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th Circle Lord

# 180 Conflict2

대부분의 엘프들은 수명이 길었다.

어느 정도냐면 최대 천 년까지도 장수할 수 있다.

육식을 멀리하고 정령과 교류하여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엘프는 수명이 길었다.

제압당한 치료사는 드래곤의 노예 시절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당연히 자신이 몰랐던 엘프의 오백 년 역사를 비춰주는 게 가능했다.

자신이 잠들고, 엘프는 드래곤의 영역에 터를 잡았다.

시작은 좋았다.

루터는 특정 종족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보듬는 과정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좋았어. 전혀 문제가 보이지 않아.’

같은 고통을 겪었으니 슬픔을 공유하며 하나로 똘똘 뭉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백 년이 흐르고 이백 년이 흘렀다.

이때는 질리언이 공식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라 갈등의 불씨가 일어나던 때이기도 했다.

치료사의 시선에서 이종족들이 갈등을 빚고 있다.

한 엘프가 드워프를 가리켰다.

“왜 고기를 먹지? 자연은 수호하고 지켜야 해.”

발끈한 드워프가 고함을 지른다.

“내가 육식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보존해야 할 산을 파괴하고 광물을 채취했지?”

“그래서?”

“그건 옳지 않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엘프와 드워프가 서로 대치한 상황에서 고함을 질러댄다.

결국 하나의 공동체가 균열을 일으켰고, 엘프의 핍박에 견디지 못한 드워프들이 짐을 챙기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다.

수인족과의 갈등의 원인도 엘프의 시비였다.

한 엘프가 서로 끌어안고 애정 행각을 벌이는 수인족을 불결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너희 종족은 더럽구나?”

수인족의 성 문화는 엘프들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눈이 맞으면 사랑하고 다른 이와 눈이 맞으면 또 사랑한다.

이런 식으로 얽히고 얽히니 엘프들의 눈에는 더러워 보였다.

비아냥거림에 흥분한 수인족이 엘프를 상처 입혔다.

평소에 숨겨 놓는 발톱에 의해 엘프가 크게 다쳤다.

공동체 속에서 맺은 규칙하에 수인족의 벌이 내려졌다.

“사형이다!”

심판관의 단호하고 엄정한 판결에 수인족들이 크게 반발했다.

“먼저 시비를 일으킨 것은 엘프였다!”

“수인족 전체를 모욕했다!”

엘프족들도 분노를 일으켰다.

“너희들은 불경하고 더러워!”

“썩 우리 마을에서 꺼져!”

엘프와 수인족의 언성이 크게 오갔다.

시간이 흐르고 수인족들 역시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공동체 사회는 엘프 사회로 변모했다.

헌데, 엘프 사회 내부에서 문제가 벌어졌다.

한 엘프가 다른 엘프에게 시비를 걸었다.

“넌 어째서 위대하신 샐리온 님의 불을 다스리지 못하지?”

“나는 불의 정령과 맞지 않아.”

“샐리온 님은 모든 정령왕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셔. 넌 샐리온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부적격 엘프야.”

“말조심해.”

“사실이 그렇잖아? 내가 틀린 말 했나?”

“흥. 사실 따지고 보면 너 역시 마찬가지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불의 정령을 익히는 엘프들은 하나같이 멍청하고 화만 낼 줄 안다는 거. 지금 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네.”

“뭐라고?”

서로 다른 속성을 익힌 엘프들이 다툼을 시작한다.

시작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엘프들은 칼루아가 남긴 마법을 익히고 있었다.

마법은 무궁무진하게 활용이 가능했다.

허나 엘프 사회는 전반적으로 마법을 경시했다.

드래곤의 유산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하며 증오한다.

사회가 갈라지고 찢어진다.

루터는 현재 엘프 사회에서 찢어진 푸른 눈 엘프 사회의 탄생 배경을 관찰했다.

이들은 눈동자는 파랗다.

보통의 엘프의 눈동자는 초록색인데, 또 눈동자 색이 다르다고 따돌린다.

결국 갈라섰고, 이들은 자신들이 특별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여 자립 사회를 구축했다.

‘보아하니 이렇게 탄생한 엘프 부족이 한둘이 아니군.’

다르면 배척하고 틀리면 용서하지 않는다.

루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다른 걸 받아들이지 않아서였군.’

편협하다.

다르다는 걸 틀리다로 받아들였고, 틀린 걸 용서하지 않았다.

