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개수의 투표용지, 그리고 투표함까지.

유성은 이 둘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창고 밖으로 나왔다.

선관위 건물을 벗어나기 전, 캐비넷에 가뒀던 요정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올 때 캐비넷에서 꺼내 자연스럽게 기절한 것처럼 꾸며두었다. 바지를 갈아입다가 넘어져 기절했다는 식으로 꾸미기 위해 뒤통수에 작은 혹도 하나 만들어주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번거롭게 캐비넷에 넣었나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일이 조금 빠르게 끝났기 때문에 그냥 했다. 그러고는 곧장 에메랄드 팰리스로 다시 돌아갔다.

“돌아오셨군요. 유성님. 그렇다는 말은…….”

“그래, 성공했어.”

성공적으로 물건들을 빼돌렸다는 말에 티타니아는 리리나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리리나를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티타니아는 리리나에게 잡무를 시켜 그녀를 내보냈다. 티타니아의 집무실에서 일을 보던 다른 요정들도 비슷한 일을 시켜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이제 이 투표용지를 잔뜩 복사할 거야. 이쪽은 도장이 아니라 펜으로 체크하는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한다더라? 투표용지를 복사한 다음에 모두 티타니아, 네 표로 체크해야지.”

“그렇군요.”

“그리고 율이한테 부탁해서 용마법도 걸어야 해. 여기 투표용지에 용마법을 걸어서 조작 같은 걸 방지한다고 하더라.”

“용마법이라면 레이센님이 걸어준 마법이겠네요.”

“다행히 우리 율이가 용마법을 쓸 줄 안다고 하더라. 저번에 티타니아 네가 그랬잖아? 요정 왕국의 수호룡한테 울이를 보내서 마법을 배우게 했다고.”

“네, 맞아요. 레이센님이 율이님을 가르치셨죠.”

“율이가 용지에 용마법을 걸면 다른 투표용지랑 차이가 없을 테니 투표함을 바꾸기만 하면 돼. 여기는 마을마다 투표함을 설치해 투표를 끝낸 다음 수도에 있는 선관위 본부로 옮겨서 개표를 하니까 그때 바꿔치기하면 끝이야. 간단해.”

유성은 쉽다는 듯이 말했지만, 티타니아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에 첫 투표라서 분명 오베론님이 병사들을 풀어서 감시를 철저히 할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투표함을 바꾸시려고요?” 

“나한테는 율이가 있잖아.”

“율이님요?”

“요즘 율이가 계속 폴리모프한 상태로 다녀서 네가 잊었나 본데 율이는 원래 투명하잖아? 우리 율이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투명 드래곤이라구. 율이를 이용해서 난동을 피우면 그때 바꾸면 되지.”

“유성님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시는 거죠…….”

“널 왕으로 만들 꿍꿍이지 뭐긴 뭐겠냐. 넌 나만 믿고 따르면 돼.”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말하는 유성. 하지만 유성의 말은 믿음을 주기보다는 걱정을 안겨주었다. 이미 선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거 리리나한테 줘. 내가 여기 요정들이랑 얘기해보면서 생각한 내용인데 처음 말했던 복지 관련 공약에 이것도 추가하면 될 것 같아.”

“뭔데요?”

“국가 안보와 관련된 거. 나이 많은 요정들은 이런 거에 관심이 많더라. 리리나는 똑똑하니까 보여주면 알아서 잘 도와줄 거야. 그럼 나는 이거 복사하러 갔다 올 테니까 어서 포탈이나 열어.”

티타니아는 포탈을 열었다.

“금방 오셔야 해요. 불안하단 말이에요.”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 테니까 걱정 마. 아, 근데 요정계는 인구가 몇이나 되냐?”

“5만 명 정도 될걸요.”

“꽤 적네.”

무작정 많이 복사할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생각을 하고 복사를 해야 할 듯했다. 인구수가 적었기에 무작정 복사했다가는 러시아처럼 투표율이 140%가 될 수도 있었다. 들킨다면 그대로 단두대에 목이 걸려 한/유성으로 분리될 것이 눈에 선했다.

