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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가 미켈레의 상인들을 개인적으로 접견을 허락했다는 소식에, 다른 상인가문의 상인들이 바빠졌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동안 상인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던 왕이 왜 그들을 만났을까?

비텐하임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 있다 보니, 오히려 정보를 캐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야 고작 네댓 명 정도였고, 그들로부터 정보를 캐내려면 공식적으론 불가능했다.

비공식적인 루트도 거의 막혀 있다시피 한 상태였다. 기사들한테 잘못 얘기를 꺼냈다간 두들겨 맞을지도 몰랐고, 미켈레 상인들이야 알려 줄 턱이 없었다.

그렇다고 왕에게 알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콘타리니, 지아니, 모로시니는 불안감에 떨었다.

상인들이 불안감에 떨든 말든, 알브레히트는 자신이 묵고 있는 아담한 방 안에서 의자에 앉아, 턱을 만지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알브레히트가 드래곤을 잡고 의식을 잃었을 때, 웨스카드가 그의 꿈에 잠깐 나타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알브레히트는 그때 깨어나서 기억하지 못했듯이, 지금도 왠지 모르는 기시감이 들 뿐, 기억해내지 못했다.

알브레히트의 영민한 머리가 무의식이라는 장막 속 깊숙이 감춰진 기억에 손을 뻗으려 했으나 잘 닿지 않았다.

워낙 난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편지의 내용은 머릿속에 새겨지듯 뚜렷이 기억났다.

크고 웅장하며, 낭낭하게 울려 퍼지던 아킬리아의 말소리. 어떤 마법적인 것이 작용했으리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로자문드의 가문 이름이 웨스카드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알브레히트를 포함해 마법이 시연되던 당시에는, 다들 마법에 홀려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란돌프나 기사들도 그렇고, 미켈레의 상인들도 곧 알아차릴 듯했다.

그런데 그걸 알아차린다고 한들, 그게 당최 무슨 뜻인지는 알브레히트를 포함하여 아무도 몰랐다.

운명의 길에서 기다리겠다고? 도대체 무슨 말인가? 비유인지, 아니면 정말로 살다 보면 그냥 우연히 만나게 된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알브레히트는 마법이란 것을 항상 대면할 때마다 현실감각이 옅어지는 듯했다. 애초에 환상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문제는, 현실감이 옅어지다 보니 재판에 관한 일도 심드렁해졌다는 점이었다.

설마 미켈레 가문의 상인들이 이걸 노리고 접견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반응을 보건대, 그들도 편지 내용을 몰랐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브레히트는 스스로 재판에 관해서 환기했다. 자신의 명을 받고서 전하던 와중에 난데없이 습격을 받아 처참하게 쓰러진 병사를 생각했다.

병사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자신의 검까지 맡겨 보냈는데, 감히 일리디아를 노리고 습격을 했다고?

상인 놈들이 어떤 작당을 했건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죽일 결심은 하고 있었다.

단지 어느 만큼 죽일지가 재판의 관건이었다. 상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재판 날이 왔다. 아침부터 상인들이 란돌프의 결혼축제가 열렸던 광장으로 삼삼오오 모였다.

그들은 다른 가문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서로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당주들도 구금이 풀려 재판 장소로 모였다. 그들은 다른 당주들을 슬쩍 한 번 보고는, 다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숲속의 새들이 활기찬 울음소리로 노래 부르고 있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창백한 푸른 빛을 띤 아침이 오히려 상인들의 뒤숭숭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호수는 날씨가 어떻건 언제나 그때그때 옷을 갈아입으며 아름다움을 뽐냈듯이, 흐린 날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상인들이 비가 올지 안 올지 가늠하기 위해 하늘을 살폈다. 먹구름이 그렇게 꽉 끼지는 않아 잘하면 안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하늘의 일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상인들이 비가 올지 안 올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알브레히트에게 죽을지 살아남을지도 알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댓 명의 기사들이, 흰 바탕에 검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문장이 그려져 있거나, 흰 바탕에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들을 들고 장내로 들어섰다.

