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Poor

304. Master of the Continent (1)

[반려여!]

머리를 울려대는 다급한 사념에 김선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쉬익. 쉬익.

마치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수백 가닥의 검은 촉수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하나하나가 스치기만 해도 몸이 썩고 정신이 오염되는 끔찍한 저주의 결정체들이었다.

언제 이렇게….

몸을 빼낼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흡."

그는 무리해서 몸을 빼내는 대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찰나의 순간 전룡의 턱 끝에 불꽃이 모여들다 새빨간 화염의 숨결이 되어 촉수를 남김없이 불태웠다.

“형님!”

흩날리는 검은 재를 뚫고 용사가 달려왔다.

“괜찮으신 겁니까!”

‘웅크린 어둠을 노려보는 감시자, 흉폭한 짐승을 옥죄는 족쇄, 성검은 혼돈의 조각을 지키는 봉인구였네.'

환청처럼 마렉이 남긴 사념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갇혀있던 혼돈의 조각이 세상에 풀려났는데도 봉인구가 멀쩡하다는게 무슨 말이겠는가. 봉인은 깨어진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연 걸세.’

마렉은 용사가 세상에 혼돈의 조각을 풀어준 장본인이라 말했다.

‘마왕이 혼돈을 부른 게 아니야. 혼돈이 마왕을 만든 것이네. 그리고 그 이전에 성검을 취한 용사가 있었지.’

대적자는 대적자를 부르고 마왕은 용사라는 대적자를 탄생시켰다.

그것이 김선혁이 알고 있던 진실이었다.

하지만 마렉은 그것이 거짓이라 말했다.

먼저 각성한 것은 용사였고, 마왕이 완전해질 수 있도록 만든 것도 용사였다.

‘판단은 자네 몫일세. 자네의 의동생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인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 자네가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야.'

“형님?”

본신에 지닌 힘에 어울리지 않는 용사의 얼굴.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명심하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박한 눈빛에 담긴 염려 그 어디에도 가식은 찾을 수 없었다.

‘전투가 끝이 났을 때, 그때야말로 가장 조심해야 할 순간이네.'

“형님! 정신 차려요!”

순간적으로 용사가 그를 밀치고 나서며 성검을 휘둘렀다. 그 한 번의 칼질에 달려들던 촉수 수백 가닥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한때 마왕을 상대로도 고전했던 용사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이 또한 놀라운 성장이었다.

하기야 마기와 어둠을 먹고 자라는 성검과 그 주인에게 있어 이곳보다 더 좋은 사냥터는 없으니, 용사의 힘이 과거와 같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해주겠네. 이 세상천지에 마기와 혼돈을 먹고 자라는 존재는 있을 수 없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끊긴 줄 알았던 마렉의 말소리는 그조차도 진실이 아니라 말하였다.

‘만약 그렇게 보였다면 그건 단지 성검이 봉인구로서 사명을 다할때, 더욱 공고해지는 경계 밖 신성의 주인과의 연결 때문이었겠지. 원래대로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신성과 그 추종자들이 공공연하게 이적을 행할 수 있었던 건 봉인의 주체인 신성의 주인에게 허락한 유일한 권능이었으니까.'

김선혁은 마렉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마기를 먹어 없애는 것이 가능했다면 굳이 봉인이라는 수단으로 분란의 여지를 남길 이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먹어 없앴다면 이 모든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용사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적어도 에다가 격전 끝에 적출해낸 혼돈의 조각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용사를 보기 전 까지는.

크아아아아아.

거대한 혼돈의 본체 속에서 용케 혼돈의 조각 하나를 뜯어낸 에다가 허공에 그 작은 파편 하나를 내던졌다.

[반려여!]

“알았어!”

온갖 잡념으로 머릿속이 혼탁했던 김선혁도 이 순간만큼은 전투에 집중했다. 지금이야말로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기로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던 탓이다.

그르르르르.

에다의 턱 끝에 눈부신 빛이 모여들고, 전룡의 이 사이로 화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에다와 그가 그러모은 숨결을 내뱉기도 전에 용사가 먼저 움직였다.

탓.

이제까지 보여왔던 움직임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 그가 용사의 돌발행동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성검이 혼돈의 조각을 꿰뚫고 난 뒤였다.

끼에에에에에에.

마치 심장처럼 발딱거리는 흉물스러운 덩어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끼에에에에에.

성검에 관통당한 부위에서 검은 기운을 줄기줄기 흘려대며 혼돈의 조각이 급격하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쪼그라들던 그 거대한 덩어리가 어린아이 주먹보다 작게 변했을 때, 용사로부터 강력한 백광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

황홀경에 취한 듯 몽롱한 얼굴을 한 용사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낯설었다.

이상할 정도로 번들거리는 새하얀 눈자위에 가득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열망뿐이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무언가를 비웃듯 삐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작은 비틀림은 금세 성스러운 빛에 휩싸여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고, 용사를 둘러싼 새하얀 백광은 더욱 강렬해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사라졌을 때, 용사는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등 뒤에 돋아난 순백의 날개는 마치 천사의 그것과도 같았고, 온몸을 둘러싼 성광은 거룩함 그 자체였다.

“형님하고 용이 혼돈의 조각을 찢어내면 제가 처리할게요!”

슬며시 제 몸에 일어난 변화를 확인한 용사가 씨익 웃더니, 금세 평소대로 돌아와 경망스럽게 외쳐댔다.

“빨리요! 서두르지 않으면 놈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칠 수도 있어요!”

마치 참을성 없는 어린아이처럼 안달이 난 용사의 모습은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제 넷밖에 안 남았다고요!"

