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King

Chapter 28. Rivellion 6

[경험치 298을 얻었습니다.]

[127골드를 얻었습니다.]

[홍혈의 마정을 얻었습니다.]

이성을 지키고 있던 마지막 홍혈의 일족의 목숨이 끊어졌다. 그 순간 신전이 붕괴하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감상에 빠질 여유도 없이 놈의 시체를 먹어치운 후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곳을 빠져나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높은 산이었던 지형이 수채화에 물을 뿌린 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까지 집어삼켜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변화에 나는 오랜만에 스스로의 약함을 실감해야 했다.

진마의 마나를 끌어올리고, 감지 능력으로 변화하는 환경을 필사적으로 살폈다. 세계의 마나가 한 뜻을 품고 유동하며 그 공간을 지워내고 있음을 느꼈다. 공간을 구성하던 모든 것은 마나로 환원되어 지하를 이루는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막연히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아무것도 없는 평원으로 옮겨졌다. 주위에는 많은 숫자의 몬스터가 있었지만, 격전 속에서 발전한 사신의 능력으로 존재를 감춘 나를 인식하지 못한 채 주위를 떠돌 뿐이었다.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자 겨우 여태까지 있었던 일에 신경이 미쳤다.

“위대한 분이라.”

어쩌면 대신전에 있던 석상은 나를 기리던 것인가? 아니, 저들이 단체로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말하는 위대한 이가 정말 나였다면, 비와 엘과 같은 이들뿐만이 아니라 지하를 이루던 구성원 중의 상당수로부터 숭배를 받던 이가 나였더라면······. 실로 지금의 자신이 초라해질 것만 같다.

‘과거에 휘둘리지 않기로 다짐하고 이 꼴이라니, 정신 차리자.’

비가 자세히 얘기하지 않은 이유를 지금이라면 알 것 같다. 그는 너무나도 거대한 나 자신의 그림자에 내가 먹혀들어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겠지.

과거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가 지금의 방식으로 강해지는 것이다.

나는 놈과의 전투를 되새겼다. 진정한 상위 개체의 힘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아무리 강해져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그리고 보다 강해졌다. 스테이터스, 스킬, 이 모두에 숨겨진 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나아가고 있다. 나아가야 한다.

이 세계에 나를 적대하고 미워하는 이는 산처럼 쌓여있다. 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보다 강해지기 위해서 멈추어 있을 시간은 없는 것이다.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을 되새겼다. 그래, 포츈 에그. 아직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었다.

인벤토리에서 포츈 에그와 함께 아까 조각상이 사라지고 나타났던 결정을 꺼내들었다. 결정은 아까보다 한층 더한 빛을 내고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를 살피니 신전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얻었던 홍혈의 일

족과 관련된 아이템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결정이 마음대로 흡수를 한 것이다.

“후우.”

포츈 에그가 뿜어내는 빛이 격렬해졌다. 과연 내 생각이 맞았을까? 이 결정에 반응할까?

막연한 불안과 기대가 맞물리던 그때 손에 들려 있던 결정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찬란한 빛을 뿜어낸 다음 순간에 그것은 천천히 허공을 날아 포츈 에그에 다가갔다.

결정이 포츈 에그에 흡수되었다. 이번엔 포츈 에그가 붉게 물들더니 터무니없는 광량을 뿜어냈다.

[키이이이이이!]

그럼 그렇지. 이 정도 빛을 보고 몰려들지 않으면 몬스터의 자격이 없는 거지.

난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일직선으로 그었다. 손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흑뢰가 채찍의 형상을 띄고 길게 뻗어나가며 빛을 향해 부나방처럼 몰려드는 괴물들을 일시에 걷어냈다.

그리고 다시 그 너머로, 그 너머로······ 폭식의 기운을 담아낸 흑뢰는 적을 공격하는 순간 적의 살점을 뜯어내며 거기에서 마나를 흡수해 다시 힘을 얻고 한층 강하게, 한층 멀리 뻗어갔다. 상위 개체가 된 지금의 나이기에

가능한 공격이었다.

