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Poor

142. Handling of Strangers (1)

“그리핀도르에서 창공의 기사들이 상징하는 바가 어떤지는 이곳에 계신 여러 귀족분들도 모두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창공의 기사들은 왕도 니-그리피앙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서 최근 백 년간 제 위치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라파예트는 민망하지도 않은지 한때 자신이 속했던 창공의 기사단이라는 이름에 금칠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국가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핀 라이더는 지금의 빅토르 베르트랑 드 그리피앙 국왕 폐하의 대에 와서 그 중요성이 더하면 더해졌지 덜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라이더들을 바로 직전까지 격전을 치러왔던 적국의 요청을 받아 타국의 전장에 파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비록 그 끝이 처참한 패배 끝에 생포 당해 전향하게 되었을지언정 창공의 기사들이 타국의 전쟁에 참전했던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처음 녹테인의 요청을 받았을 때, 빅토르 베르트랑 드 그리피앙 국왕 폐하는 일언지하에 그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다른 유수의 귀족들 역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여겨 폐하의 결정을 지지했지요.”

당연한 일이었다. 끝내 패퇴하고 말았던 자신들의 전쟁에도 참전시키지 않았던 그리핀 라이더들이다. 쉽게 파견을 결정했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녹테인은 다시 요청을 해왔습니다. 꽤나 솔깃한 조건을 제시한 겁니다.”

귀족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때 타국의 기사였던 라파예트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흠.”

허영심 강한 라파예트는 그런 귀족들의 관심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쉬지 않고 떠들어대던 입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는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드러났다.

“그래서 녹테인의 제안이 뭐였는지 말하라.”

하지만 테오도르 국왕은 이 허영심 강한 기사가 뜸을 들일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새롭게 충성을 맹세한 군주가 말을 돌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라파예트가 뜨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녹테인은 창공의 기사들을 빌려주는 대가로 이방인 스물을 양도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라파예트는 잠시 김선혁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같은 이방인이니만큼 노예 거래하듯 주고받는 행태가 그의 심기를 상하게 만들까 염려라도 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는 꽤나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후우.”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이다. 김선혁은 이내 길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 이방인들의 취급이 어떤지는 어느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이 자리에 서기까지 개처럼 전장을 뛰어다니며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야 했다. 그전까지는 전장에서 언제 죽어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신세였던 것이다.

인재에 대해 유달리 대우가 좋은 아덴버그에서 이방인의 취급이 이럴진대 다른 나라들이야 오죽하랴.

하물며 녹테인의 이방인들 중에 제대로 된 활약을 한 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공을 세우지 못한 그들이 더욱 가혹한 취급을 받는다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셈이 맞지가 않소. 이방인 스물이라면 제 나름대로 쓸 만한 전력이긴 하지만 창공의 기사들이 지닌 가치는 그 이상일 터, 그리핀도르의 의심 많은 군주가 고작 그 정도 조건에 수락했을 리가 없소.”

“물론 고작 그 정도 조건만으로 저희 창공의 기사들의 파견이 결정되지는 않았습니다.”

나이 든 귀족의 말에 라파예트는 꽤나 거들먹거리는 표정이 되어 어깨에 힘을 주고 말했다.

“녹테인은 승리 수당으로 국경과 인접한 서부 평원 중 경작지로 쓸 만한 땅 일부를 향후 백년 간 그리핀도르에 임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미쳤군. 완전히 미쳤어.”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귀족들은 나라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영토마저 떼어주며 그리핀 라이더를 빌리려고 한 녹테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조롱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녹테인이 약속한 조건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약속은 언제 깨어지지 모르는 것, 녹테인은 이를 보증하기 위해 공주 중 하나를 볼모로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이쯤 되면 녹테인의 국왕이 완전히 미쳤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단지 와이번 라이더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치른 대가로는 지나치게 과했던 것이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하지만 나이 지긋한 노귀족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귀족파의 거두 중 하나인 북부의 대영주, 베른하르트 폰 미텐마이어 후작은 도리어 녹테인의 결단을 칭찬했다.

“이방인 스물이야 쭉정이들로 골라서 보내면 그만, 볼모로 보낸 공주 역시 혼사로 엮을 수만 있다면 양국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손해는 아니지.”

후작의 말에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손해를 본다면 백년 간 임대할 땅덩어리 하나일 터, 땅이라고는 제 말을 먹일 초지로나 쓰고 달릴 줄밖에 모르는 녹테인의 도적놈들에게는 애당초 경작지라고 제대로 써먹을 수나 있을까.”

