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King

Chapter 40. Black Moon 2

게이트를 넘어 도착한 곳은 어떤 의미로 내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 궁전 7구역의 1층. 한때 뜨거운 감자 취급을 받기도 했던(주로 나 때문에) 유명한 던전이지만, 이 주위에서 분탕질을 치던 인간들은 이미 다 죽었거나

내 지배하에 들어와 있기에 던전은 지극히 고요하기만 했다.

“키륵.”

“킥! 키이이익!”

지나가던 고블린들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부리나케 뛰어 도망쳤다. 1구역에서 6구역에 이르기까지에는 어중간하게 강한 몬스터들이 많았던 만큼 혹시나 숫자가 많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까 싶어 내게 덤벼들고는 했는데

7구역의 몬스터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주했다.

아마 2층에서도, 3층에서도 그와 같은 꼴을 볼 수 있을 테지만 난 그런 촌극을 더 만들어내기보다는 곧장 용무를 보는 길을 택했다. 어차피 이 던전에는 보스가 남아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은 보스 룸 그 너머에 있을 테니

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1층의 보스 룸 앞에 도착한 순간, 시종 빛을 내고 있던 회중시계가 내 품에서 멋대로 빠져나와 보스 룸의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1층의 보스에게서 느껴지던 기색이 확연히 바뀌어, 과거 검은 궁전에서는 맛본 적이 없는 소름끼치는 것으로 변모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루시퍼를 마주하고 느꼈던 그것과도 비슷했다.

“고스란히 내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뀨이…….”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과거의 내가 준비한 것을 그대로 받아먹는 과정만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것은 안이한 판단이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루시퍼와의 전투로 모든 것을 쏟아내었기에 지금 난 신체적으로는 멀쩡해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꽤 많은 피로가 쌓여 있었다.

더구나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지하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극심하기도 했다. 당장 조금 전 용사 무리들을 그냥 정리해버리지 않고 놔둔 것도 무던히 애를 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적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성은 모두 끝났다. 난 깊게 한숨을 들이마시고 전신의 마나를 일깨우며 멸광을 손에 쥐고는 문을 향해 내질렀다.

“하!”

멸광에 맞닿은 순간 거대한 철문은 그것을 구성하던 모든 힘을 잃고 검은 마나의 입자가 되어 허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그 너머로 천천히, 작은 몸에서 내뿜는 기세로 던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나였다.

[신인의 전장을 만들 계획을 세우던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나와 완전히 같은 목소리의, 나와 완전히 같은 키의, 나와 완전히 같은 얼굴의, 나와 완전히 같은 몸을 지닌 이는 내 모습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느긋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루시퍼는 나의 대칭점이 되기에 너무 부족해. 신인의 전장은 내가 해낼 수 있는 최고의 계획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었다.]

“…….”

확실히 신인의 전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모든 난장판의 절반 정도는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 실패를 전부 루시퍼 탓으로 돌리다니, 나 자신이지만 억지도 정도가 있지.

[능력을 지닌 이가 그 자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맡겼지만, 나는 계획이 성공하기도 전부터 실패한 다음의 일을 대비해야 했다.]

또 다른 나는 마치 고장 난 로봇 같았다. 오직 몸에 걸친 흑색의 귀품어린 복장을 제외한 모든 것이 나와 같은 그는, 그 안에 담긴 것을 전부 토해내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실패할 것이 뻔한 계획이라면 실현시키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때의 내겐 천상을 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루시퍼를 먹어치워도 부족해. 마계의 것을 먹어도 의미가 없어. 만약 내가 한 명 더 있더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서서히, 과거의 내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자 신인의 전장으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보이기 시작했다. 루시퍼를 잡아먹기 위한 준비. 다시 한 번 바닥부터, 하지만 빠르게 성장해 자신의 힘을 되찾을 준비. 그 두 가지였다.]

신인의 전장의 목적이 그것이었다면, 나는 이미 훌륭하게 성공을 거두었다. 남은 것은 방법이다. 나를 두 명으로 만들기 위한 마지막 방법. 그것도 나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시간의 일부를 떼어내어 그 안에 내가 품은 가장 강렬한 탐욕과 식탐을 담고 회중시계에 7중으로 봉인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폭식과 탐욕의 권능의 힘, 그리고 일곱 줄기의 봉인의

사슬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지금의 이 광경이다.]

나는 서서히 멸광을 들었다. 이대로 평화적으로 끝나리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가 않았으니까.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지하의 명운을 맡긴다면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다.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욕망이 강렬하고, 모든 것을 먹어치우기 전에는 죽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이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루시퍼는 오

만을 다스리는 주제에 자신을 믿지 못해 질투를 떠안고 말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얌전히 내게 먹혀주진 않겠지?”

[과거의 흔적 따위에 먹힌다면 나는 그것으로 좋다. 이 수십 년간 있었던 일은 모두 묻은 채, 보다 강한 힘을 얻은 폭식의 군주로서 천상을 맞이하러 나갈 것이다. 과거를 넘어섰다면 그것은 또 그것으로 좋다. 불과 수년 만

에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는 강함을 얻었으니, 나는 앞으로 어디까지고 강해질 수 있으리. 어느 쪽도 나이니, 누가 누구에게 먹히건 구분은 의미가 없으리라.]

물 흐르듯이 흘러나오는 그 말이 나는 어디까지고 의심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과연 그것이 같을까? 고작 회중시계 따위에 담긴 30분의 흔적이 지금의 나를 먹어치운다는데, 그것이 태연하게 받아넘길 수 있는 일이란 말

인가?

