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ret

Chapter 2. Statement

타고나기를 인간이 아닌 ‘성녀 위그드라실’로 태어난 존재에게도 자아가 있는 이상 혼란과 호기심은 존재했다.

특히나 성녀란 인간과 닮았지만 넘치는 신성력과 500년이라는 긴 수명을 가진 특이한 개체로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담담히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고 있으나, 그녀의 가슴속에도 인간과 같은 감정이 때때로 꿈틀거리곤 했다.

“특히나 정을 준 대상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곤 했었답니다. 그럴 땐 계속 기도했어요. ……더 이상 떠난 사람 생각이 안날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

“이제 내게 남은 수명은 200년가량,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런 경험을 겪어야 할지.”

거기까지 얘기한 위그드라실은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이런 얘길 할까요? 헤브가 좋아하는 분을 만난 건 오랜만이라 그런 걸까……. 아?”

꼬옥.

텅 비어 있던 차가운 손 위로 자그마한 손이 맞닿았다. 부드럽게 잡아오는 따뜻한 온기에 그녀의 목이 턱 막혀 왔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힘껏 잡아준 쥬다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누구나 겁나는 일이요. 홀로 남겨진다는 건 말입니다.”

성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보이지 않는 눈이어도 그 기능을 전부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떨리던 눈망울에 점차 물기가 어렸다.

‘겁이라고? 나, 겁이 났었나?’

그녀가 침묵하자 한 박자 쉰 쥬다스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울고 싶을 만큼 무서울 땐 그저 울면 나아진다 하더이다. 어차피 인간은 다 다른 존재요. 보통보다 조금 더 특별함을 가졌을 뿐, 내 눈엔 성녀님도 오롯한 인간입니다.”

“내가, 인간?”

“이백 년을 더 사실 수 있다 하였으니 그중 절반은 얼굴 맞댈 날이 있겠지요. 허허, 그동안 말벗이라도 되어보렵니까?”

‘벗…….’

입안으로 중얼거려 본 위그드라실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지어졌다.

위그드라실은 제 차가운 손을 붙들고 있는 작은 손을 소중히 감싸 쥐었다.

300년이 다 되어가도록 인간을 위해 살아온 성녀는, 자신을 같은 인간이라 칭해 주는 존재로 인해 조금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다.

“네, 형제님을 위해서라면 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허어……. 고맙지만 기왕지사 울 일보다야 웃을 날이 많은 게 좋겠습니다.”

결국 성녀 위그드라실은 소리 내어 쿡쿡 웃고야 말았다.

***

진명을 받은 사람은 즉시 쉴 수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사제들이 머무는 기숙사 같은 곳이었는데 귀족 자제들이 사용하기에 시설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생필품은 마련되어 있었지만 고급스럽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았다. 세면 시설은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고 보급형 침대는 좁고 딱딱했다.

그래도 본래 그마저도 없던 자연 속에서 잘만 생활해 왔던 기억이 있는 쥬다스로서는 걸릴 것 없이 푹 쉴 수 있었다.

거기서 별 탈 없이 하루를 묵은 쥬다스는 포탈 이용 시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뭔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포탈 관리실에 도달하자 평소와는 달리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중엔 출발하지 못한 루바흐 학생이 대다수였고, 다른 교황청 방문객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쥬다스를 발견한 에단이 크리스티나와 함께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이로구나. 에단, 크리스티나. 그래, 진명들은 잘 받았고?”

“예.”

태연하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을 향해 크리스티나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아침이라기엔 문제가 좀 있네요.”

“흐음……?”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이긴 했다.

쥬다스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탈 관리자를 향해 거칠게 항의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망연히 포탈 앞에 선 채 고민에 빠진 사람이나 일행끼리 모여 의견을 조율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작 포탈 관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그를 보니 쥬다스도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포탈이 고장 났다고 합니다.”

에단이 현 상황을 일축했다. 짐작은 했지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쥬다스가 턱을 짚었다.

그가 알기로 포탈은 마법력을 기반으로 작동되는 단순한 원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포탈의 설계와 좌표값을 입력, 출력하는 기능 및 안전성을 위한 장치 등은 복잡하게 얽혀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마법이었다.