엘프 사회에서 시작된 갈등은 이제 이종족 전체로 비화해 내분이 끊이지 않고 있다.

루터는 치료사에게 건 최면을 풀고 정신을 일깨웠다.

멍한 치료사가 화들짝 깬 뒤, 두리번거렸다.

“제가 잠깐 졸았나요?”

“나를 보살피느라 그랬나 보다. 이제 쉬고 싶으니 자네도 물러나게.”

“아직 상태를 지켜봐야 합니다.”

“걱정 마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 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부르기 전까지 나타나지 마라.”

“예.”

치료사가 물러나고 루터는 생각에 잠겼다.

‘이게 옳은 길일까?’

설마하니 그 선한 엘프들이 이런 고집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인간보다 더 하구나.’

서로 다른 종족이 더불어 사는 게 쉽지 않다.

루터의 고민이 길었다.

엘프 사회를 필두로 다시금 통합 사회를 구축하느냐.

아니면 처음 가졌던 생각 그대로 흘러가게 둘 것이냐.

‘어차피 합쳐 놓아도 또 다른 방식으로 싸우게 될 거다.’

루터는 이러한 상황이 자연적인 상황이라 매듭지었다.

엘프 종족의 고유 특성이 부정적인 요소라 할지라도 그들의 선택이었다.

‘적어도 외부의 간섭이 없었으니까. 잠깐만. 외부?’

스스로 추론하던 루터가 흠칫했다.

‘정령왕들은 뭐 하고 있지?’

루터는 잠들기 전 그 어느 정족보다 엘프 사회가 견실하게 자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정령왕.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를 필두로 땅의 정령왕 노아스까지.

그들의 성숙된 의식이 엘프들을 바르게 이끌어 나갈 것임을 확신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엘프가 이종족 사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들이 이 상황을 지켜봤을 리가 없을 텐데.’

잠들기 전에도 정령왕들은 엘프들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런데 그들의 보호가 초래한 결과가 이런 것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정령왕들에게 문제가 생겼나 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엘프들이 저런 이기적인 의식을 지닐 리가 없었다.

루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령왕들을 찾아야겠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 대화를 해봐야 문제 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터는 감각을 확장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허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루터는 고리처럼 연결된 4대 정령계를 하나씩 발견했다.

‘일단 노아스부터 찾아가지.’

정령왕들 중에 가장 신중한 땅의 정령왕.

그와 대화하면 엘프들의 현 현상에 대해 진솔한 대화가 가능할 것 같다.

루터는 즉각 노아스의 정령계를 향해 이동했다.

땅의 정령계는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휘황찬란한 광물의 빛 속에 대지가 펼쳐져 있다.

루터는 드넓은 대지를 가로질러 노아스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현 땅의 정령계의 주인인 노아스였지만, 침입자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감지하기에는 루터는 아득한 존재였다.

루터는 육안으로 노아스를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큰 몸을 지닌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루터가 그의 생각을 일깨웠다.

“노아스. 오랜만이다.”

태산처럼 거대한 노아스는 부르는 목소리에 반개한 눈을 떴다.

점처럼 작은 존재가 보였다.

노아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어떻게 엘프가 정령계에 침입했지?”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지만 설마 내 목소리를 잊고 있을 줄은 몰랐군.”

흠칫한 노아스가 루터를 눈여겨 바라봤다.

여전히 알아채지 못하는 듯하자 루터는 결국 그에게 익숙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노아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터?”

“이제야 알아보나?”

“맙소사. 그대가 돌아오다니.”

노아스는 적잖이 놀랐다.

오백 년이 넘도록 꼼짝도 않던 루터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당황은 잠시였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정말 다행이군.”

“다행?”

“때마침 잘 깨어나 주었어.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필요해 보이더군.”

사정을 아는 듯하자 노아스가 이채를 발했다.

“알고 있나?”

“모두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엘프들을 보며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엘프들이 어떻게 된 게 교육 한 번 받지 못한 어린애들처럼 굴고 있어. 감정적이고 편협해. 자네들이 엘프들을 망쳐 놓은 건가?”

“다 알고 있군.”

노아스가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이러지 않았어. 모두가 조화로웠네. 모두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정령왕들 간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의견 차이? 뭣 때문에?”

“엘프 사회.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

“어떤 의견이 오갔나?”

“샐리온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힘을 강화하자 추구했고, 엘라임은 평화를. 미네르바는 자유를 원했네.”

“그대는?”

“나는 안정을 추구했지.”