그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자연스럽게 또 다른 내가 몸을 일으켰다. 무표정하던 나의 입가에, 어디선가 많이 본 것만 같은 미소가 자연스럽게 걸렸다.

[그럴 리가 없지. 100억년 후의 나이든 1천억 년 후의 나이든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지고 싶어 할 리가 없잖아.]

어마어마한 마나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폭식의 기운이었다.

[무엇이 됐든 먹어치워 주마. 미래의 사정 따윈 내 알 바가 아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변했든 당장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깔끔하게 먹어치우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폭식의 군주, 바알이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느낀 순간 이미 공간을 가득 채운 놈의 마나가 내게 달라붙고 있었다.

[전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워 주마! 세월에 짓눌려 사라져라!]

“세월? 찰나를 붙잡아 질질 끌고 있는 주제에!”

그 앞에 어떤 잔재주도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 역시 내 모든 권능을 동시에 발해 놈에 맞섰다.

권능과 권능이 충돌하고 티 한 점 없는 고도로 순수한 마나가 맞부딪쳐 굉음을 냈다. 검은 궁전 7구역의 보스 룸은 그 모든 충격을 받아내면서도 멀쩡했다. 오히려 흑요석으로 구성된 벽면이 마나를 흡수하며 신비롭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제 모든 것을 되찾겠다. 내게 있어야 할, 내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운명에 휘둘리던 과거에서 벗어나!]

“핫!”

이미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놈의 마나는 너무나 강력했다. 틀림없이 내게 있는 모든 힘을,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었다 확신했던 것이 바보 같았다.

마나의 양만이라면 뛰어넘었을지도 모른다. 생물로서의 격에 있어서 아주 조금 더 진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유구한 세월 가다듬어진 능력과 온전히 간직된 마나의 컨트롤 능력 앞에서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

[피, 나 자신의 피를 나는 너무나 좋아했다. 한 번 통째로 마셔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카학!”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물어뜯겼다는 사실을 파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분명 같은 폭식의 기운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공방에서 밀린 것이다.

더구나 상처 입은 틈을 파고들어 내 목을 노리고 날카로운 손톱이 내질러져와, 그것을 피하느라 여신의 손길과 솔라스를 내세우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크으……!”

[네겐 세월이 부족했어. 실제로 여유가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는 그것을 예상했기에 과거의 나를 보존해둔 거야. 네가 말하듯, 그래. 찰나의 자신을 붙잡아뒀지. 나를, 지하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아무리 기억의 거의 전부를 되찾았다고는 해도 그것이 몸에 반영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한다. 그 사실조차 나는 지금 간신히 알았다. 왜냐면 루시퍼와 맞붙어 이기고 진화를 거치며, 이미 과거의 경지를 되찾

았다고 확신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적은 마나를 가지고도 압도적인 결과를 내고 있었다. 마법의 수준도 차원이 달랐으며, 무엇보다 전투에서 상대를 파악하고 움직이는 능력이 지금의 나와는 비교도 되

지 않았다.

치열한 마나의 공방과 움직임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나였고, 그 피해는 지금도 조금씩 누적되어가고 있었다. 우열을 뒤집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오만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이렇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빨리 끝내버려야겠어. 내겐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할 일……?”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분노하던 그때 또 다른 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딱히 나를 도발하려던 것도 아니고, 그저 식사를 하며 다음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만 같은 가벼운 말투였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자리를 이어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여태까지의 내가 겪어온 모든 세월을 부정하며.

“네가,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 쳐온 나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아……!?”

불같은 질투가 타올랐다. 내가 모르는 긴 세월을 영유한 나 자신에게, 과거의 유물 주제에 감히 지금 존재하는 나를 깔보는 것만 같은 저 남자에게!

그리고 그것이 내가 놈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탐욕과 폭식. 과거의 내가 품은 권능은 그 두 가지뿐이다. 하지만 내게는 질투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루시퍼의 부산물, 나의 갈망을 채우기 위한 마지막 피스!

[루시퍼의 권능, 그래. 예상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사이의 세월을 메울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놈보다 앞서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뀨이!”

나와 함께 바알의 폭식을 방어하던 솔라스가 내가 보다 강한 힘을 발한 그 순간 나와 동조하며 순식간에 공간을 도약해 또 다른 나를 덮쳐갔다.

[한 곳에 모아놓기도 아까운 힘을 나누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넌 정말 나 자신이냐?]

난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폭식과 탐욕을 오롯이 품은 자, 바알의 흔적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벗어나, 두 가지 권능 모두 오롯이 다루지 못하고 빌빌거리며 살아남는데 급급했던, 그 과정에서 무수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반푼이 바알이었던 나는 그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다.

[빨리 정리하자. 그래도 나라면 여기서 절대 포기할 리가 없지. 피곤하구나.]

“뀨!”

솔라스가 울었다. 귀여운 울음소리와는 달리 녀석의 발끝에 머무르는 것은 극도로 압축되고 다듬어진 사신의 힘. 설령 나 자신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그 힘을 놈은 한 손을 뻗어 막아냈다.

[역시 내 쪽이 낫겠어.]

놈이 주먹을 쥔 순간 솔라스는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놈의 입가에 미소가, 내가 웃으면 정말 저렇게 사악해보이나 싶을 정도로 근사한 미소가 지어진 그 순간 난 놈에게 육박했다.

질투의 힘으로 흉내 낸 과거의 나 자신 그대로의 움직임으로, 난 폭식의 마나를 뻗어내 놈을 덮치며 놈과 똑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니, 내 쪽이 낫겠어.”

그것을 놈이 받아치려던 순간, 그의 한쪽 팔이 화려하게 폭발했다!

Chapter 40. 검은 달 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