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 영화상.

그 화려한 막을 열겠습니다.

청룡의 여신 이소영, 청룡의 남자 김정수.

웅장한 음악과 함께 환한 목소리의 내레이션과 함께 전체적인 진행을 맡을 MC가 등장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제가 시작될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김정수입니다.”

막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작년에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는 여전하다는 듯.

그 한마디에 환호성이 쏟아진다.

“이소영 씨.”

“네.”

“정말 반갑습니다.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방청객은 전부 다 찼지만, 이름표가 쓰인 좌석은 군데군데 비어있는 것이 눈에 뜨였다.

그것도 상당히.

“그렇죠? 1년 정말 빠르게 지났습니다. 청룡 영화상 무대에서 만나는 김정수 씨는 항상 반갑습니다.”

이래저래 말이 많은 영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그래도 어느 정도는 권위가 남아있다고 여겨지는 시상식이기에 어지간하면 참석을 하는 것이 보통. 건강상의 이유를 비롯하여 정말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오늘은 영화인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입니다. 반가운 분들이 많이 계시네요. 이유규 씨, 반갑습니다.”

참석하지 않은 배우에게는 상을 주지 않겠다며 대리 수상을 폐지함으로써 대대적인 비난을 샀던 모 영화제. 몇 군데가 도려내 졌다고 말할 정도로 빈 곳이 많았던 영화제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올해는 어떤 분들이 수상하게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자 그럼 레드 카펫 영상을 보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멋진 배우들의 영상과 함께 쏟아지는 격려의 소리.

이어지는 청룡 영화제에 대한 간단한 소개.

“한국영화의 진흥과 대중문화 발전을 위해 마련된 청룡 영화상의 시상 부문은 총 18개입니다.”

그리고 진행 방식.

영화 관계자의 설문과 네티즌의 투표를 통해 후보선정. 8명의 심사위원과 네티즌 투표로 수상자 및 수상작 선정.

현장에서는 MC의 목소리로.

화면에서는 자막으로.

“어떤 심사결과가 나올지 끝까지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발표 직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는 독특한 전통이 청룡 영화상의 특징이다.

무대 뒤에서 시상식 도중 트로피에 수상자 이름을 실시간 새기는 것.

그래도 국내에선 공정하다고 평가받는다.

“청룡 영화상은 스포츠 XX 및 LBS가 후원하며 정청원이 함께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시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상은 신인 남녀부문의 상인데요,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상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가 더 특별한 상입니다.”

“신인 남우상 수상엔 전년도 수상자인 최동일 씨와 그리고 33회 여우 주연상을 받은 김상희 씨가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

처음 순서가 신인 남우상이었나.

각 작품과 함께 등장하는 배우들.

“누구나에게 삶은 찬란하지 않다, 이선우.”

스크린에 흘러나오는 짤막한 모습.

원체 유명한 성인 노이슈반슈타인 성이지만 너무도 진한 빛에 가려져 있다.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본다면 환상적이면서 이국적인 정취에 푹 취할 정도로.

그리고 그 아래에 남자B가 서 있었다.

소년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독일의 성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없었다.

끝나는 나날의 끝.

사랑에 충격을 받은 뒤 보았던,

처음에 상상했던 순애(純愛)라는 사랑의 형태.

그저 축복을 기원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괴물, 김서호”

선우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시공간을 넘어 멀리.

남자B를 추억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스크린에 흘러가는 다른 사람의 이름과 영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 이제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커다란 5개의 스크린에 후보 5명의 얼굴이 비친다.

선우 외엔 다들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일말의 기대를 담은 입술.

하지만 어딘가 체념한 느낌.

“제41회 청룡 영화상. 신이 남우상. 발표는 최동일 씨가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자신이 느꼈던 남자B의 모습은 올곧고, 너무도 순수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분명히 존재했던 정신적 교류.

육체적 관계는 없었지만, 외도임에는 분명했던.

“네, 신인 남우상은.”

브라우닝의 시를 읊으며 사랑하는 방법을 헤아렸던 남자B.

그의 사랑은 논리를 앞질렀다.

옳고, 그름을 떠나 선우에게는 순수하게만 느껴졌던 사랑.

하지만 누군가는 순수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고,

어떤 누군가는 괜찮다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틀리다고 그랬고,

옆의 누군가는 안타깝다고 하였고.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같은 영상을 보고도 생각하는 바는 모두 달랐다.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파고들면 함축된 의미는 모두 다르다.

