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th Circle Lord

# 166 Hypothetical 2

키아라가 눈치를 살폈다.

잠들기 전, 수인족과 더불어 살았던 키아라는 당연히 인간보다 수인족이 우선이다.

선입견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래서 쉬이 현 상황에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키아라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루터는 어떻게 생각해?”

“뭘 말이냐?”

“이종족과 인간의 전쟁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일?”

루터의 생각이 의외다.

키아라가 놀라자 루터는 솔직하게 말했다.

“모든 욕망하는 존재는 분란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는 인간이며 이종족이며 가릴 것 없다. 그러니 서로가 싸운다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야. 새삼스러울 것 없고, 놀라울 일도 아니다.”

“하지만 루터는 이 모든 상황을 평화롭게 종식시킬 수 있잖아.”

“할 수 있지. 하지만 더 이상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자제할 생각이다. 세계는 해당 구성원이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구성원이 아니다.”

키아라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그의 말은 일견 일리가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루터는 세계의 구성원이라기보다는 전체를 다스리는 위치에 섰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도 그를 막을 수 없으리라.

키아라는 루터의 판단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애매모호한 위치를 고민하게 했다.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하나?”

“아니. 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너는 이 세계의 구성원이라는 얘기다.”

키아라가 모호한 시선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수인족을 도와주어도 괜찮다는 거야?”

“물론이지. 그들을 통해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정복해도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너는 세상을 진동시킬 순 있지만, 세계를 파멸에 떠밀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현재 이종족과 인간의 전쟁이 일어난 배경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간섭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세계는 그 범주에 포함된 구성원들이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의외의 대답이 놀랐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루터가 차분히 말했다.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세계를 위협할 존재들이다.”

“그게 누군데?”

“어둠의 힘을 간직하는 존재들.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 그릇되고 변질된 그들은 내가 끝낸다.”

루터는 키아라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잠시 헤어져야겠구나.”

키아라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너와 나는 보는 세계가 다르다. 나는 이 세계의 전체를 관찰해야겠지만, 너는 수인족. 그리고 이종족을 도와줘야 하니까.”

키아라의 얼굴에 고민이 서렸다.

다시 본 루터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지만 인간과 이종족이 전쟁을 벌인다 한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이종족을 도울 생각에 찬 그녀에게 루터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라. 당장 헤어진다고 전과 같이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키아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이제 다시 잠드는 일이 없는 거야?”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한동안은 깨어 있을 생각이다.”

“음.”

갈등하던 키아라는 이내 결심했다.

“좋아.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어. 만약 인간이 우릴 적대한다면 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어.”

결정 한 그녀가 루터를 쳐다봤다.

“날 반대할 거야?”

“그럴 리가.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라. 널 존중하마.”

“하지만 인간들과 싸울지도 모르는데?”

“나는 인간이 아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키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난 당분간 수인족과 함께 있을게.”

어차피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수인족을 위해서 팔을 걷어붙일 생각이다.

노선을 정한 키아라는 루터를 쳐다봤다.

“루터는 이제 뭘 할 거야?”

“일단 옛 인연들을 찾아가야지. 그리고 걱정할 일이 없다면.”

잠시 말을 끊은 루터는 곰곰이 생각하다 빙그레 웃었다.

“세상을 유람하며 편안하게 보내고 싶구나.”

키아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같이 다니고 싶은데.”

“잠깐 세계를 관찰했다. 인간과 이종족이 분란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닐 거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일을 마치면 상태창으로 부를게.”

상태창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알았다.”

상황에 따른 서로 간의 방향을 정한 뒤, 루터는 샤인티에게 조언했다.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어디에도 밝히지 말거라. 괜히 알려져서 혼란만 불러일으킬 테니까.”

샤인티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절대 어디에도 입 밖에 내지 않을게요.”

키아라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만 가 볼게.”

서둘러 일을 마친 뒤, 루터의 여정에 동행하고 싶다.

“곧 다시 보자.”

“응. 조금만 기다려. 금방 찾을 테니까.”

