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Master

Channel Master - Act 2.

개강까지 한달 넘게 남아있었지만 중문 앞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부분 근처 초·중·고등학교에서 놀러온 애들이었다.

중문을 돌아보던 한수는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미라클PC방 간판을 볼 수 있었는데 허름한 건물 2층에 입점해 있었다.

PC방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한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낯익은 얼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민서 누나하고 다르게 성욱 형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성욱 형!”

처음에는 당황해하던 성욱 형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한수를 쳐다봤다.

“어? 야! 강한수! 너 뭐야? 그새 전역했어?”

“예. 며칠 전에 전역했죠. 하하.”

“와, 남들 군생활은 금방 간다더니 벌써 갔다왔냐? 너는 조금 더 고생하다가 나왔어야 했는데······.”

“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보다 어떻게 된 거예요? 형설관 총무 계속 하실 줄 알았는데 PC방 차리셨다길래 깜짝 놀랬잖아요.”

한수 말에 성욱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아있어. 오랜만에 봤는데 이야기나 좀 하자. 뭐 먹을래?”

성욱 형이 카운터 위 간판을 가리켰다. 그 간판에는 볶음밥부터 시작해서 파스타, 찌개 종류까지 다양한 메뉴들이 적혀있었다.

“형, 요리도 해요?”

*

한수가 주문한 메뉴는 봉골레 파스타였다.

PC방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사이 성욱이 직접 요리한 봉골레 파스타가 키보드 바로 앞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비쥬얼 좋고 냄새도 좋았다.

한수가 가볍게 탄성을 내며 물었다.

“생각보다 요리 되게 잘하시네요.”

“인마. 내 자취경력이 벌써 십오 년이야. 웬만한 요리는 다 마스터했지.”

“되게 신기하네요. PC방에서 컵라면은 끓여먹어봤어도 파스타는 처음 먹어봐요.”

“요즘 PC방들이 다 그래. 살아남으려면 뭐든 못하겠냐? 나도 그 때문에 음식점으로 영업허가받았잖냐. 그보다 형설관 갔다왔었어?”

“예. 복학한 김에 형설관 계속 다니려고 했죠. 우리 학교나 지방대나 별 차이 없잖아요. 취업 어려운 건 뻔하고 그래서 공무원 시험 계속 준비하려 했거든요.”

“흠, 하긴 공무원만 되면 최고지.”

“그러다가 형이 중문에 PC방 차렸다고 하길래 한번 들렸어요. 오랜만에 형 얼굴도 보고 싶었구요.”

“잘했어. 오랜만에 얼굴보니 좋네. 그런데 머리가 왜 그래? 조금 기르고 나오지. 누가 보면 너 막 입대하는 줄 알겠다. 크큭.”

“그게 식당에서 밥 먹다가 연대장한테 걸려서······. 아, 말도 마요. 그런데 형,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긴 한데 공무원 시험은 왜 관둔 거예요?”

망설이던 성욱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몇 번 더 시험 봤는데 번번이 떨어졌잖냐. 그래서 내 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과감히 접었어. 여기에 내 돈하고 우리 부모님 돈 다 밀어넣었다. 이거 망하면 나도 끝이야. 끝.”

목을 그어보이는 시늉을 하는 성욱을 보며 한수가 멋쩍게 말했다.

“잘 되겠죠. 걱정마세요. 제가 복학하게 되면 자주 와서 매상 책임져드릴게요.”

“고맙다. 식기 전에 먹어. 너 오면 내가 한 끼 정도는 책임져주마.”

“정말이죠? 그럼 잘 먹겠습니다.”

한수는 성욱이 직접 조리해온 봉골레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웬만한 레스토랑에서 파는 봉골레 파스타 못지않게 맛이 있었다.

“형, 차라리 레스토랑 차리지 그랬어요.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얼굴에 금칠 그만 해. 진짜 레스토랑 차렸다간 며칠 안 가 망할 걸?”

한수가 봉골레 파스타를 말아먹다가 생각난김에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보니 아까 도서관 앞에서 민서 누나 봤어요.”

“민서? 아, 박민서?”

한수는 봉골레 파스타를 한 입 더 말아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되게 예뻐졌더라구요. 공무원 시험 합격했다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걔는 예전부터 독기 품고 열심히 했잖아. 열심히 한만큼 보답받은 거지. 작년에 9급 되고 한껏 꾸미고 다니더니 남자친구도 생기고 잘 나가더라고. 휴, 나도 공무원 시험 합격했어야 하는건데······.”

“에이, 그래도 형은 사장님이잖아요. 명색이 사장님인데 공무원에 비할 바가 되겠어요?”

성욱은 한수의 아부에 기분이 좋아진 듯 웃으며 물었다.

“짜식. 고맙다. 콜라도 줄까?”

“그럼 저야 좋죠. 흐흐.”

그 이후 성욱이 지난 2년 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한수가 입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장이 새로 부임했는데 그는 공무원 합격률이 최고로 높은 대학교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면서 형설관에 관장이 새로 부임했고 덩달아 성욱도 총무 자리에서 쫓겨났다.

즉 형설관이 완전히 물갈이 된 것이었다.

“형설관 못 붙으면 통학해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집에서 대학교까지의 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이다.

서울의 끝과 끝.

벌써부터 눈앞이 막막했다.

“너 진짜 공무원 시험에 올인하려고?”

“예. 그래야죠.”

“공무원 할 자신은 있고? 저번에 효준이 만났는데 하소연만 죽어라 하더라. 일행직인데 사회복지과로 발령나서 허구한 날 야근 중이래.”

“효준이 형도 합격했어요?”

