.”

“우리도 마찬가진가요?”

“그래. 결국 벗어날 수 없다. 싸우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그러니 저항해야지.”

“그렇군요.”

루터는 골몰히 생각에 빠진 칼루아를 보며 내심 만족했다.

‘나오길 잘했군.’

칼루아는 자신의 지식을 물려받은 에고 자아였지만, 그렇다고 세상일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반영구적으로 자신의 이종족을 돕고 보호하며 살아갈 칼루아였다.

그래서 이번 여정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진지하게 고찰하는 계기가 되길 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의 경험이 칼루아를 성숙하게 만들어 주겠지.’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어 스스로의 길을 찾아야 한다.

루터가 칼루아에게 바라는 일이었다.

여자의 기억은 최소한으로 잡았다.

어차피 최악의 기억은 작금의 성 노리개였다.

그 기억은 지웠지만 가족과의 시절은 남겨 두었다.

괴롭지만 추억도 있었다.

자신은 그 추억을 지울 자격이 없었다.

그래도 백치 상태는 여전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루터는 그를 통해 공동 내의 여자들의 기억을 하나, 둘씩 지우기 시작했다.

기억을 지운 뒤, 잠을 재웠다.

다시 깨어나면 자신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돌켄 등은 인질 잡은 산적과 귀족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돌아가는 일련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겁에 질린 이들은 사실대로 순순히 털어놓았다.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자극적인 성벽을 지닌 귀족들이 산적들을 이용해 쾌락을 추구했다.

거기에 포함된 이들 중에는 정보 길드의 수장도 있었고, 오스틴과 같은 소드 마스터도 있었다.

이들은 쾌락을 얻는 대신 산적들이 활개를 치도록 가만히 두었다.

사정을 들은 일행의 표정이 하나같이 분노가 일었다.

모두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

돌켄이 씨근덕거리며 외쳤다.

“이 미친놈들! 그러고도 니들이 사람이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들!”

엘레나는 침을 뱉었다.

“너희들은 가축만도 못해.”

침 맞은 귀족이 얼굴을 붉혔다.

케인이 그런 귀족의 얼굴을 걷어찼고, 자크는 자신의 앞에 널브러진 귀족을 무서운 눈으로 내려 봤다.

칼루아가 씩씩거렸다.

“마스터. 이들도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주고 싶어요.”

일행이 루터를 쳐다봤다.

그러자 산적과 귀족 등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눈이 있으면 돌아가는 사정을 안다. 

그들은 루터의 존재감을 알았고, 그가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애원했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손이 닳도록 빌고 엉엉 울기도 했다. 허나 루터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는 애원하는 귀족들을 뒤로하고 일행에게 정식으로 악령을 소개했다.

“이 녀석은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서 왔다. 본질은 악령인데, 영혼을 잡아먹고 힘을 키우지.”

알려주지 않으면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소개해주니 귀가 쫑긋 열렸다.

주의 깊게 듣던 돌켄이 물었다.

“모르는 세계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해 너머의 세계다.”

“사해요?”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해 자체도 미지의 영역인데, 그 너머에서 왔다 하니 모두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리저리 악령을 훑는 가운데 루터가 설명을 이어갔다.

“궁금한 게 있으면 앞으로 알아가도록 해라. 지금의 너희들은 대화가 불가능했지만, 앞으론 가능하겠지.”

악령의 의념은 아무나 읽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까지 일행은 악령을 으스스한 연기 덩어리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바뀔 것이다.

루터가 악령에게 말했다.

“앞으로 시킬 일이 많다.”

[흐흐. 나 역시 느끼고 있다. 이들은 타락했고 나는 타락한 영혼을 좋아하지.]

“그래. 내키지 않지만, 네 놈에게 껍데기를 주마. 어떤가?”

[나야 언제든 환영이지.]

“긴말 않겠다. 육신을 주는 대신 내가 시키는 일만 하고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너는 강하고 나는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

루터는 악령의 입 바른 소릴 믿지 않았다. 놈은 본질 자체가 뒤틀렸고 사악하다. 언제 어디서 무슨 짓을 꾸밀지 몰랐다.

하지만 힘의 논리 앞에선 어떤 존재든 간에 한결같다.

자신이 지켜보는 한 놈은 감히 허튼짓을 못하리라.

악령이 기대를 담아 물었다.

[그래서. 내 새로운 그릇은 어디에 있나?]

“저기에 있다.”

루터가 악령의 새로운 육신이 될 그릇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방향에는 어느새 부턴가 키아라에게 맞기만 한 채, 꼼짝도 못 하는 버서커 오스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