기사들의 사슬갑옷이 쇠끼리 부딪히며 간간이 치링치링 하는 소리를 냈다. 상인들은 지금 그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소름 돋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200여 명에 달하는 기사들은, 멀리서 장내를 포위한 채 차가운 시선으로 상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보다 더 먼 곳에, 산 중턱에서 비텐하임의 사람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재판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 있었다.

곧이어 알브레히트가 란돌프를 대동한 채 장내로 들어섰다. 재판 날이라고 해서 복장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검은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튜닉을 입고서, 허리에는 아버지가 주신 검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에, 검집에 마른 피가 묻은 일리디아를 들고 있었다. 상인들은 왕이 저 일리디아로, 재판 결과에 따라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알브레히트는 공터의 중앙으로 가 급조한 단 위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서 고고하게 상인들을 쓸어봤다. 안 그래도 흐린 날씨 때문에 알브레히트의 푸른 눈이 더 차가워 보였다.

각 가문마다 스무 명 남짓한 상인들이 당주를 위시해 서 있었다. 그들은 다른 가문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재판을 시작하겠다. 각 가문의 당주들은 앞으로 나와라.”

알브레히트 입에서 특유의 굵직한 음성이 나왔다. 그리고 란돌프가 크게 소리쳤다.

“각 가문들의 당주들은 앞으로 나와라!”

왕과 마찬가지로 금발과 푸른 눈을 한 지크마링겐의 변경백이 당당하게 외치자, 당주들이 알브레히트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알브레히트는 자신 앞으로 온 네 명의 당주들을 잠시 바라봤다. 세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인 루크레치아를 지배하는 네 사람이었다.

루크레치아를 넘어 남부를 거의 완전히 장악하듯이 하고 있었고, 동대륙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알브레히트 못지않게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반목하고 서로의 등에 칼을 꼽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디에고가 상인 시절 모시던 당주도, 저들의 일원이었으나 축출되었다.

알브레히트는 디에고에 생각이 미치자, 저 멀리 있는 디에고를 바라봤다.

발렌티나와 손을 꼭 잡은 채, 불안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발렌티나가 침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갈색 머리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서른 줄에 접어들었으나 미모는 그대로였다. 특유의 고양이 같은 눈이 매력적인 건 여전했다.

알브레히트는 냉정하게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당주들을 바라봤다.

“내 명을 전달하던 병사가 습격당한 건에 대하여, 너희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겠다. 변론은 대리인을 내세워서 해도 되며, 왼쪽부터 돌아가며 듣겠다. 그러면 모로시니의 파브리치오부터 변론을 시작해라.”

알브레히트는 지구의 기억을 살려 나름 재판 흉내를 냈으나, 시대적 한계 때문에 주먹구구식일 수밖에 없었다.

본질적으로 수사기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건에 관해서 미리 살펴보고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재판 당일 피고인의 변론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판결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선고날짜를 따로 정해도 되겠지만, 유전자 검사는커녕 지문이란 개념도 없는 세상이기에, 선고날짜를 따로 잡아봤자 조속한 재판을 방해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선고날짜를 따로 정하면 법관이 따로 심사숙고할 시간을 가지겠지만, 그거야 그때그때 상황 봐서 할 일이었다.

현재 사건의 당사자인 상인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알브레히트는 서둘러 마리아에게 돌아가 봐야 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인데도 불구하고 알브레히트가 굳이 이런 재판을 하는 이유는, 주위에서 보고 있는 기사들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알브레히트는 나중에 라이센 기사단의 기사들을 왕의 재판관으로서 각 지방을 순회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들에게 전문적인 법지식을 기대하기란 힘들었다. 이번 재판은 적어도, 이러한 형식을 갖추고 사건 당사자의 말은 들어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단순히 기사들에 대한 교육 목적을 넘어서서, 현시대의 재판을 고려하면, 그래도 이게 가장 선진적인 재판방식이었다.