“어. 걔도 민서하고 같이 합격했어. 달랑 두 명 뿐이지만.”

그렇다는 건 함께 방을 썼던 고학번 선배들은 작년에도 탈락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쯤 그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집에 돈이 있다면 성욱 형처럼 PC방을 차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취업자리를 뒤늦게 알아보거나 혹은 적성에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억지로 돈을 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울고 웃으며 함께 지냈던 선배들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볼품없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자 한수는 코끝이 찡했다.

차마 그걸 내색하지 않은 채 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들어가볼게요. 내일 할아버지 창고 정리해야 해서요.”

“그래. 다음에 또 놀러와. 형설관 꼭 붙고.”

“고마워요, 형.”

한수는 미라클PC방을 나왔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수는 한국대학교입구역을 지나쳤다.

이 역에서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있는 또래들을 보며 한수는 부러움 섞인 눈빛을 보냈다.

어쩌면 저들 중 몇 명은 한국대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일 수도 있다. 아직 개강이 한 달 가까이 남았지만 정말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몇몇은 과잠을 입고 있었다. HNU(Hankook National University)라 적힌 과잠이었다.

그들을 보니 문득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그래서일까.

이대로라면 꿈을 꾸는 건 고사하고 먹고 살 수 있을지마저 걱정이 되고 있었다.

*

오늘은 할아버지 집에 있는 창고를 정리하기로 한 날이었다. 한수는 부스스한 얼굴로 녹슨 철문을 바라봤다. 옆에 서있는 할아버지를 보며 한수가 물었다.

“할아버지, 저 창고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오래전부터 내가 모아온 골동품들이 있지.”

“값비싼 것도 있어요?”

“뭐 죄다 구닥다리라서 비싼 건 없지. 그래도 인연이 닿는다면 누군가에는 값진 물건이 될 수도 있지 않겠니? 그래서 오늘 한꺼번에 정리한 다음 맞는 주인을 찾아줄 생각이다.”

“주인을 어떻게 찾아주시게요?”

“어떻게 찾긴. 주인될 사람이 알아서 찾아오겠지. 허허.”

한수가 머쓱하게 웃었다.

종종 느끼지만 할아버지가 하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한수에게 목장갑을 건넸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이거 끼고 해. 그럼 시작할까?”

오래된 자물쇠를 뜯어낸 다음 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켜켜이 쌓여있던 먼지들이 밖으로 터져나왔고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진 창고가 한눈에 들어왔다.

창고 안에는 온갖 골동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일단 부피가 큰 것부터 바깥 마당에 쌓아두고 나머지도 차근차근 옮기자.”

“예. 아버지.”

마당에다가 골동품들을 들어 나를 때였다.

한수 눈을 사로잡은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낡아보이는 브라운관TV였다. 그렇지만 외관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어보였다. 대략 21인치 정도의 크기, 그것을 본 한수 아버지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아직도 이걸 보관하고 계셨구나.”

“예? 이 텔레비전이 뭔데요?”

“한 이십 년 전쯤 할아버지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사다드린 거다. 지금도 멀쩡하게 잘 작동할 걸?”

“그래요?”

한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텔레비전을 붙잡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갑작스럽게 엉덩방아를 찍은 한수를 보며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한수야, 괜찮냐?”

“아, 네. 괜찮아요, 아버지.”

한수가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왜 그래?”

“그, 그러게요. 힘이 쭉 빠졌었어요.”

“조금 쉬었다가 할래?”

“이것만 옮기고 쉴게요.”

“그러자.”

한수는 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을 바깥으로 날랐다.

그러는 사이 엄마는 과일을 깎고 음식을 준비 중이었다.

쉬는 동안 과일을 먹으면서 한수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 텔레비전은 왜 안 쓰시는 거예요?”

“아, 그거? 뭐 딱히 텔레비전 볼 일이 있어야지. 눈이 침침하니 잘 보이질 않아서 그냥 안에 넣어놨나보다.”

그때 과일을 깎던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그럼 저희가 이거 가져가서 써도 될까요?”

“이 고물은 어디에다가 쓰려고?”

“안방에 두려고요. 거실에 텔레비전이 있긴 한데 안방에는 없어서······. 새로 한 대 사려했는데 잘 됐네요.”

“그러렴. 그런데 하도 쓰질 않았더니 잘 나오는지 모르겠다. 한번 확인해보려무나.”

어머니가 힐끗 한수를 곁눈질했다. 한수보고 직접 확인해보란 의미였다.

한수는 브라운관 TV를 마루에 올려둔 다음 파워케이블을 연결했다. 다행히 브라운관 TV는 켜졌다. 일단 전원 상태는 문제 없었다. 다만 방송이 나오는지 알아보려면 셋톱박스가 필요했다. 이건 본가에서 케이블을 연결해본 다음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한수와 한수 아버지는 재차 창고정리에 들어갔다. 필요없는 건 동사무소에서 사갖고 온 폐기물스티커를 붙여서 집 밖에 내놓았고 필요한 건 다시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그렇게 정리를 끝내자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사코 말리는 엄마를 밀어내며 한수에게 용돈을 건넸고 그런 뒤에야 한수는 부모님과 함께 본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동차 트렁크에는 한수가 챙긴 브라운관 TV가 실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엄마가 한수를 보며 말했다.

“텔레비전 되나 한 번 확인해봐. 되면 새로 케이블 신청하고.”

“예, 그럴게요.”

한수는 기존에 설치되어있던 텔레비전을 빼낸 다음 브라운관TV를 연결했다.

다행히 브라운관TV는 이상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157번, EBS PLUS1 채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텔레비전을 보는 한수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채널 마스터 - 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