나라 안에도 놀리는 땅이 태반인 녹테인이 국경 인근이라 해서 제대로 관리했을 리가 없다며 미텐마이어 후작은 그조차도 손해가 아니라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굴욕적인 조건이 아닌지요.”

“쓸모없는 것을 내주고 드라흔을 꺾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지. 얻을 수 있는 게 이리 많은데 굴욕적일 건 또 뭔가.”

녹테인이 약속한 서부 평원이 어떤 곳인지는 몰라도, 잃어버린 동부의 영토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라는 후작의 설명에 귀족들이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도 상대에게는 이득이 되는 조건을 제시했지. 거기에 더해 패전을 그럴싸하게 포장할 구실마저 얻을 수 있으니 아무리 그리핀도르의 의심 많은 군주라고 해도 이 정도의 조건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을 터. 내 생각이 틀렸는가, 라파예트 경.”

갑작스럽게 지목을 당한 라파예트는 후작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 치의 틀림이 없는 말씀입니다. 군주께서는 그 정도의 조건이면 수락할 만하다 여기셨고 저희 창공의 기사들이 패할 리 없다 생각하셨지요. 군주께서는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 와이번을 생포할 수 있다는 데 기대를 거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게야."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기를 원했던 녹테인은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여 영토를 되찾지 못했고, 그리핀도르는 대가를 받기는커녕 보물과도 같은 그리핀 라이더 둘을 잃고 말았다.

양쪽 다 득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둘 다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게 바로 이곳에 있는 드라흔 경 때문이지.”

후작의 말에 귀족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김선혁을 바라보았다.

하기야 개인으로서 국가 정세에 이만큼이나 영향을 미친 경우는 일찍이 없었으니, 그들이 감탄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김선혁은 갑작스레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음.”

힐끗 테오도르 국왕을 바라보니 주의를 환기시킬 기미는커녕 도리어 제 사위(?)의 공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자 흡족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이 자리에 그를 참석시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텐마이어 후작의 말이 실로 옳다.”

국왕은 귀족들의 감탄을 적당한 타이밍에 끊어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라면 공사다망한 경들을 이 자리에 불렀을 이유가 없다.”

미텐마이어 후작이 국왕에게 고개를 숙이며 의견을 청했다.

“현명하신 폐하께서 눈, 귀 어두운 늙은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실 것을 믿나이다.”

“저들이 많은 것을 잃은 것은 사실이나, 전부를 잃은 것은 아니다.”

테오도르 국왕은 두 나라가 비록 땅과 인재를 잃었을지언정 얻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노라 말했다.

“볼모로 보내어진 공주는 여전히 두 나라의 가교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그제야 귀족들은 테오도르 국왕이 오늘의 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한마음으로 아국이 영락(零落)하기를 바랄 것이며, 이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3국이 참가한 전쟁에서 이득을 본 건 오직 아덴버그 왕국뿐이었으니, 다른 나라의 견제가 없을 리가 없었다.

“경들은 그들이 어찌 나올지를 미리 헤아려 그들이 아국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라.”

**

김선혁은 어느 순간 회의에서 소외되어버렸다.

애초에 전장에서 세운 공으로 벼락출세한 그에게 국제정세를 읽고 내다볼 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수많은 수를 가정하여 갑론을박하는 귀족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루함에 하품이 나올 지경이라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신이 나서 두 나라의 밀약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을 끝으로 제 역할을 마치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진 라파예트의 모습이 보였다.

라파예트는 귀족들의 말에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회의를 따라가지 못해 억지로 알아듣는 시늉을 해 보이는 기색이 고스란히 내비쳤다.

끄응. 그래도 혼자는 아니네.

김선혁은 이런 회의는 군인이나 기사가 아닌 귀족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도록 하지. 오늘의 이야기는 각별히 조심하여 새어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겠다.”

길고 지루한 회의가 테오도르 국왕의 선언으로 마무리가 되었을 때, 그는 하마터면 환호를 지를 뻔했다. 그만큼 귀족들의 회의는 지루하고 난해했다.

“싫으나 좋으나 그대는 왕가의 일원으로 이런 회의에 종종 참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익숙해지는 것이 좋으리라.”

테오도르 국왕이 웃으며 건넨 말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가의 사위로서 중앙 정치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국왕의 뜻이야 알겠다만 도저히 이 지루한 회의에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던 탓이다.