이 시대의 재판이란, 인민재판이나 종교재판, 혹은 그저 영주의 기분에 따라 처분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혐의자에게 돌을 던져서 그가 살아남으면 무죄라거나, 이단심문관이 부녀자에게 돌을 매달아 강물에 빠트린 뒤, 어렵사리 물 위로 올라오면 마녀요, 익사하면 사람이니 천당에 갈 것이라고 하는 게 이 시대의 재판이었다. 차라리 결투재판이 가장 공정했다.

사건의 당사자에게 충분히 변론할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재판관이 그 얘기를 듣고서 판단할 것. 아주 단순하지만 단순한 것도 못 하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지금 재판은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이 아니었다.

알브레히트는 이미 상인들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만큼 죽이느냐가 관건이었다. 상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왕의 위신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피를 봐야 왕의 위엄이 서는 것이었다.

알브레히트의 말에 당주들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당주의 최측근들이 이미 준비했다는 듯, 대여섯 명이 당주에게 다가왔다.

그중에 발렌티나도 보였다. 디에고는 발렌티나와 꼭 마주 잡고 있던 손을 마지못해 놔 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발렌티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잠시 알브레히트와 눈이 마주쳤지만, 알브레히트는 일부러 눈길을 피했다.

먼저 지목되었던 모로시니 측 사람들이 뭔가 쑥덕쑥덕 얘기를 하더니, 한 중년인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서 알브레히트 앞으로 나와 말했다.

“폐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유일한 목격자이니만큼, 그를 불러 여기, 공개된 재판장에서 얘기를 듣고자 하옵니다.”

알브레히트는 눈썹을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의 증인신문 같은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지구 현대인이라면 상식이지만, 이들은 이 같은 재판이 처음이었다. 알브레히트는 이들이 나름 본질을 꿰뚫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째 재판의 모양새가 갖춰지는 느낌도 들었다.

알브레히트가 란돌프를 보며 말했다.

“괴츠를 불러와.”

“알겠습니다.”

란돌프가 근처에 호위로 서 있는 기사에게 다가가 왕의 말을 전했다. 기사는 장내를 벗어나서 병상에 누워 쉬고 있던 괴츠를 부축하며 데려왔다.

“편하게 의자에 앉아.”

워낙 중상을 입었던 자인지라 의자에 앉는다고 해서 편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서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왕 앞에서 앉아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괴츠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얼굴에는 여전히 왼쪽 눈을 가리며 사선으로 붕대가 감겨 있었다.

로자문드의 성실한 간호 덕분인지,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혈색이 조금 좋아 보이는 것이 건강을 되찾아가는 중인 것 같았다.

괴츠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단 아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상인들은 무표정했으나, 내심 불안했다. 도대체 왜 모로시니가 저 병사를 부른 걸까?

곧이어 증인을 요청했던 중년 상인이 헛기침하며 병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병사는 평소 같으면 감히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어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크흠, 흠. 나는 루크레치아의 상인가문, 모로시니의 알론소라는 사람이네. 오늘 재판 때문에 그대를 불러, 사건 당시에 관해서 몇 가지 묻고자 한다네. 어디 보자...... 그래, 그대는 로엔란트의 남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화전민촌에서 왕의 명을 받들어 일리디아를 가지고 라이팅겐으로 향하던 게 맞나?”

괴츠는 상황이 주는 혼란스러움 때문에 얼른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곧이어 상인의 말을 되짚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그러면 습격을 받은 건 마을을 떠난 지 얼마가 되었을 때인가?”

“사, 사흘. 사흘이 지나서입니다.”

괴츠가 마을을 떠난 지 사흘 후라면 알브레히트는 여관촌에서 쉬고 있던 때였다.

“그때가 밤이었나, 낮이었나.”

“해 질 무렵이었습니다. 일리디아를 보여주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먹을 걸 공짜로 얻어먹으면서 동료들과 함께 기분 좋게 길을 가던 중이었는데...... 옆에 수풀이 있는 길을 지나가다가 그 수풀에서 튀어나온 복면의 괴한들에게 습격받았습니다.”

“그 복면의 괴한들은 총 몇 명이었나?”