‘괜찮다.’는 것도 범위가 제각각.

“이선우 씨, 축하드립니다.”

최동일의 말과 함께 처음 내레이션과 다른 맑고 또랑또랑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나에게 삶은 찬란하지 않다」의 이선우 씨는 남자B의 역할을 열연.

시대를 뛰어넘은 감정을 연기한 그의 연기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선우 씨?”

같은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하나의 장면도 평가가 이렇게 엇갈리는데.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가치관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본래 의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생각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아무런 의도가 없이 설정한 것들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사람이다.

의무 교육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보았을 소나기.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가 소년의 등에 업혀 갈 때 입었던 분홍색 스웨터의 색깔에 원작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교육을 받을 때는 그것이 진리라는 것처럼 특별한 의미가 있었고, 시험에는 항상 ‘정답’이 있었다.

“아, 네.”

김서은이 카메라 때문에 평소보다 좀 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다소 멍한 느낌의 선우였기에 발로 툭툭 건드렸다.

‘너무 깊이 생각에 빠져버렸나.’

그제야 선우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김서은, 유강진 감독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무대 앞으로 걸어나갔다.

“네, 남자B의 역할을 연기한 이선우입니다.”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사람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

하지만 다르다고 말하기엔 너무도 먼 간극인 경우도 무수히 많으니.

“그, 떨리네요. 제가 남자 B를 맡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어요. 「누구에게나 삶은 찬란하지 않다.」는 두 번째 작품이었거든요.”

그 틈은 시간에 따라 좁혀지기도 하고, 혹은 더 멀어지기도 한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니까.

변화의 결과는 생각의 차이를 불러온다.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그런 것들을 떠나서.

그것이 미세하더라도.

시간이 겹치면 쌓이기 마련.

그것은 사고(思考)의 흐름도 마찬가지.

“남자B는 저에게 있어서 정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외적으로는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훌륭하게 밟아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고, 내적으로는 제가 생각하던 순애(殉愛)라는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죠.”

김이진을 연기 했을 때 그리던 사랑.

남자B를 연기 했을 때 느꼈던 사랑.

암살자로서 연기를 했을 때 보았던 사랑.

타임 어택에서 연기를 했을 때 망설였던 사랑.

말은 똑같이 「사랑」이었지만 그 형태와 모습은 제각각.

“남자B에 대한 해석은 참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분명히 지금 생각하시는 것과 시간이 흘러서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거예요.”

인기.

환호성.

팬.

행복의 형태.

선우의 시각은 처음과 지금은 하늘과 땅……. 까지는 아니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바다에서 다른 바다를 건널 정도.

참 많이 바뀌었다.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감정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대부분 모호해졌고,

애매하게 보였던 것들은 어느 정도 확실하게 되었다.

혹은 뒤섞이거나 떨어져서 흐려진 끝에 분명하지 않게 되거나.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유강진 감독님과 김서은 양을 비롯한 모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앞으로도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연기하고, 살아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데.

10년 후에.

20년 후에.

‘나는 남자B를 떠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시상식이 끝나고 시간이 좀 더 흘러서.

두꺼운 얼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려던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한파는 다시 세상을 움츠리게 하였다.

그리고 산중 어딘가에 굳게 얼어있던 얼음의 눈물을 멈추게 만들었다.

“오늘은 좀 따뜻해서 살 것 같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야외 촬영을 하는 데에 있어서 고생했던 점이 다소는 누그러진다. 덕분에 여기저기 지펴있던 온열 기구를 비롯하여 손에 들고 있는 손난로까지. 똑같았지만 체감하는 정도가 달랐다.

“어제나 오늘이나. 거, 난로 앞에 쪼그리고 있지 말고. 와서 다시 봐봐. 크레인을 좀 더 뒤로 물리고, 카메라를 10도 정도 더 기울이는 게 어때? 감독이란 사람이.”

“빨리 겨울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징글징글하네, 올해는. 아무튼, 10도면 너무, 아니다. 좋아.”

오전 촬영이 끝나고, 오후에도 카메라가 도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처지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다들 지쳐있는 듯했다. 쌩쌩 해 보이는 것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 영화감독과 촬영 감독뿐.

“OK. 이렇게 하고, 오늘 촬영은 여기서 마무리 짓자고.”

