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th Circle Lord

# 64 Polymorph 2

테베 사제가 엄숙한 동작으로 두 사람에게 축복을 내렸다.

“아네스의 보살핌에 신성한 영광이 있으리라!”

금빛의 빛무리가 두 기사를 감쌌다. 그들은 한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띠었다.

그가 경고했다.

“어디까지나 대련이니 무리한 승부는 지양하시오. 승리에 만족하고 패배를 인정하시오.”

가끔가다 흥분해 필요 이상으로 손속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과 달리 서로를 노려보는 눈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거리를 벌리고 비살상용으로 나무로 만든 무기를 제공받았다.

대련을 위한 목재 무기는 다양했는데 알렉스와 울드란은 똑같이 목검을 선택했다.

준비를 마치고 테베 사제가 시작을 알렸다.

“최선을 다해 멋진 승부를 보여 주시오. 자! 그러면 시작하겠소!”

노익장을 과시하려는 듯 테베 사제의 목소리가 드높다.

대련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일제히 관심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대치 형국이었다.

원처럼 둥근 연무장을 빙빙 돌기만 하더니 전력 분석을 마쳤는지 부딪히기 시작했다.

“흐랴압!”

울드란이 선공을 걸었고 알렉스가 받아쳤다.

얌전히 보던 귀족들이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울드란! 부숴버려!”

“알렉스! 끝장을 내라!”

사람들의 열기가 전이되었는지 둘은 죽어라 목검을 휘둘렀다.

승자는 곧 나왔다.

생명과도 같은 검을 놓친 알렉스가 바닥을 뒹굴었다.

울드란이 그의 목젖에 검을 겨누었다.

테베 사제가 선언했다.

“기사 울드란 경의 승리요!”

“와아아아!”

함성이 터지고 희비가 엇갈렸다.

벨렌 자작은 패배한 알렉스를 죽일 듯이 노려봤고 무스크 남작은 제 일처럼 기뻐했다.

대리인으로 내세운 기사는 곧 그 가문의 자존심이자 전력이다.

최고라 추켜세우고 내세운 기사가 패배했으니 벨렌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깨를 늘어트린 알렉스가 돌아가고 다시 대전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무료하게 바라보던 루터는 엉덩이를 털었다.

‘시시하군.’

남들 눈엔 박진감 넘쳤지만 루터에겐 애송이들 놀음이었다.

적당히 자리를 지키다 돌아가려는 데,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콜론 후작 각하시다!”

“소드 마스터 오스틴 경이야!”

“와아아아!”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모두 유명 인사들이었다.

관심 없던 루터는 자리를 피했다.

헌데, 돌연 그가 몸을 멈추었다.

루터의 시선이 새로이 나타난 후작 일행에게 닿았다.

후덕한 콜론 후작과 태연하게 연기하는 악령을 지나 우측에 선 중년인에게 닿았다.

활동이 용이한 가벼운 튜닉 차림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크게 별다를 것 없는 선한 인상이었는데, 루터는 유독 그에게 시선이 꽂혀 떠나가질 않았다.

루터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몸이 반응했어.’

이제껏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헌데 그를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경계심이 일었다.

루터는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그는 즉시 상태창으로 상대의 전투력을 확인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중년인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전투력이 나타났다. 

전투력 650만.

루터는 충격을 숨기고 은은히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중년인도 화답하듯 싱겁게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루터는 자리를 떠나려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앉았다.

그의 머릿속에 온갖 복잡한 생각이 떠돌아다녔다.

‘650만이라고? 대체 정체가 뭐지?’

전투력이 650만이면 자신에 근접한 수치다.

그가 중년인의 정체를 추측하는 동안 콜론 후작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대련을 하고 있다기에 찾아 왔네. 우리도 참석할까 하는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후작 각하!”

“환영합니다!”

“그럼 함께하지.”

후작이 자리에 착석하자 뒤따른 일행이 그의 주변을 호위하듯 지켰다.

귀족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지금이야말로 후작과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대리 기사를 통해 가문의 명예를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모인 귀족들이 분주히 소속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과열된 분위기 속에 먼저 시작된 대련이 이어졌다.