“네다섯 명쯤 됐나? 하도 경황이 없어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그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 일행은 저를 포함해 다섯이었습니다.”

“그자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였나? 어떤 무기를 들고 싸웠지?”

“무기는 모두 검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은 제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다만, 일리디아를 뽑아 휘두르자 상대의 무기고 갑옷이고 죄다 베어버렸습니다. 죽이진 못했지만 몇몇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들이 일리디아를 뺏으려 했으나 죽을 각오로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사람들이 멀리서 보이자 달아났습니다. 그때 콘타리니의 문장이 그려진 천을 떨어트리고 갔습니다.”

병사의 마지막 말에 콘타리니 측 사람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재빨리 알브레히트의 안색을 살폈으나 왕은 그저 무덤덤했다. 괴츠를 신문하던 상인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질문을 했다.

“그러면 혹시 싸우면서 그들의 폼멜을 보진 못했나?”

“폼, 뭐라고요?”

검은 귀족이나 기사들이 주로 쓰는 무기였지, 일반병사나 평민들이 자주 쓰는 무기는 아니었다.

병사들 중에도 검을 부무장으로 차고 다니는 자가 많았으나 하나같이 품질이 좋지 못했다.

괴츠는 검에 대해 익숙지 않다 보니, 각 부위의 명칭에 대해서 잘 몰랐다.

“검의 손잡이 부분 끝에 있는 것 말일세. 대체로 둥그렇기도 하고 안에 문양을 새겨넣기도 하지.”

이쯤 되자 알브레히트의 눈이 빛났다. 듣고 보니 뭔가 범인을 색출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왜 괴츠에게 찬찬히 물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싶지만, 어쨌든 재판을 기회로 이렇게 알게 됐으니 잘 됐다 싶었다.

그런데 알브레히트가 물었어도 범인을 잡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몰랐기에, 상인들부터 잡았던 판단은 일단 맞았다.

상인의 물음에 괴츠는 그렇구나 그게 폼멜이구나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상인은 품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손바닥만 한 둥그런 청동판에 새카만 까마귀가 날개를 접고 앉아있는 게 새겨져 있었다.

“혹시 이런 모양이지는 않던가?”

괴츠는 청동판의 까마귀를 보더니 움직이기 불편한 몸인데도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마, 맞습니다. 그 폼멜 뭐시긴가 하는 거에 저게 있었어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괴츠의 말마따나 상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두가 궁금했다. 주위에 있던 상인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뒤에 있었기 때문에 괴츠를 신문하던 자가 무슨 물건을 꺼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브레히트는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까마귀 문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청동판을 들고 있던 상인이 자신 있게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자! 다들 보시오! 이건 동부의 영주, 헤스테인의 오트빌 가문 문장이오!”

알브레히트는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이름을 듣자,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헤스테인은 알브레히트와 함께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던 주요 지휘관들 중 하나로, 알브레히트 대신 필립을 죽였던 자였다.

그는 필립이 죽고 나서 알브레히트와 결별한 이후, 동대륙의 북쪽을 먹으려 했었다. 그러나 상인연합의 모략으로 보급이 끊겨 결국 실패한 채 본국으로 돌아갔다.

영주답지 않게 깡패처럼 건들거리는 그의 모습이 알브레히트의 뇌리를 스쳤다. 머릿속에서 그가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브레히트는 헤스테인에 관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첫 만남에서 그를 거의 죽일 뻔한 것도 기억났고, 거래를 하자며 자존심을 숙이고 퉁명스럽게 사과하던 것도 기억났다.

필립과 그 일당들이 워낙 막장이라 차라리 헤스테인이 나아보였던 현실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알브레히트는 헤스테인과 헤어지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창녀를 품느니 마니 했던 게 기억났다.

그가 도대체 왜 이제 와서 내 전령을 습격했지? 무슨 이득이 있다고? 알브레히트는 화나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병사를 신문하던 상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마치 칼자루를 쥐고 상인연합의 다른 가문들에게 휘두르는 것 같았다.

< 19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