‘그건 절대 안 되지.’

적당히 조절하며 복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포탈로 걸어갔다.

***

“야, 천마. 중국에 있는 니들 도시 안에 인쇄소 있냐?”

“……다짜고짜 찾아와서 하는 소리가 고작 그런 건가.”

무림맹과의 휴전, 막내딸의 여행 등으로 천마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가뜩이나 생각할 것아 머리가 지끈지끈했는데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유성이 막무가내로 찾아와서 하는 말이 고작 저런 말이라는 사실에 천마는 열이 받았다.

“있다.”

“어디에?”

“알아서 찾아라.”

“길 찾기 어플에 치면 나오냐?”

“상식적 생각해봐라. 검색한다고 나올 거라고 생각하나?”

“아, 진짜 촌동네 수준하곤. 괜히 여기까지 왔네.”

드르륵!

탁!

유성은 자기 용건만 말하고서 천마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천마의 이마에 핏줄이 울긋불긋 솟았다.

빠득!

“혈압약을 먹어야겠어…….”

안 그러면 주화입마가 올 것 같았다. 지금껏 고강한 내공 덕에 어떤 약도 챙겨 먹을 필요가 없었던 천마는 이날 이후로 혈압약을 챙겨 먹었다고 한다.

천마는 안 먹던 혈압약을 찾고 있을 무렵, 지구로 돌아온 유성은 마교의 도시에서 인쇄소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첩첩산중에 숨어 사는 마교였기에 인터넷 지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유성은 도시의 마교도들에게 물어 물어가며 인쇄소를 찾아다녀야 했다.

“이제 용마법만 걸면 끝이군.”

원본 투표용지에는 지폐 위조 방지 장치처럼 용마법 인장이 찍혀 있었고 복사본에는 인장이 없었다. 돌아가서 율이와 함께 인장을 새겨 넣기만 하면 감쪽같을 것이다. 유성은 잔뜩 인쇄한 투표용지를 들고 다시 요정계로 돌아갔다.

쿠궁!

유성은 복사한 투표용지를 담은 상자를 티타니아와 율이의 앞에 내려놓았다.

“와, 엄청 많네요.”

“감탄할 게 아니야. 이제 여기다가 일일이 체크해야 하거든. 어서 시작해. 이거 2만 장 넘어.”

“그렇게나 많이요?”

“그래, 그러니까 얼른 시작해라.”

2만 장이 넘는 투표용지였지만 티타니아는 마법을 사용하여 금방 일을 끝냈다. 단순한 반복 작업을 하는 데에는 마법이 직빵이었다.

“오, 금방 끝났네?”

“마법은 대단하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티타니아는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티타니아가 우쭐해할 때 자주 하는 포즈다. 참 오랜만에 보는 포즈였다.

“율이님! 이제 용마법을 부탁드려요!”

“아라써! 이 정도는 껌이지! 끙차!”

율이는 작달막한 몸둥이를 일으키고는 투표용지 무더기 앞에 섰다.

“빠빠! 잘 봐! 엄청 대단하니까!”

붕! 부웅!

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몸을 푼 율이. 율이의 입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음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평범한 주문들과는 다르게 규칙성도 없었고 뜻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마저 괴상했다.

“무슨 주문인지 알아듣기 힘드시죠?”

“응. 다른 마법 주문들과는 아예 다른 방식의 마법 같네.”

“드래곤들의 마법은 평범한 마법들과는 작동하는 방식도 다르고 고차원적이니까요. 실은 저도 지금 율이님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어요. 용언은 오직 드래곤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거든요.”

티타니아의 말처럼 용들의 언어는 번역 마법을 사용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똑같이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신들도 못 알아듣나?”

“네, 상급 신이든 하급 신이든 드래곤이 아니라면 절대 알아들을 수 없어요. 용마법도 드래곤이 아니면 절대 사용할 수 없구요.”

선관위의 요정이 그렇게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들조차 어찌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지만 내 딸은 드래곤이라 이거야.”

우우우웅!