루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의견 차이라 보기에 조금 모호하군. 서로 맞춰 가면 될 일이 아닌가?”

노아스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쉽지 않더군. 특히나 그대의 부재 시에는 더욱더.”

그가 허공을 바라봤다.

“정령왕들은 서로가 서로를 등한시한다. 자신의 정령과 정령계 외에는 신경 쓰지 않지. 자네가 있었을 때는 동기가 분명했다. 우리를 구했으며 엘프 해방이라는 공통된 목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대가 떠나고 엘프 사회를 건설하려 하는 방향이 서로 엇갈렸어.”

목적이 너무나 달랐다.

샐리온은 힘을 강화하고자 단합과 결속을 외쳤지만, 미네르바는 구속처럼 보였다.

엘라임은 서로가 아끼며 사랑하며 사이좋게 지내자 했지만, 다른 정령왕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평화를 추구해서 엘프들이 얻은 결과가 드래곤의 노예였다.

노아스는 안정을 원했다.

평화와 안정은 비슷한 맥락이었지만, 노아스 역시 사정은 달랐다.

그들은 전 이종족 전체의 통합이 아닌 오로지 엘프의 폐쇄된 사회를 원했다.

그가 원하는 안정에 다른 이종족이 포함되지 않았다.

루터는 돌아가는 사정을 듣고는 혀를 찼다.

“결국 서로의 맹목적인 욕심이 화를 불렀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니 뜻이 맞을 리가 없다.

결국 그들의 분란은 엘프 사회에 이어졌고, 종래에는 엘프 사회가 흩어지게 되었다.

루터는 노아스를 꾸중했다.

“욕심을 놓았어야 했어. 왜 다른 정령왕들을 존중하지 않았나.”

“존중하지 않을 자들에게 존중할 이유는 없지. 특히나 샐리온은 막무가내야. 그가 기어이 일을 벌이려 하고 있어.”

“샐리온의 이상대로라면 아마도 인간과의 충돌은 그의 의도였겠군.”

“맞네. 그는 물러설 줄 모르고 타협할 줄도 모르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만 추구하지. 그를 막아야 하네.”

“그래서? 현재 상황은?”

“샐리온을 제외한 나머지 정령왕들 사이에서 말이 오가고 있네. 하지만 이 역시 지지부진해. 미네르바는 골칫덩어리야. 그는 다른 이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네.”

“그랬군.”

루터는 정령왕들이 답답하면서도 한심했다.

“어째서 엘프 사회에 간섭하려 했나?”

“우리가 아니면 도울 수 없으니까.”

“변명하지 말게. 갓난아기가 어른이 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다리를 딛고 일어서야 해. 자네를 포함한 정령왕들은 엘프들을 아기 취급하며 여전히 포대기에 감싸 돌고 있어. 그러니 엘프들이 저 지경이 되었지. 윗물이 맑아야 하는데, 진흙투성이야. 애초에 저들의 사회에 간섭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대들의 고집이 엘프들에게 편협함을 안겨주었어.”

루터의 꾸중에 노아스는 일자로 입을 다문 채, 말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번 꼬집었다.

“이게 자네들이 원한 결과였나? 현재의 엘프들은 다른 이종족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향해서도 적대하고 있어. 자네들은 큰 실수를 했어.”

“나는 내 선택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제 보니 고집불통이었군.”

돌덩이라 생각이라는 게 없는 거냐고 쏘아붙이려던 루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이미 굳어진 생각을 뿌리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엘프들이 자멸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을 것이다.

루터는 아쉬웠다.

‘엘프들은 신적인 정령왕들을 너무 가까이했어. 그래서 저 사단이 난 것이지. 처음부터 엘프들과 정령왕의 거리를 벌렸어야 했다.’

너무 끼고 돈 결과가 이것이다.

루터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선택을 내려야 할 듯싶었다.

‘정령왕들을 모두 소집해야겠군.’

저들끼리 아웅다웅한다지만 자신이 나선다면 모두 따를 것이다.

결정을 내린 루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된 게 전부 말썽이냐.”

자신으로 인해 비롯한 결과물이 하나같이 실망감만 안겨주고 있다.

질리언에 이어 정령왕들까지.

‘이러다 설산족까지 문제가 있는지 아닌가 걱정이군.’

그들까지 정령왕들과 같이 문제가 있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루터는 설산족은 나중에 천천히 해결하자 생각하며 눈앞의 노아스에게 지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