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이 검을 뽑자마자 라비락들도 살기를 눈치 챈 듯 곧바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악!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내며 쥐 대가리를 한 몬스터 라비락이 달려든다.

쥐 대가리를 하고 있지만 하체는 원숭이의 것과 닮아 있었다.

짧아 보이는 두 다리지만 그런 외견과 달리 움직임은 상당히 민첩하고 날카로웠다.

사람 정도의 몸집을 가진 괴물들이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녀석들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져 있다. 플레이어들의 것인지 아니면 미궁에서부터 가져온 무기인지 알 수 없지만 낡은 단도가 앞으로 뻗어 온다.

“한심하군.”

일직선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단조롭기 짝이 없는 그 공격을 보며 유현은 라비락을 무기 째 벨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눈앞으로 새하얀 섬광이 내달렸다.

그 이후 라비락이 내지르던 단검은 라비락의 팔과 함께 허공을 떠돌았다. 빙빙 보기 좋은 원을 그리며 허공을 몇 바퀴 돌던 라비락의 팔이 바닥에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져 붉게 피어오르는 핏물.

끼에에에에엑!

그리고 터져 나오는 비명.

자신의 팔이 잘려나간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라비락을 향해 유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단까지 내려간 검을 부드럽게 끌어올려 녀석을 벤다. 그 다음으로 벤 건 라비락의 목이었다. 유현의 검은 목뼈와 살덩어리를 두부 베듯 베어 넘겼다.

목이 잘리자 고통 어린 비명도 끊겼다. 소리를 지르기 위한 목 자체가 잘려나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머리통을 잃은 라비락의 몸통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수초도 안 되어 라비락 하나를 처리한 유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비락들은 반 쯤 학살당하다시피 죽어나가고 있었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네파의 시체가 분노를 자극한 듯 일행의 움직임이 상당히 난폭하다. 평상시 같으면 이성을 되찾으라고 경고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놔두었다.

“죽어! 죽어! 이 망할 괴물들아!”

소리를 지르는 길유미의 목소리는 슬픔과 분노가 함께하고 있었다.

예리한 찌르기가 라비락의 가슴을 거침없이 꿰뚫는다. 가슴팍을 완전히 관통해 라비락의 등짝 뒤로 창날이 튀어나왔다. 단말마 하나 없이 라비락의 숨이 끊긴다. 즉사였다.

자신의 창에 꿰여 있는 라비락을 떨쳐내며 길유미는 고개를 돌렸다.

그 녀의 눈에 동료들이 순식간에 죽어나가는 모습에 겁이라도 먹은 건지 도망치려고 하는 한 녀석이 보였다. 길유미는 눈에 불을 킨 채 땅을 박찼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쫓는 맹수와도 같았다. 라비락이 비명을 지른다. 길유미의 살기에 바싹 쫄아 짧은 다리를 더욱 부지런히 움직인다. 하지만 길유미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유현은 눈을 빛냈다.

‘마력인가?’

갑자기 길유미의 움직임이 빨라진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분노로 인해 한계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감정에 따라 가끔씩 자신의 능력 그 이상의 힘을 보여주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감안해도 유현의 시선을 끄는 게 한 개 있었다.

길유미의 몸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푸른빛이었다.

저건 마력의 빛이었다. 아직 마력을 다루는 것이 미숙해 쓸데없이 마력을 흘리는 광경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저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전날 까지만 해도 길유미는 마력을 이용한 신체 강화가 불가능했다.

무엇이 그녀를 성장시킨 거지.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유현은 바닥에 싸늘하게 누워있는 네파를 쳐다봤다. 두 눈을 감지 못하고 바닥에 시체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온 몸은 상처투성이다. 죽기 직전까지 괴롭힘 당한 게 분명했다. 눈가에 남아 있는 가느다란 핏자국은 피눈물일까.

저 모습을 보고서 길유미는 쉽게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는지.

‘사람의 죽음이 애들을 성장시키는 건가.’

지금 길유미의 모습은 너무나도 감정적이다.

“죽어!”

끼에에에에엑!

감정의 파도에 그대로 몸을 맡긴 채 그녀는 기다란 호를 그리며 창을 휘둘렀다. 엄청난 힘이 담긴 일격에 라비락은 말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피를 흩뿌리며 내장이 드러낼 정도로 허리가 잘린 라비락이 바닥에 쓰러졌다. 축 늘어진 팔이 미약하게 움직이자 길유미가 입술을 바득 깨물며 다시 창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아예 머리통을 으깨버린다. 부서지는 두개골 속에서 쏟아지는 뇌수가 상당히 그로테스크 하다. 그리고 그런 피바다 위에서 헉헉 거리는 길유미의 모습은 어딘가 애처롭기까지 했다. 살려달라고 손을 뻗어 발버둥 치던 라비락은 더 이상 움직임이 없다.

바닥에 라비락의 핏물이 불쾌하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걸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유현이 길유미에게 달려갔다.

“유미야. 화난 건 알겠지만 정신 차려. 이미 녀석은 죽었다고.”

그리고서 유현은 길유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시체를 난무하던 창이 멈춘다.

여자라 그런지 가냘프게 느껴지는 길유미의 팔을 붙잡고서 유현은 멈칫했다.