키아라는 아쉬운지, 루터의 볼을 잠시 쓰다듬으며 아쉬운 얼굴로 말하더니 몸을 돌렸다.

샤인티가 눈치를 살피며 그런 키아라를 종종 쫓았다.

루터는 기지개를 켰다.

“누구부터 만날까.”

어차피 급할 건 없다.

그는 이제 과거처럼 실리를 중시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인간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루터는 일평생 전장에 몸을 담으면서 항상 신경이 예민하고 곤두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지 날이 서 있었고, 느릿한 법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공허가 된 그에게 더 이상 적수가 있지 않았다.

루터는 감히 온 우주의 그 어떤 존재를 상대하더라도 절대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힘 싸움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공허 그 자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든 모든 이들에게 공포이며, 또한 절대적이다.

당연히 여유가 있다.

루터는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어쩐지 마왕을 닮아가는군.”

마왕은 항상 여유로웠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 모든 게 강한 힘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느긋하진 않아도 편안하고 여유롭다.

“자유롭게 살자.”

루터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공허에서 깨어난 이후 그의 첫 번째 변화는 바로 자유로이 살고자 하는 홀가분한 마음가짐이었다.

일단 창조 세계에서 벗어나자.

세계로 안착한 루터는 횡횡한 벌판에 홀로 서 있었다.

그가 선 장소는 테페스 자작령의 외곽지.

알리고레 남작 군대와 참혹한 전투가 있었던 장소였고, 시간을 돌려 처음으로 깨어났던 곳이기도 했다.

“모든 게 여기서 시작되었지.”

지금은 모두 지나간 과거이며, 역사였으나 루터는 생생히 기억했다.

감상에 젖어 한참을 서 있던 루터가 고개를 돌렸다.

상단으로 보이는 행렬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의 중년인이 루터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다 이내 시선을 떼었다.

지참한 무기도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도 앳된 얼굴이 만만해 보였다.

상단 호위 행렬은 쓸데없는 관심을 피하는 게 우선이다.

황야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들은 무심결에 지나려 했다.

루터는 다가오는 자들을 꼼꼼히 훑었다.

그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흥미롭군.’

선두의 남성에게 마나가 깃들었다.

심장에 마나 고리를 이룬 것도 아닌데, 마법을 사용한다.

‘몸에 마나석을 심었군.’

파편처럼 박은 마나석이 자연스레 운용되고 있었다.

흥미로운 방식이다.

루터가 이채를 띄며 바라보자 선두의 중년인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젊은이. 우리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가?”

루터는 그를 힐끗 보다 고개를 돌렸다.

“없소. 갈 길 가시오.”

“말이 짧군.”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젊은 사람은 아니니까.”

묻던 중년인이 이채를 발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짧고 불편한 대화를 주고받은 중년인이 이내 그를 지나치려 했다.

“잠깐만 멈춰.”

지나는 마차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창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곱게 치장한 예쁘장한 소녀였다.

루터를 보는 소녀의 눈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행렬을 세운 소녀가 루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몇 살이야?”

아무래도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호위 책임자인 선두의 중년인이 다가와 헛기침을 흘렸다.

“아가씨. 누차 말씀드렸지만, 이방인에게 함부로 말을 거시면 안 됩니다.”

엄한 목소리에 소녀는 아랑곳 않고 루터를 빤히 바라봤다.

루터 역시 소녀에게 관심이 생겼다.

‘이상한 마나 연공이군.’

마나를 익혔는데, 마법사인지 검사인지 구분이 안 간다.

소녀의 마나 연공은 신체 전체에 마나 홀을 퍼트려 연결된 수로처럼 마나를 흐르게 했다.

특이한 형태의 마나 연공법이다.

그간 없는 동안 마법학이 어떻게 발전한 걸까.

서로가 관심이 생겼다.

루터가 소녀의 질문에 외려 되물었다.

“네가 보기엔 내가 몇 살 같으냐?”

“스무 살.”

“훨씬 많다.”

“훨씬?”

