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샤셴의 말대로 이서연은 내일 아침이 되자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자 몽롱해 보이는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일행이 모두 모여 있으니 놀란 듯하다.
“···저기. 뭔 일 있었나요?”
“어이구야?”
의아한 얼굴로 묻자 모두들 어처구니없는 걸 본 것마냥 헛웃음을 흘렸다. 정작 본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유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몸은 괜찮아?”
“몸이요? 음···. 네. 문제없는 거 같아요. 그냥 잘 잔 것마냥 개운한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할까. 하하···.”
이서연은 부끄러운 듯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하기야 잘 자긴 했다. 다만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처럼 쉽게 일어나지 못해서 문제였지. 어쨌든 큰 문제는 없어 보여서 다행이다.
“뭔가 기억나는 거 없어? 지금 서연이 너는 3일 동안 기절해 있었어.”
“네? 제가 3일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났어요?”
“응.”
덕분에 본래 오늘 떠나려고 했지만 계획이 틀어졌다. 아마 하루 정도는 더 시간을 보내야 겠지. 이서연은 괜찮다고 하지만 혹시라는 건 모르는 일이었다.
미안한 얼굴로 거듭 사과하던 이서연은 이상한 말을 했다.
“···그게. 무척 아름다운 분이랑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게 꿈이었는지 진짜였는지 모르지만 ···.”
“무척 아름다운 분?”
“네. 무척 이뻤어요. 그런데 얼굴이 어땠는지, 어떤 존재였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그냥 아름다웠다고 밖에. 무척 상냥했고, 매력적인 분이어서···. 그러니까···.”
거기서 이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좀 더 떠올려 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듯하다.
오히려 듣는 입장에서는 의미불명이다. 유현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도 답답한 얼굴을 했다.
“으아아···. 뭐지. 정말 기억이 안나요. 그래도 대충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해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제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힘을 빌려주겠다고···.”
그건 즉 대화는 잘 이루어졌다는 건가. 겉으로 봐서는 무언가 계약을 맺은 느낌은 없었다.
“힘을 빌려주겠다는 건 즉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는 거네. 어쨌든 축하해.”
페르시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렇지만 이서연의 얼굴은 기쁘다기보다는 여러 잡념이 섞여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계약을 제대로 맺은 건지 스스로도 모르는 눈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만약 정말로 새로운 힘을 얻었다면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다.
***
“저기···. 정말로 괜찮을까요?”
이서연이 어딘가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앞에 섰다. 지팡이를 든 채 표정을 흐린다. 아무래도 겁이 나는 듯했다. 하기야 당연한 건가. 그녀 스스로도 잘 모르는 힘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용해봐. 빨리 익숙해져야 하니까. 쓸 수 있는 힘은 바로 쓸 수 있게 준비하는 게 좋아. 준비는 끝났어?”
“네. 그, 그럼 시작할 게요.”
이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지팡이를 들었다.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데 손이 떨리고 있다.
그렇게 나를 못 믿는 건가···.
유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서연은 심호흡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는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진지한 분위기보단 그냥 어린 소녀가 귀엽게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유현은 검을 중단까지 당겨 올린 채 이서연을 응시했다.
준비가 끝난 이서연은 마지막으로 다시 심호흡을 하고는 지팡이를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을 쭈욱 내밀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걸까. 일단 계속해서 지켜본다.
이윽고 10초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우우우웅!
“···이건?”
유현은 허리춤에 있는 마검이 떨리는 걸 느꼈다. 이서연을 상대로 마검을 들 수는 없었기에 낡은 검을 하나 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째서 마검이 반응을 하는 걸까.
진동이 몇 번이나 반복된다. 유현은 마검을 쳐다보다가 다시 이서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원인은 이서연에게 있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주위로 무언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금빛의 쇠사슬이었다. 네 가닥의 쇠사슬들이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공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고는 서서히 현실로 구현되고 있었다. 저건 마법인가.
···아니. 마법이 아니다. 마력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힘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피부 끝을 톡톡 찌르고 들어오는 기묘한 감각이 저 쇠사슬이 위험하다고 말해오고 있다. 유현은 눈을 좁혔다.
마왕의 유물···. 천벌의 쇠사슬.
찬란한 빛깔을 흘리며 구현되고 있는 쇠사슬은 마치 예술 작품을 보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특유의 위압감이 숨을 조여 오고 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뛴다.
에덴마이어의 말을 사실이었던 걸까. 펜던트 안에 있는 존재는 천벌의 쇠사슬로 봉인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서연은 그런 마왕의 유물을 끌어내고 있는 중인 건가.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여러 개의 추측들이 끊임없이 솟아난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
“그, 그럼 갈게요!”
이서연이 신호를 보내며 소리친다. 무심코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어수룩해 보이는 행동과 달리 쇠사슬은 매섭게 유현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속도는 빠르다. 랑샤셴이 화살을 쏘는 것과 비슷하겠지.
‘일단 일반적인 수준으로는 피하기 쉽지 않을 거 같네.’