율이를 중심으로 주변의 마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율이의 주변을 맴돌던 마나는 모두 복사한 투표용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빠빠! 끝나써! 율이 잘했지!”

복사한 투표용지 위에는 원본과 똑같이 생긴 인장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녹색의 빛으로 빛나는 용마법 인장. 조금의 차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완벽했다.

“어이구! 우리 율이! 아주 잘했어요~ 장하다 장해!”

유성은 방방 뛰며 칭찬을 바라는 율이를 번쩍 들어 올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율이는 쬐끄만 날개와 꼬리를 붕붕 흔들며 기뻐했다.

“그럼 이제 끝인가요?”

“끝은 무슨 끝이야. 끝날 때까지는 아니지. 내가 도와주기는 할 거지만 너도 열심히 해야지. 리리나가 공약 수정해서 가져오면 그거 잘 외우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선거 유세해야지. 마을 시장 돌아다니면서 음식도 좀 먹고 사진도 같이 찍고 친한 척도 좀 하고.”

“으, 저 낯가림 엄청 심한데.”

“지금 네가 그거 따질 상황이니? 생전 처음 보는 사람도 10년 지기 친구를 보듯이 대하란 말이야.”

“노, 노력해 볼게요.”

“노력 말고 그냥 하려무나. 아, 그런데 티타니아 너는 지지 세력이 아예 없니? 리리나 밑에서 일하는 사무원들 말고는 안 보이던데.”

“제 지지 세력이요?”

“응.”

“있기는 있는데 다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라서요…….”

“얘가 찬밥 더운밥 못 가리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다 똑같은 한 표인데. 얼른 가자. 그 사람들 도움이라도 받아야지.”

참으로 안일한 티타니아였다. 하긴, 저러는 게 티타니아다운 행동이기는 했다.

“알겠어요. 그럼 함께 가요. 유성님.”

***

“허어……. 참…… 허어…….”

티타니아의 지지 세력을 본 유성은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티타니아가 나이가 지긋하다고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숨넘어가기 직전의 사람들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으이? 누가,,,, 왔는겨어,,,,?”

“가서,,, 확인,,, 좀 해봐~~!”

“그라믄,,, 네가 가서,, 보면 될 거 아녀~ 으데서 어른한테 시키고 즤랄이여~ 앗!”

침을 튀기며 말하던 늙은 요정의 입에서 틀니가 튀어나왔다. 유성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틀니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제가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라고 했잖아요.”

“티타니아, 너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지지 세력이 저런 언데드……. 아니지 저렇게 연로하신 분들이냐. 너 사실 몇천 살 뭐 그런 거야? 설마 너 치매 걸려서 멍청했던 거야?”

“치매라뇻! 어떻게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실 수 있어욧! 전 아직 창창한 160이라구요!”

160살이라.

티타니아는 유성의 증조 할아버지, 아니 고조 할아버지뻘이었다.

“요정계에서 160이면 아가씨죠! 아가씨!”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럼 저분들은 뭐냐.”

“저희 아버지 밑에서 일했던 가신들이에요.”

“너희 아버지?”

“네! 저희 아버지요! 저희 아버지는 무려 요정계의 왕이었다구요! 요정계의 전대 왕이 바로 저희 아버지였어요.”

티타니아는 전대 요정왕의 딸이었다. 전대 요정왕이 병에 걸려 급사하기 전에 얻은 딸이 바로 티타니아였다. 전대 요정왕이 죽을 때 티타니아가 너무 어렸기에 전대 요정왕은 동생인 오베론에게 왕위를 물려줬다고 했다.

“으잉? 이거,,, 울 공주님 목소리,,, 아니여어?”

세월이 흘러 귀가 먹고 이빨도 다 빠져버린 가신들이었지만 모시던 주군의 딸인 티타니아의 목소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력을 다해 휠체어의 바퀴를 돌리며 티타니아에게로 다가왔다.

끼이익! 끼이익! 끼이이익!

아주 느리게 말이다.

“하이고~! 숨차다!”

가신들은 채 1m도 가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그대로 뒀다간 진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냥 우리가 가자. 그냥 내버려 두면 저 영감님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