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Poor

287. Endless War (1)

오필리아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쉽게 화를 풀지 않았다. 지은 죄가 있었던지라 김선혁은 그녀가 화를 풀 때까지 온갖 노력을 다해야 했다.

“잘못했어요. 오필리아. 그만 화 풀어요.”

전장에 나섰다 하면 전신처럼 군림하는 그였지만, 화가 난 아내 앞에서는 평범한 남편보다 못한 입장이었다.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잖아요. 봐요. 상처 하나 없잖아요.”

빌고 또 빌고 용서를 구한 끝에 오필리아의 분노를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러도 한참 일렀다.

“다시 전과 같은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겠소?”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필리아의 질문에 김선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그게….”

집 나간 아룡들이야 골드레이크와 블루곤이 그러했듯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만, 용은 아니었다. 엉뚱한 일에 휘말리는 바람에 정작 용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온 그로서는 언제가 됐든 간에 한 번은 용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황도를 떠나야 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일을 다 본 뒤에 돌아오지, 왜 지금 왔소.”

그녀의 힐난에 김선혁이 조심스레 그녀의 부푼 배를 가리켰다.

“곧 아이가 태어날 텐데, 오필리아 혼자 둘 수는 없었으니까요.”

가녀린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잔뜩 솟아오른 그녀의 배는 품 넉넉한 드레스로도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대륙 중부를 전전하는 사이에 어느새 출산의 시기가 임박한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거란 말이오?”

제 딴에는 솔직하게 이야기한다고 이야기했는데 돌아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원망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쟁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마침 돌아오려고 했던 참이었어요.”

“그럼 전쟁이 계속해서 심화됐으면 돌아오지 않았을 거란 말이나 진배없소.”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건 비난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니, 결국 남은 것은 구차한 변명 대신 잘못했다 비는 것밖에 없었다.

“잘못했어요. 화 풀어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나가지 않을게요.”

그는 오필리아를 졸졸 따라다녔다.

“중부의 왕국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명분이 아니라 실질적인 무력이니라. 그들에게 우리 아덴버그 제국이 기꺼이 방패막이 되어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면, 테네시아 뿐 아니라 다른 왕국들도 교국의 충동질에 더 이상 나서는 일은 없으리라.”

오필리아는 부푼 배를 하고도 몸소 전쟁의 상황을 챙겼고, 진두지휘했다. 제국의 귀족들 역시 더 이상 그녀의 그런 모습이 낯설지 않은 모양인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여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전승대공의 모습에는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공 때문에 귀족들의 원성이 자자하더군.”

어디를 다녀온 것인지 황도에 돌아온 뒤로 한동안 보이지 않던 레인하르트 후작이 체통 없이 낄낄대며 말을 걸어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뜩이나 대하기 어려운 폐하신데, 대공이 돌아온 뒤로 부쩍 날카로워진 모습을 보이시니 매일같이 폐하를 뵈어야 할 귀족들이 대공을 원망하고 있다는 말이네.”

그러고 보니 회의에 참가한 귀족들의 모습이 늘상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워낙에 큰 전쟁을 다루는 회의이다보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끙. 저도 죽겠습니다.”

“그러게 왜 자꾸 그렇게 폐하의 의중을 어지럽히는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자꾸만 속을 긁어대는 후작의 태도가 얄미워 김선혁이 못마땅한 얼굴을 해보였다.

“제국 바깥에서는 대륙 최강의 기사네 뭐네 난리건만, 대공은 처음 봤을 때 모습 그대로구먼.”

“어쩌겠습니까. 애초에 생겨먹기를 이렇게 생겨먹은 놈인데.”

그의 심드렁한 대답에 레인하르트 후작이 낄낄대다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해보였다.

“사실은 말일세. 대공에게 할 말이 있네.”

“뭡니까?”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그가 자세를 고치며 묻자 레인하르트 후작이 전에 없이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발 폐하를 좀 설득해주게.”

레인하르트 후작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대공이 구해온 천년화를 폐하께서 당신께 쓰지 않겠노라 선언하셨다네.”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페하께서는 당신께서 단명의 운명을 벗어나는 대신, 곧 태어날 아이에게 천년화를 쓰실 작정이시네.”

**

“왜 그랬어요.”

김선혁은 처음으로 오필리아에게 화를 냈다.

“분명 그 천년화는 오필리아 거라고 했잖아요.”

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고지식하고 헌신적인 아데스덴의 핏줄에 김선혁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오필리아가 물려주면, 아이가 또 다음 대에 물려주고. 아데스덴의 가보로라도 삼을 생각이에요?”

대륙 최강의 제국을 다스리는 여제에게 하는 말 치고는 지나치게 불손한 어조와 태도였지만, 오필리아는 이를 나무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나보다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더욱 중히 쓰일 거라 생각했을 뿐이오.”

테오도르가 그러했듯 그녀 역시 한 점 미련도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덜컥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지금이야 그대를 비롯한 인재들이 제국을 떠받들고 있지만, 이후에는 모를 일이오. 그래서 나는 태어날 아이가 조금 더 오랫동안 제 스스로를 갈고 닦을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지금이야 김선혁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초인들이 제국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다지만, 다음 세대에도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필리아가 더 오랫동안 제국의 기틀을 다지면 되잖아요. 아이가 물려받을 제국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국으로 만들어서 물려주면 되잖아요.”