“그래.”

대화가 이어지자 루터를 보는 중년인의 시선이 아니꼽다.

그는 눈에 힘주어 루터에게 물러나라는 눈치를 주었다.

루터는 중년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대화를 유지했다.

소녀가 피식 웃었다.

“그럼 진짜 몇 살인데?”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으니 내기를 하는 게 어떠냐?”

“내기?”

“그래. 가는 동안 네가 내 나이를 맞추면 선물을 주마.”

선물이란 말에 여자아이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선물이 뭔데?”

“선물이 뭔지 알려주면 또 재미없지.”

“아저씨. 일부러 나 약 올리는 거지?”

“생각하기 나름이지.”

“이제 보니 얻어 타려고 나한테 이러는 거지?”

루터는 일부러 당했다는 듯이 난색을 표했다.

소년의 시선이 짓궂어졌다.

“그럼 어떻게 할까? 아저씨의 장난에 어울려 줄까?”

내내 지켜보던 중년인이 단호히 대답했다.

“신분도 정체도 모르는 외지인을 태워줄 수 없습니다.”

“엘번. 내 별명이 뭔지 알아? 청개구리야. 청개구리. 하라는 대로 절대 안 해.”

엘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장단에 어울려 주겠어. 물론 선물이 뭔지 궁금해서 태워주는 거니까 꼭 줘야 해.”

“물론이다.”

“아가씨게 불경한 말을 하지 마라.”

엘번은 내내 말을 놓는 루터에게 경고했지만, 그는 소녀가 그랬듯이 곧바로 무시했다.

이제 보니 이 행렬의 실권자는 어린 소녀였다.

엘번은 불쾌했지만, 마차에 동승하는 루터를 막지 못했다.

루터의 생각대로 실질적인 실권자는 소녀였다.

마주 앉자 소녀의 차림새가 보였다.

하늘과 같은 푸른 드레스에 한쪽 손에만 장갑을 착용했다.

풍성한 금발 곱슬에 이목구비가 또렷했지만, 눈매가 매서워 제법 고집스러워 보였다.

루터가 물었다.

“목적지가 어디냐?”

내내 루터를 관찰하던 소녀가 팔짱을 꼈다.

“아저씨. 내가 누군지 알아?”

도도한 표정과 목소리에 루터가 되물었다.

“네가 누군데?”

“나는 피오렌체 후작가의 장녀야. 그런데 어휴, 신분이 그뿐만이 아니네. 엘몬트 마법 아카데미의 수석 장학생인 데다, 백작 신분까지 있네. 어머나. 나 정말 대단하지 않아?”

자화자찬을 듣던 루터가 엘몬트 마법 아카데미의 이름이 나오자 되물었다.

“엘몬트 아카데미? 거기서 공부를 한다고? 거리가 꽤 될 텐데.”

“그런 촌스러운 질문을 할 줄 몰랐네.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잖아.”

“텔레포트 마법진이라고?”

텔레포트 마법은 고위 마법이다.

어떻게 사용해서 가는 걸까.

모르는 눈치이자 소녀가 어리둥절하며 설명했다.

“대륙 곳곳에 있는 텔레포트 관문소를 모르는 거야?”

“그런 곳이 있었나?”

“이상한 아저씨네. 다른 데 살다 왔어? 시골 촌구석 출신도 아는 사실인데?”

소녀가 의심에 찬 눈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아저씨네.”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루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를 수도 있다.”

“그럴 리가. 텔레포트 관문소를 모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걸?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살다 온 거야?”

굳이 대답하면 공허에서 살다 왔다.

루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앞으로 적응 좀 해야겠군.”

소녀가 쯔쯧 혀를 찼다.

“하루, 이틀 가지고 안 될걸? 앞으로 모르는 거 있으면 내게 물어봐. 얼마든지 알려줄 테니까.”

“친절하구나.”

현 상황이 재미있는지 루터가 빙그레 웃어 보이자 소녀의 볼이 살짝 상기 되었다.

그렇게 우연한 동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