“내가 그대를 너무 오래 붙잡아두었구나. 오필리아가 투정을 부리는 소리가 벌써부터 귀에 들리는 듯하니, 그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라.”

이런 회의에 참석하느니 차라리 어린 약혼녀(?)와 시간을 보내는 게 나았다. 그는 적당히 인사를 건네고는 날 듯이 회의장을 벗어났다.

**

“아.”

숙소로 돌아온 김선혁은 줄리앙이 보이지 않자 내원을 오가는 시종에게 종자의 행방을 물었다.

“찾으시는 종자가 금발 머리를 한 어린 아이라면, 왕녀께서 찾으시어 내원으로 불려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왕녀께서?”

이건 또 무슨 소린지, 김선혁은 생각할 것도 없이 왕녀가 주로 머무르는 내원으로 향했다.

“왔구나.”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왕녀를 뵙습니다.”

습관처럼 왕녀에게 인사한 김선혁은 어린 왕녀의 맞은편에 앉은 줄리앙을 보고는 입을 벙긋거렸다.

니가 왜 여기에?

대답은 줄리앙이 아닌 왕녀가 대신해주었다.

“그대가 맹스크 가의 여식을 위해 왕실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을 알고 있느니라.”

김선혁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어린 종자가 충격이라도 받을까 싶어 이제껏 숨겨왔건만 엉뚱하게도 왕녀가 비밀을 까발린 것이다.

“그대는 그런 얼굴을 할 것 없다. 그녀 또한 자신의 몸에 생긴 좋지 못한 징조를 진즉부터 알고 있었으니.”

“제가 바봅니까? 내 몸에서 일어난 일도 모르게.”

어린 종자는 제 몸에 생긴 치명적인 후유증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젓하기만 했다.

“너 괜찮아?”

“안 괜찮으면 또 어떻습니까. 이미 일어난 일인데.”

가능하면 해결책을 찾아놓고 알려주려 했지만, 눈치 빠른 그녀가 먼저 알아버렸다.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 애꿎은 이가 피해를 보았으니 그가 죄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휴.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왕녀께서 해독에 관한한 왕국 제일이라고 해도 좋을 마법사분께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선처해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벌써부터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줄리앙의 말에 김선혁이 왕녀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공적으로는 왕실을 위해 누대에 걸쳐 헌신해온 맹스크 가의 여식을 치료하는 일이요, 사적으로는 한 식구가 될 그대의 종자를 돌보는 것이니 어찌 남의 일처럼 여기겠는가. 그러니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지 말라.”

이제는 왕녀의 이런 뻔뻔스러운 말도 많이 익숙해진 것일까. 저도 모르게 왕녀의 말에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자신도 갈 때까지 간 모양이었다.

“서운하도다. 차라리 처음부터 나에게 말했다면 내 발 벗고 나서서 도왔을 것이거늘. 곧 한 식구가 될 몸이 아니더냐.”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한 식구라는 말에는 온몸에 닭살이 돋고 말았다.

뭐라고 맞장구를 쳐야 할지 난감하기만 한 상황, 그는 왕녀에게 어색한 웃음이나마 보여주었다.

“음….”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고 나니 김선혁은 그제야 비로소 줄리앙과 왕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어린 종자는 조금도 자라지 않았고, 더욱 앳되던 왕녀는 이제 완연한 소녀의 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직접 그 차이를 비교하고 나니 새삼 그 후유증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그럼 그대는 지금 당장 왕실 마법사단의 거처로 향하도록 하라. 미리 기별을 보내놓았으니, 가는 즉시 그대의 몸을 살필 자가 나올 것이다.”

제 아비를 닮은 것인지 추진력 왕성한 왕녀의 말에 줄리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왕녀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다시 또 뵐 수 있기를 바라옵나이다.”

“나 또한 왕국의 방패라 할 수 있는 맹스크 가의 여식과 이리 대화를 할 수 있어 즐거웠노라. 언제고 다시 오늘과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겠노라.”

“왕녀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줄리앙은 왕녀에게 예를 표해 보이고는 이내 시녀를 따라 사라졌다.

“종자를 많이 아끼는구나.”

뉘앙스가 어쩐지 묘해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왕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축첩(蓄妾)은 불가하니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

밑도 끝도 없는 말에 그가 얼빠진 얼굴로 반문하자 왕녀가 짐짓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왕실의 법도가 그러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