“선대 폐하께서 아데스덴의 권위를 세우는데 평생을 바치친 끝에 겨우 제국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소. 이렇듯 성군이라 불리는 선대 폐하도 평생동안 단 하나의 과제를 겨우 풀어내는게 고작이었듯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소.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후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소.”

군주로서 나무랄 곳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김선혁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아데스덴, 그리고 제국. 그녀가 설명하는 미래 그 어디에도 오필리아 본인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오필리아의 말은 틀렸어요.”

김선혁이 전에 없이 강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놀랐는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대에 걸쳐 쌓아온 녹테인과의 원한을 청산했고, 대륙을 집어삼키려던 마왕을 거꾸러트렸어요. 기천의 퀘이샤들을 구해 제국에 뿌리를 내리게 만들었고, 수도 없이 많은 이방인들을 제국으로 편입시켜 동부의 어느 누구도 제국을 넘볼 수 없게 만들었어요. 붕괴 직전의 이베리아의 전선을 지켜내고, 마침내 교국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려 중부 왕국 연합의 결속을 깼죠.”

일개 개인이 이루기에는 너무도 많은 업적, 그는 자신이 직접 목숨 바쳐 이룬 것들로 오필리아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래도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이룰 수 있는 게 적다고 말할 참인가요.”

물론 모든 이들이 이리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감할 수는 없었다.

“풍요로움을 잃은 제국의 앞날이 걱정돼요? 제가 해결할게요. 제국의 앞날을 위협할 자들이 걱정돼요? 제가 모조리 치워버릴게요. 아이의 대에서 기승을 부릴 귀족들이 걱정돼요? 제가 감히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게요.”

허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실천할 능력이 있었다.

“만약 제가 멍청해서 미덥지 않다면, 오필리아가 곁에서 도와줘요. 저와는 달리 오필리아는 유능하고 현명한 군주잖아요.”

혹시 모를 실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현명한 오필리아가 곁에 있는 이상 그는 매사에 전력으로 임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전력을 다 끌어낸 용혈기사가 이루지 못할 것은 없었다.

인세에 대적할 자가 없다던 마왕마저 무릎을 꿇렸고, 비록 그 조각에 불과할지언정 과거 대륙을 불태웠던 혼돈마저도 도주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와서 불가능을 논하기에는 그가 이 세상에 와서 받은 것들이 너무도 엄청났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천년화를 취해요.”

김선혁이 오필리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강하게 말했다.

“그리고 천년화 까짓 거, 퀘이샤들에게 졸라서 하나 더 얻어오면 된다고요. 오필리아가 걱정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물론 퀘이샤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어머니 나무의 유산을 쉽게 얻어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가 이룩해온 많은 것들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들, 또 하나의 천년화를 얻어낸다는 게 꼭 허황된 꿈은 아니었다.

전에 없이 믿음직하고 강한 모습에 말문이 막혔는지 오필리아는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내가 대공을 믿어도 되겠소?”

그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얼굴 그 어디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보이지 않았다.

“날 믿어요.”

김선혁은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어떤 확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듯 걱정이 가신 모습이었고, 그녀 역시 그 눈빛에 신뢰가 가득했다.

“내가 아덴버그를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이름으로 만들게요.”

별다른 목적 없이 당면한 문제만 해결해왔던 김선혁이 처음으로 인생의 목표를 세운 순간이었다.

**

오필리아는 마침내 천년화를 흡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당장 천년화를 몸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천년화의 강한 기운이 혹시라도 뱃속의 태아에게 좋지 못한 영향이라도 미칠 수도 있다는 마법사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것까지는 김선혁도 어찌 할 수가 없었던지라, 그저 초조한 심정으로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아이의 이름으로 빅토리우스는 어떻소?”

“빅토리우스요?”

품에 파고든 오필리아의 말에 김선혁이 되물었다.

“대공이 걸어온 수많은 영광과 앞으로 아이의 앞에 펼쳐질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이니, 제법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오?”

“아….”

그제서야 빅토리우스라는 이름에 담긴 뜻을 알게 된 그가 가만히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되뇌었다.

“빅토리우스 드라흔 로 아데스덴이라….”

꽤나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좋은 이름이네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오. 사실 대공이 오기 전부터 생각해두었던 이름인데, 혹여 마음에 들지 않다면 어찌 해야 하나 고민했소.”

그러고 보니 골드레이크라는 이름을 지어준 게 바로 오필리아였다. 그때는 그녀의 작명 센스에 기겁을 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녀가 다소 볼멘 소리로 변명했다.

“미물에게 사람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아….”

아무래도 그녀에게 있어 골드레이크라는 이름은 저쪽 세상의 흰둥이 검둥이와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뒤늦게 골드레이크의 이름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된 김선혁이 복잡한 얼굴을 해보였다.

금둥이, 파랑둥이, 빨간둥이….

의식하지 못한 그 강력한 아룡들의 이름이 죄다 해괴하게 지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끙.”

앓는 소리를 내뱉은 그가 불현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사라졌던 아룡들 중 또 다른 하나가 근처에 당도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