유현은 마력을 운용했다. 다리에 마력이 도달하는 순간 폭발적인 움직임을 동반하며 피하기 위해 땅을 박찬다. 땅을 가볍게 뛰어 오른쪽으로 몸을 내빼자 직선으로 쭈욱 뻗어오던 쇠사슬들은 그대로 유현이 있던 자리에 처박혔다.
무거운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유현은 작게 감탄했다.
파괴력도 충분.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닐 터.
본능적으로 유현은 느낄 수 있었다. 저 쇠사슬에 닿으면 위험하다고.
우우우우웅!
마검이 운다. 싸우고 싶은 건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유현은 그런 마검을 강제로 억눌렀다. 지금 누굴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가.
저 쇠사슬은 이서연의 힘이다. 그런 건 마검에게 먹일 수는 없는 일.
흥미로운 눈으로 지금 일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오, 오빠···. 괜찮았나요?”
“아, 괜찮아. 나쁘지 않은 위력이네. 공격력이 부족한 너한테는 좋은 무기야.”
그 말에 이서연은 긴장한 표정이 풀리고는 헤헤 웃었다.
“다시 한 번 공격해 볼래?”
“다시요? 아, 네.”
이서연은 다시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집중을 위한 자세인 듯하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쇠사슬의 구현이 빨랐다. 2초 정도 더 빨라졌다고 해야 할까.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긴박한 전투 상황에서도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겠지.
“그, 그럼 갈게요!”
또 다시 어수룩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이제는 귀엽게만 느껴진다. 유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신호를 보내는 순간 이미 쇠사슬은 움직이고 있었다.
촤르르르르륵!
쇠사슬이 흔들리며 나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유현은 눈을 부릅뜨며 쇠사슬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는다.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오, 오빠!? 위험해요!”
그것을 눈치 챈 이서연이 꺄악 소리를 지르지만 유현은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 주위에서 보고 있던 일행들 또한 놀란 얼굴로 뭐라고 소리친다. 유현은 몸에 힘을 주었다.
이서연의 능력에 따라 속도도 늘어나는 건지 방금 전 보다 빨라진 금빛의 쇠사슬을 유현은 망설임 없이 접근을 허용했다. 유현이 움직인 건 닿기 직전의 찰나였다.
촤르륵, 금빛 쇠사슬이 팔을 옭아맨다. 조여 오는 압력이 상당히 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적당히 상대방의 움직임을 속박하는 수준.
이 녀석의 진정한 힘은 그런 물리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호오.”
팔 끝을 칭칭 옭아매고는 쇠사슬을 보며 유현은 입가를 씰룩였다.
금빛 쇠사슬이 팔을 조이는 감각은 상당히 기분 나빴다.
팔을 속박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유현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건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힘을 줘보자 쇠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과연. 이런 거라면 쇠사슬을 힘으로 풀어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러면 베는 건 괜찮을까.
유현은 검을 들고서 검기를 일으켰다.
구현된 검기는 눈에 뛰도록 비실비실해 보였다. 눈으로 봐도 색체는 약해고 검기 특유의 강렬함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튼튼한 갑옷이라면 겨우 흠집을 내는 수준이겠지.
의도한 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것이다.
금빛 쇠사슬은 상대를 옭아매는 순간부터 힘을 봉인하고 있었다.
‘몸이 무거워졌어. 힘이 약해진 건가.’
신체적인 능력부터 시작해 마력 운용까지 제대로 되지 않는 걸 확인하며 유현은 검을 휘둘렀다. 과연 쇠사슬은 얼마나 튼튼한 걸까. 그걸 시험해보고 싶었다.
끼이이익!
놀랍게도 검기와 부딪친 쇠사슬은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 흠집하나 없이 여전히 깨끗한 빛깔을 흩뿌리는 쇠사슬을 보며 유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로는 안 된다는 걸까. 유현은 더욱 힘을 줘봤다.
팔을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이 마력의 흐름을 방해하며 검기의 구현을 막고 있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단지 좀 더 집중하면 될 뿐. 유현은 천천히 검기의 예기를 높였다.
방금 전처럼 팔을 속박하고 있는 쇠사슬을 향해 다시 검을 휘두른다.
키이이익!
똑같은 소리가 반복되었고, 똑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쇠사슬은 아무런 흠집도 없이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유현은 입술을 비틀었다. 과연 어디까지 버틸까.
실험이라는 이름하에 유현은 검기를 더욱 강화했다. 타오를 것처럼 응집된 강력한 마력의 검이 쇠사슬을 몇 번이나 두들긴다. 그렇게 다섯 번 정도 행위가 반복되었을까.
서걱!
드디어 쇠사슬이 검기에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쇠사슬은 그대로 허공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금빛의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그것을 보고는 유현은 속으로 감탄했다.
과연. 생각보다 쇠사슬은 강한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싸울 때 쉽게 끊어내지 못하겠지.
적어도 일반적인 모험가들의 수준으로는 끊어내지 못할 터.
유현은 이쯤에서 실험을 멈추기로 했다.
고개를 들자 이서연이 지친 듯 쓰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마 쇠사슬을 잘라내서 그런 걸까.
나중에 혹시 몰라 확인해 보니 부서진 쇠사슬은 재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서지는 순간 그 반동이 이서연에게 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