자꾸만 보채는 용사의 음성, 그 순간 불현듯 황도를 떠나기 직전 보았던 전문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처음에는 병사들의 기대감을 이기지 못한 용사가 미쳐버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용사는 너무도 평온했고 신탁을 통해 정신적인 위기를 극복해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교국 방면 제국 원정대의 총사령관이 보내온 전문이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지나치게 극적이라 제 눈에는 마치 용사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김선혁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에다.”

신경 쓰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영혼을 공유하는 반려에게 닿기에는 충분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그는 마렉에게 들은 이야기를 빠르게 설명해주었다.

[어쩌면 거듭된 죽음과 부활조차도 용사가 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영혼을 말살시키기 위한 안배였을지도 모르리라.]

에다는 여러 차례의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며 영혼에 손상을 입은 용사야말로 화신으로 삼기에 더없이 적당한 인물이라 말했다.

모든 상황이 이리도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는데도 끝까지 외면할 정도로 김선혁은 멍청하지 않았고 무른 성격도 아니었다.

[마음속의 미혹을 드디어 걷어내모양이구나.]

“만약 놈이 준민이의 몸을 강제로 뺏은 거라면.”

비록 그 속이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그는 제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이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들겠어.”

지금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숴버려야 할 때였다.

***

“이제 끝났구나.”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마렉이 말했다.

혼돈이 본체를 이루고 있던 다섯 개의 조각 중 하나를 잃은 직후, 전세는 완벽하게 기울었다.

혼돈은 더 이상 자신의 적을 맞아 대등하게 맞서지 못했고, 물어 뜯겨 심장과도 같은 조각을 하나하나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교국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대륙을 위협하던 어둠은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애매하구나. 애매해.”

마지막 어둠이 흩어지는 것을 본중부의 조율자가 혀를 찼다.

용사는 어떻게든 혼돈의 조각을 제 것으로 하려고 했지만, 용과 그반려가 그걸 지켜보지 않았다. 그 결과 용사는 처음의 조각을 제외하면 단 하나의 조각을 취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다섯 개의 조각 중 신성의 주인이 취한 것은 단둘 뿐. 본래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보기엔 부족한 감이 있지만, 원래 품고 있던 하나의 조각보다는 많으니 참으로 애매하도다.”

중부의 조율자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전장에 선 초월자들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어찌 할 텐가. 신성의 주인이여.”

조율자의 말에 마렉이 끼어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난데없는 말에 조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인가.”

“앞으로 어찌 할지 결정하는 건 용사도 신성의 주인도 아니야.”

마렉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조율자를 비웃었다.

“용제와 그 반려가 앞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걸세.”

그 말마따나 두 쌍의 날개를 펼쳐든 용사는 그 찬란한 모습과는 달리 주춤거리며 그 어떤 행동도 먼저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자도 참 운이 없군. 하필이면 눈앞에 선 것이 당대의 용제와 반려라니.”

혀를 차며 말한 마렉이 몸을 돌렸다.

“끝까지 지켜보지 않을 참인가?”

당장에라도 자리를 벗어날 듯한 마렉을 조율자가 붙잡았다.

“멍청하군. 아직도 감이 오지 않는가?”

노골적인 조롱에도 조율자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군.”

마렉이 혀를 찼다.

“신성의 주인이 이 세상에 돌아오고 말고, 또 다른 초월자들이 이세상에 머물고 말고는 이제 그들의 의지를 벗어났네.”

조율자의 눈이 조금씩 커지더니 끝에 가서는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경계 밖으로 밀려났던 초월자들이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려면. 용제와 그 반려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말일세.”

마렉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다른 자들은 몰라도 신성의 주인만큼은 이 땅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구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이 사라진 전장에서 새하얀 백광이 치솟았다. 하지만 하늘 끝까지 치솟던 백광은 눈부신 서기에 짓눌려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안에서 악에 받힌 절규가 터져 나왔다.

“어째서! 어째섭니까!”

바닥에 처박힌 채 두 쌍의 날개를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용사의 모습은 그 순간조차도 거룩하고 순결해 보였다.

“분명 제가 혼돈의 조각을 처리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혹시 저를 믿지 못하신 겁니까!"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 몸을 떠는 용사,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김선혁의 눈빛에는 연민은커녕 그 완전무결한 신성에 대한 조금의 경의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형님! 저 박준민입니다! 형님의 동생 준민이라고요!”

자신을 찍어누르는 금빛 서기에 저항하며 용사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강대한 용의 기운앞에서 용사를 둘러싼 백광은 무력하기만 했다.

“대체 왜!”

“대체 언제부터였지?”

피를 토하는 듯한 음성으로 연신 외쳐대는 용사를 보며 김선혁이 차갑게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 준민이를 대신한거지?”

“그게 무슨 말….”

용사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너는 저 경계 너머의 존재인가. 아니면 발뭉인가.”

“형님.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제 말부터….”

김선혁은 용사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에다.”

진즉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한껏 숨을 그러모은 에다가 강력한 숨결을 토해냈다. 혼돈의 조각조자 소멸시키고야 만 용의 숨결이었다.

“혀, 형님!”

그 강대한 공격에 한낱 인간이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용사가 불러일으킨 빛의 갑주와 방패는 금빛 숨결 앞에 허무하리만치 쉽게 녹아버렸고, 마침내 용사조차도 녹아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부활의 권능을 지닌 용사는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아났다.

“형님! 대체 왜!”

다시 한 번 용의 숨결이 용사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제 말부터….”

“대체 뭐가 문제….”

“끄악!”

“그만! 그만!”

용사는 몇 번이고 살아났고, 에다는 몇 번이고 용사를 다시 죽였다.

“일단 레벨을 1까지 떨어트리면 뭐가 튀어나와도 튀어나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