생각 이상으로 강한 길유미의 힘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행동을 멈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그녀가 뭘 하든 유현의 힘으로는 충분히 제압하고 남았다.

그래도 역시 마력을 사용하고 있던 건가.

유현의 손길에 길유미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오빠, 저 정신 차렸으니까 이제 놔줘요.”

침착함을 되찾은 듯한 그녀의 눈빛에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을 놔주었다. 조금 쌔게 잡은 탓인지 그녀가 표정을 찡그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런...”

몇 번이나 긴 숨을 내쉬며 길유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참상을 보며 쓰게 웃었다.

“조금 제가 화났나 보네요. 이렇게 끔찍하게 당한 네파 아저씨를 보니 분노가 멈추지가 않아서···. 미안해요 오빠.”

“미안할 게 뭐 있어. 딱히 큰 해를 준 것도 아닌데.”

“그래도···. 뭔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 같네요. 우우우···.”

길유미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분노에 몸을 맡긴 채 싸워서 지친 걸까, 아니면 방금 자신의 모습에 놀란 걸까.

어찌 되었든 좋다. 유현은 길유미의 등을 토닥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싸움은 이미 전부 끝난 상태였다. 모두가 착잡한 얼굴로 바닥에 있는 네파의 시체를 응시했다. 어젯밤만 해도 즐겁게 이야기하던 상대가 이렇게 죽어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죽어 있는 네파를 향해 이서연이 회복 주문을 준비하다가.

“서연아 그만둬. 이미 이 사람은 죽었어. 숨이 끊긴지 오래라고.”

송가연의 차가운 말에 끝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젠장, 뭐야 이게. 왜···.”

남궁민이 입술을 바득 깨물며 말을 잃었다. 분명 동굴을 나올 때는 기분이 좋았다. 야영을 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몸에 활기가 넘쳤는데 어쩐지 벌써 지친 듯한 기분이 든다.

생각지 못한 인연의 죽음 때문일까.

어찌 보면 겨우 하루를 같이 있던 거였지만 알고 있는 누군가가 죽은 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사람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렸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유현은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일행을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모두 정신 차려. 지금 여기에 있는 건 네파의 시체뿐이니까. 아직 다른 파티원들이라면 살아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유현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 버렸다.

감이라는 것이다. 딱 봐도 네파의 파티는 라비락들에게 전멸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유현은 라비락들이 여기에 오면서 남긴 흔적을 찾아 움직였다.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네파의 시체에서 질질 흘러나온 핏자국들이 바닥에 남아 있었으니까.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태세를 갖춘 채 일행은 묵묵히 유현의 등 뒤를 따랐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가 일행을 감쌌다.

그리고 무거운 분위기가 절정에 이른 건 네파의 파티원들이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였다.

끔찍한 상태였다. 라비락들이 인간의 시체를 뜯어 먹기라도 했는지 시체는 흉측한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었다. 보고 있던 이서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구역질을 참는다.

길유미와 남궁민이 눈을 돌렸고, 송가연은 그저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갈비뼈와 내장이 드러난 채 배가 찢어져 있는 여성의 시체를 보며 지금 까지 말이 없던 유현이 아아, 하고 중얼거리며 긴 탄식을 흘렸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눈앞의 사실에 납득할 뿐인 것 같은, 그리고 그것조차도 흘려보내는 것 같은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래서일까. 유현은 일행처럼 분노로 감정이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머리와 가슴은 더욱 차갑게 식어만 가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일행은 유현과 달랐다.

눈앞의 현실을 보며 길유미와 남궁민의 탁해져 있던 눈동자의 색이 바뀌기 시작하더니 그 어느 때보다 거무칙칙한 증오가 눈동자에 맺혀 살기가 맴돌았다.

그 때였다.

“유현.”

일행 중에서 유현과도 같은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송가연도 미세하게 주먹을 떨고 있을 때 오로지 류트만이 흔들림 없이 차가운 눈으로 유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루덴 씨의 시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류트의 말에 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를 멍하니 보고 있던 일행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류트의 말대로 시체들 중에서 루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류트는 주위를 힐끗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 번 찾아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류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류트 역시 분노는 느끼는 듯 싶었다. 하지만 그걸 드러내지는 않는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조용한 살기만이 눈동자에 맺혀 있다. 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류트가 빠르게 방향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척후 활동에 능한 그는 미약한 흔적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반쯤 달리다시피 매섭게 숲을 가로지는 류트의 뒤를 따라간다.

여기서 부터는 류트의 일이었다. 본래 원정군에서도 척후병으로서 많이 활동했던 그였다.

무언가 결과가 나온 것은 1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쉬지 않고 달린 탓인지 모두가 숨을 헐떡이며 발을 멈춘 류트의 뒤를 바라본다.

숲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함정들도 거침없이 돌파한 노력의 결과.

루덴을 밧줄로 속박한 채 질질 끌고 가고 있는 라비락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걸 보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길유미와 남궁민의 어깨를 유현이 붙잡았다.

“왜!?”

“주위를 봐. 우리 혼자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그게 무슨···.”

유현이 눈짓하자 그제야 둘은 시야를 넓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라비락들의 부락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무리 못해 수백이 살아가고 있는 듯 싶은 거대한 부락이.

루덴을 포박한 라비락 무리는 부락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으로 생각되는 라비락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현은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