이사를 하는 장면.

영화의 도입부.

크랭크 인을 하는 날로부터 시간이 좀 흘러서, 이제야 영화의 도입부를 찍게 되었다.

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이 보통 순차 적으로 찍는 것이 기본이지만,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기본일 뿐. 여건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는 너무도 흔했다.

“그나저나 제목은 아직도 안 정해진 거야?”

“또 뭔가 있는지 투자사들이 말이지. 이래서야. 그냥 L그룹 투자만 받고 끝낼 걸 그랬나.”

“그랬으면 이렇게 호화롭게 촬영 못 했지. 투자 못 받아서 안달 난 사람이 널리고 널렸는데. 그러다 욕먹는다?”

원래 영화라는 것이 만드는데 엄청난 물자가 소요된다.

인력은 기본이요, 실제로 카메라를 들이밀기까지도 많은 과정이 존재한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헐, 하고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복잡할 거라는 어림짐작은 있었지만, 뭐 그렇게 복잡해요?

결국 모든 것이 돈이요, 언제나 예산이라는 것은 부족한 법.

그리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가장 최대한 효율을 내는 방법 중 기본은 최소한의 인건비를 지출하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촬영장은 대부분 항상 분주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생각 외로 출연료에 너무 지출이 컸어.”

그렇게 말하는 감독의 눈동자에는 환한 아우라를 풍기는 선우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영화판에서 흔한 일이라지만. 이시민 감독은 유독 빛을 발하는 시기가 늦게 찾아왔다. 영화 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 3년 전. 그리고 대중들이 그 이름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 작년.

그때까지 수없이 많은 배우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분위기가 확 바뀌는 사람은 참 드물었다.

감독이란 타이틀을 달기까지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이선우라는 배우는 유독 심하다는 느낌.

“그래서 돈이 아깝다고?”

정말로 다른 사람이 내려앉았다는 듯.

배우라는 직업이, 연기한다는 것이 원래 그렇다지만. 작가나 감독에게 캐릭터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서 저런 연기를 펼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아무리 베테랑 배우거나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오로지 대본만 보고서 이해하기 어렵거나 막히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막히지 않는다고 해도 대게는 문제가 생긴다.

제대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작가나 감독이 원하지 않는 그림이 그려지니까. 하지만 이선우라는 배우는 달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상적으로 그렸던, 마치 실존 인물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다.

다른 사람에 의한 NG 장면 마저 덮어버릴 정도로.

정말로 실제로 있던 인물이라면 그런 반응을 보여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장면에선 여전히 고민 중이다.

분명히 실수인데.

대본에는 나오지 않는 대사인데.

애드립이라고 하고 넘어갈까.

한두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저건 그냥 잘하는 거다.

어째서 천재라는 소문이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지 이해가 갈 것 같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어디까지 저런 연기를 펼칠 수 있을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면 중간까지?

지금까지 수없이 외쳤던 레디, 액션이란 소리와 함께 들리는 슬레이트 소리가 유독 흥미롭게 들리는 것은 참 오랜만의 일이다.

“저 정도 배우면 웃돈을 더 줘서라도 모셔와야지. 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절해야 할 판이야. 연기 실력과 함께 홍보도 딸려오니까. 배우가 원하는 설정이 딱 들어맞았다는 게 행운이지.”

겉으로는 로맨스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회 고발적 측면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아무튼 이선우랑 이서연 데려온다고 진짜 쪼들리게 촬영할 뻔한 거를 공동 투자받으면서 면했으니까 볼멘소리는 그만하고.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는 거야 아무래도 좋지만, 영화에만 피해는 안 오게 잘 중재하라고.”

한 가지 흠이라면 아직도 제목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일까. 제목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투자사들의 싸움으로 번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

“진짜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겠어.”

“새우는 무슨. 그래도 흰 수염고래 싸움에 낀 돌고래 정도는 되겠지. 선우 씨가 한 마디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미 확정된 영화의 제목이 바뀌는 경우도 흔한 일이다.

이는 영화 하나에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즉, 일종의 파워 게임.

투자사가 아니라 배우의 입김이 작용하는 때도 있다.

“괜히 한쪽 편들어줬다 손해 보기 십상이니. 그러는 감독님은 왜 중립이야? 배우한테 떠넘기려고 하지 말지?”

“아니, 진짜로 난 둘 다 제목이 맘에 들어서 그런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