다시 한번 울드란의 승리였다.

“흐아아압!”

울드란은 전처럼 무게를 잡지 않고,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승리를 포효하는 울드란의 자신감에 콜론 후작 등이 박수를 쳤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일 때, 귀족들이 앞다투어 일어났다.

“다음은 내 기사가 나서겠소!”

“아니! 우리가 먼저다!”

연속 승리한 울드란이었지만 도전자는 차고 넘쳤다.

상황이 바삐 돌아가는 사이 루터는 혼자만의 공간에 있었다.

‘내가 찾던 조르주의 대장인가? 신 노릇 하는 진짜 정체? 아니면 드래곤인가? 분명 둘 중 하나일 텐데.’

자신의 호적수로 불릴만한 적은 이 대륙에 몇 없었다.

기껏해야 드래곤이나 조르주와 같은 권능자들의 대장밖에 없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루터는 악령을 바라봤다.

후작과 즐겁게 떠들고 있었는데 중년인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다.

‘바로 옆에 강적이 있는데,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는군.’

반면, 중년인은 악령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겉보기는 소드 마스터이니 주목을 받는 것은 달랐지만 그의 시선은 남달랐다.

선망 같은 느낌이라기보다 새로운 장난감을 보는 듯한 흥미로운 시선이다.

중년인이 다시 고개를 돌려 루터와 눈을 마주쳤다.

이번에는 싱겁게 웃지 않았다.

마치 의아한 눈빛이었는데, 루터는 괜히 의심을 살까 일부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천천히 루터에게 다가왔다.

루터는 경계를 일으키기보다 태연자약하게 다가오는 그를 맞이했다.

중년인이 물었다.

“내게 볼일이라도 있소?”

루터는 순간 고민했다.

상대의 낯을 까발리고 독대할까.

아니면 계속 모른 체할까.

고민하던 루터은 중년인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상대는 나를 모른다.’

중년인은 악령도 눈치 못 채게 힘을 숨겼고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자신은 그를 알아봤고,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다는 말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고 먼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계속 모를 것이다.

고민은 짧았다.

‘일부러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지.’

반면, 상대에 대해선 좀 알아보아야겠다.

루터는 눈을 가늘게 하며 물었다.

“혹시 우리가 만난 적 있습니까?”

아는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모호한 질문이었다.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만난 적 없소.”

“그럼 제가 오해한 모양입니다. 실례했습니다.”

“닮았나 보오?”

“닮았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착각한 모양입니다.”

“호오라. 분위기라?”

중년인은 흥미가 동했는지 그의 옆에 착석했다.

그가 물었다.

“정확히 어디가?”

“물처럼 담담했고 또한 불처럼 강렬했습니다.”

대충 갖다 붙였는데, 중년인이 덥석 물었다.

“내가 그렇게 보이오?”

“그렇습니다.”

루터는 일부러 그에게 접근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서로 인사나 하지요. 저는 징벌 사젭니다.”

“호오. 징벌 사제라. 징벌 사제는 또 처음 보는군.”

“흔히 보는 직업은 아니지요. 그래서 그대는 누구십니까?”

“콕스 남작이요. 혹시 아시오?”

“견식이 짧군요.”

“모르는 게 당연할 거요. 이제 막 작위를 받았으니까.”

그가 찡긋 윙크를 했다.

“후작께서 나를 좋게 봐주어 작위를 내리셨소. 이른바, 신분 상승이지.”

“원래는 평민이었습니까?”

“그랬소. 우연찮게 좋은 검술을 얻어 무용을 드러내다 보니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소. 하하하. 이래서 인생은 모른다니까.”

“후작께서 가까이 대동하시는 것으로 보아 실력이 뛰어나신 모양이군요.”

“그래도 저기 오스틴 경보단 부족하지.”

악령을 가리키는 콕스의 어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할 것 같으니 아직도 내 수양이 부족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니까. 하하하.”

루터는 마주 웃으며 생각했다.