‘이제야 폭식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네.’

스킬은 필요에 따라 바꿔드는 무기가 아닌, 내 능력의 일부.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사신의 기운도 마찬가지. 내 직접적인 움직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스킬에 사신의 힘

을 담아내는 것으로 보다 은밀하고 치명적인 공격이 가능해진다. 이제라도 이것을 깨달아 다행이었다.

[18골드를 얻었습니다.]

[24골드를 얻었습니다.]

[어둠의 파편을 얻었습니다.]

정신없이 주위의 적을 정리하고 있자니 내 뒤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던 빛이 점차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난 사방으로 마나를 뻗어내 방어막을 세우고는 뒤돌아섰다.

포츈 에그의 상단에 쩍, 소리와 함께 커다란 금이 갔다. 빛은 더 이상 새어나오지 않았다.

금이 포츈 에그 위를 번개처럼 내달리며 그 영역을 확장시키는가 싶더니, 끝내 허공에서 부서져 내렸다.

그 안에서부터 작고 붉은 몸체를 지닌 거미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대신전 안에서 만났던 거대 거미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뀨이.”

거미가 낼만한 목소리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살짝 걸렸지만, 몸체가 작기도 하고 상당히 귀여운 녀석이었다.

눈은 두 개뿐이었고, 몸체는 전체적으로 붉었지만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화염 문양처럼 그려져 있었다. 홍혈의 일족과 닮은 부분이라면 앞다리가 창날처럼 뾰족하다는 것. 홍혈의 일족의 정수를 흡수했다지만, 여태까지의

내 영향도 있어서 이렇게 된 것 같았다.

“뀨이.”

“여태까지의 내 궤적, 모두를 이어받은 건가.”

비단 지금 이 신전에서 얻은 성과뿐만 아니라, 포츈 에그를 얻고 나서부터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의 흔적이 이 녀석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일까.

아직 터무니없이 작은 이 거미를 보며 도저히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드디어 부화시킬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뿌듯하기도 했다.

녀석과 마주보는 순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와 공명하고 있었던 포츈 에그의 성질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거미는 나와 종속 관계 이상의 깊은 연결을 이루고 있었다. 지배 어빌리티의 근원적인 부분이

우리를 잇고 있는 것만 같았다.

“뀨이.”

지금도 울음소리밖에는 낼 수 없을 터인 거미의 단편적인 사고나 의사가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탄생의 환희에 가까운 감정과 막연한 즐거움, 죄와 더러움을 모르는 순수함. 나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라 쓴웃음이 나올 정도였지만, 그 덕에 조금이나마 즐거워졌다.

몬스터로 환생한 이래 누군가를 죽여오기만 했던 나에게,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그 자체로 마음을 위로해주는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이다.

“네 이름은 솔라스로 하자.”

“뀨이뀨이.”

그것은 긍정의 뜻을 담은 울음소리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저히 적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녀석이 허공을 자연스럽게 기어와 내 어깨 위에 안착했다. 난 두 눈을 깜박였다.

이 거미가 방금 뭘 한 거지?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면 솔라스로부터 발산되고 있는 이 기운은······.

난 그 의미를 깨닫고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진마의 마나. 솔라스의 작디작은 전신에서부터 넘쳐흐를 듯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이 기운은 다름 아닌 진마의 마나였다. 녀석은 근본부터가 상위 개체로 태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잘난 놈들을 저주할 때

가 아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놈이야말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다.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솔라스는 나의 일부나 매한가지인 존재. 이것도 전부 내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나아졌다.

난 그렇게 생각하려 애쓰며, 천진난만하게 어깨 위에서 울고 있는 솔라스와 함께 성으로 돌아왔다.

“오셨군요, 페이트 님.”

비는 나와 솔라스의 모습을 확인하고도 태연하게 인사를 해왔다. 나는 어이가 없어 그에게 물었다.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나요?”

“저는 예언자도 전능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하 세계의 주민들도 바보가 아니니, 그중에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여력을 지닌 존재들도 물론 있었겠지요. 어찌되었든, 페이트 님께서 최상의 결과를 얻으신 것 같아 다행입

니다.”

“뀨이.”

솔라스가 비를 경계하듯이 몸을 움츠렸다. 허공을 향해 내민 앞다리로부터 언제든지 거미줄이 뻗어 나올 것만 같았다. 역시 거미의 상위 개체들은 전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바깥으로 돌아갈게요. 제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을 떠돌고 있었던 것 같으니.”

“무운을. 아,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죠?”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하와 지구의 경계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으시리라 생각하지만······부디 조심하시길.”

난 머릿속으로 엘프나 엘라카트라 따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나는 지하를 떠났다.

“대장, 좋은 타이밍에 왔어! 구경하지 않을래?”

우리 둘만이 머무르기에는 너무나 넓은 성채, 성벽 위에 이찬유가 서 있었다. 그가 부리는 몬스터 군단이 성벽 아래 도열해 있는 모습이 자못 인상적이었다.

난 그 모습을 보자마자 감지를 확장시켜 주변을 탐사했다. 그러나 근방에는 어떤 기척도 잡히지 않았다.

난 이찬유에게 물었다.

“몬스터? 어디에 쳐들어왔지?”

“뭐?”

이찬유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꾸했다.

“여긴 던전이 아니야. 허구한 날 몬스터가 거리 한 중간에 발생했다간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거라고. 이건 그냥 단체 훈련일 뿐이야.”

“단체 훈련이라.”

이찬유의 몬스터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움직이는 모습은 확실히 훈련이라 부를 만 했다. 내게도 지배라는 능력이 있기에 잘 안다. 몬스터들을 통솔해 그들의 야성을 오직 적에게만 향하게 만들기 위해 이찬유는 얼마

나 큰 심력을 소모하고 있을 것인가.

그의 능력은 단순히 전락자로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능력을 정말 열심히 갈고 닦은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해졌기에, 나는 잠시 성벽 위에 올라서서 그 광경을 지

켜보았다.

그러던 중 내 감각의 영역권에 익숙한 기척이 들어왔다. 이찬유는 깨닫지 못했지만 헬 하운드 중 한 마리인가가 훈련 도중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적인가?”

“아니, 저들을 움직이지 마. 대머리야.”

“아, 대머리.”

레벨 100을 넘는 만큼의 실력은 확실히 지니고 있는지, 그는 우리가 기척을 감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우리 앞으로 도달했다. 나를 보고는 반갑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던전 공략은 잘 끝났나? 한창 카오스 소울에 대비하느라 다른 길드들이 움직이지 못할 때 빠르게도 움직였구만!”

“던전? 아, 그래.”

이찬유가 그렇게 둘러댔음을 파악하고는 나도 쉽게 말을 맞추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정말 잘 됐어. 가뜩이나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하기도 곤란한 녀석이 상대라서······!”

“뭐?”

“도심부 한 가운데에 대형 오우거가 나타나 난리를 치고 있다고! 가뜩이나 카오스 소울 방어선도 완벽하게 구축이 되지 않은 상황인데 종로구와 성북구 근처의 모든 길드에 비상이야! 아니, 슬슬 리벨리온도 시청하고 라인

을 갖추라니까!”

난 눈을 갸름하게 뜨며 이찬유를 노려보았다.

“허구한 날 몬스터가 거리 한 중간에 뭐······?”

“제기랄, 대장은 돗자리 펴고 점이라도 치는 게 낫겠다!”

이찬유가 다급히 몬스터들을 불러 모았다. 난 그것을 보고 기겁하며 물러서는 대머리를 보며 코웃음을 치고는, 비가 말했던 지하와 지구의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도와줄텐가?”

“그래.”

난 성벽에서 점프해 바닥에 착지하며 대꾸했다. 솔라스가 내 어깨를 꽉 붙잡는 것이 귀여웠다.

“흥미가 있거든.”

Chapter 28. 리벨리온 6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