‘연기가 대단하군.’

조금 전까지 오스틴을 장난감 보듯 하던 자가 이제 와서 벅차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기로 따진다면 루터 역시 만만치 않다. 루터는 모른 척하며 콕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조금씩 접근했다.

“실력이 뛰어나 작위를 하사했으면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입니까?”

“너무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아 재미없군. 그대는 어쩌다 징벌 사제가 되었소?”

“제 얘기가 궁금하십니까?”

콕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소. 아주 궁금하군. 기왕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말해 주었으면 좋겠소.”

루터는 콕스의 말에 짐작했다.

‘날 의심하고 있군.’

아마도 자신을 쳐다본 것이 못내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그럴 만 도 했다.

콕스는 한 번 보면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인상에 담담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눈여겨 보는 것이 수상쩍은 모양이다.

‘물러설 수야 없지.’

오히려 잘됐다.

루터는 부드럽게 말했다.

“교단의 규율이 있기에 많은 것을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거참 아쉽군. 나는 당신이 무척 궁금한데 말이야.”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요?”

“나와 친구를 맺읍시다.”

흥미롭게 루터를 관찰하던 콕스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구?”

“사람의 인연은 묘한 구석이 있어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지금처럼 방금 만난 사이도 서로 호감을 느끼면 친구로 지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루터의 열변에 콕스가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거 말이 되는군!”

“나는 당신과 가깝게 지내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콕스는 활짝 웃었다.

“징벌 사제와 친구를 맺을 수 있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없지. 좋다! 너는 지금부터 내 친구다.”

그가 악수를 내밀었다.

손을 맞잡은 루터가 표정을 숨기고 잔잔히 말했다.

“제의를 받아주어 고맙네.”

“내가 그렇게 좋았나?”

“징벌 사제로 살다 보니 의심병만 생기지. 가끔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는데, 이상하게 자네에겐 유독 끌리는군.”

콕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혹시 남자를 좋아하나?”

“오해 말게. 나는 그런 쪽엔 전혀 관심 없으니까. 그나저나 이런 인연을 그냥 가벼이 흘릴 수야 없지. 어떤가. 조용한 곳에서 술이나 한잔 하는 게?”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원래 술을 통해 더욱 친밀해지는 법이지. 그나저나 지금은 자리를 비우기 어렵겠군. 보다시피 소속된 마당이니 말일세.”

“시간이 나면 언제든 좋네.”

“그러지 말고 대련이 끝나는 대로 바로 가지. 어차피 후작 각하는 연무장 관람을 마치면 집무실로 돌아갈 걸세.”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 후작께서 어쩌다 여기까지 행차하셨나?”

“뭐긴. 저기 멍청한 자식들 때문이지.”

친구가 되었으니 말이 거침없다.

콕스가 후작의 세 아들을 가리켰다.

“후작께선 오스틴 경이 세 아들 중 누구라도 좋으니 선택해 제자로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어. 오스틴 경의 제자로 들어가려면 재능을 보여주어야 하니 일부러 대련하는 곳까지 찾아온 걸세. 적당히 기회를 봐서 저들을 출전시켜 오스틴 경에게 솜씨를 보여줄 생각이지.”

“그렇군.”

말이 씨가 되었는지 별안간 콜론 후작이 벌떡 일어났다.

“판을 벌였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여기 내 아들도 대련에 참여하여 실력을 뽐낼 기회를 보여주고 싶네!”

그의 외침에 귀족들이 놀라다 이내 환호성을 질렀다.

세 아들은 그 환호성이 제 것이라는지 당당하게 일어섰다.

콕스가 혀를 찼다.

“하나같이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까먹어. 이게 말이 되나?”

비난에 루터가 물었다.

“검술 스승이었나?”

“지금은 관뒀네. 저놈들을 가르칠 바에야 짐승을 가르치는 게 나을 정도야. 놈들은 검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어.”

“안타깝군.”

루터는 그의 중얼거림에 맞장구쳤다. 그 사이 콜론 후작의 뜻대로 세 아들들이 연무장으로 향하며 대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