마법은 소모되는 에너지만 충분히 제공된다면 절대 녹슬지 않는다.

한번 입력한 수식에는 오차가 생기지 않으며 물리 작용이 아니니 내구성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 자연적으로 ‘고장’ 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포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쥬다스로서는 오히려 현 상황이 더욱 난해한 문제로 다가왔다.

그가 직접 설계에 관여한 만큼 구멍이 있다면 알아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그에겐 정보가 좀 더 필요했다.

“……유니.”

「응, 이그레트.」

술사와 정령은 많은 부분이 이어져 있다. 정령술사가 강하게 바라는 것은 굳이 말로 전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정령에게 전해졌다.

그랬기에 유니는 더 물을 것도 없이 쥬다스가 바라는 ‘정보’를 알아오기 위해 즉시 바람을 사방에 퍼뜨렸다.

순간적으로 귓불을 훅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감지해 낸 에단이 쥬다스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바람의 정령인가.’

태어나기를 무가 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질을 훈련시켜 온 자답게 에단은 이런 면에서도 유독 감이 좋았다.

그는 쥬다스가 정령을 부렸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가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쥬다스는 빙긋 웃어보였다.

“쥬다스 님, 방금.”

“여직 시간이 충분히 남았으이. 차분히 기다려 보게나.”

“…….”

쥬다스가 의도적으로 대답을 피했음을 눈치챈 에단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또 다른 정령은 쥬다스의 머리 위에 엎드린 채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그레트, 또 유니만 부른다요.」

「훗. 그게 나랑 너의 차이 아니겠어?」

「! 너무해!」

이런, 또 아웅다웅하는 두 정령을 보며 쥬다스는 볼을 긁적였다. 예전부터 4명의 정령왕 중 제일 잘 티격태격하는 사이는 저 둘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리광이 많고 응석받이인 토니와 장난치길 좋아하며 짓궂은 성격의 유니는 사사건건 잘 부딪쳤다.

주로 유니가 토니를 자극하는 쪽이었는데, 매번 같은 패턴의 놀림에도 토니는 아주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니 유니가 참지 못하고 자꾸 건드리게 되는 것이다.

유니가 자애로워지는 범주는 오로지 이그레트 한정이었다.

「힝, 이럴 땐 루니가 보고 싶다요.」

「어쭈, 루니가 네 보모야? 응? 어차피 루니한테 제일 많이 혼나는 것도 너면서 뭘 그래?」

유니의 정곡에 토니는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물의 정령왕인 루니 앞에서는 유니도 조금은 얌전히 굴었다. 그를 화나게 하면 여러모로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화나게 한 정령이 아닌, 이그레트가.

일전에 한 번 제대로 루니의 화를 돋워 이그레트를 곤란하게 만든 적 있는 유니는 그 뒤로 가급적이면 그 앞에서는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제일 그로부터 혼나는 장본인은 토니였다.

「아, 이그레트! 포탈이 고장 난 원인을 알아냈어.」

유니는 구박하던 것을 멈추고 쥬다스의 손바닥 위로 뽀르르 날아갔다.

「밤중에 마법사가 하나 이곳에 다녀갔대. 일부러 포탈에 균열을 냈다나 봐.」

“……흠.”

여기까진 예상대로였다.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포탈을 망가뜨렸다. 하지만 대체 누가, 왜인지는 명확하지가 않았다.

‘이곳에 발을 묶어 둬야 할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교황청은 오직 포탈로만 입장할 수 있는 성역이다.

사방이 강물에 둘러싸여 있고 건너편과 이어진 다리는 모두 분리된 채였다.

물을 건너오려고 해도 강력히 통제되고 있으며 높은 벽을 쌓아 입구를 봉해 버렸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거대한 밀실과도 같았다.

‘그 말은 포탈을 건드린 마법사도 이곳에 아직 남아 있다는 뜻.’

쥬다스의 금안이 동력이 꺼져 버린 포탈을 지그시 향했다.

“이거 어떡할 겁니까? 우린 오늘 출발하지 않으면 교칙 위반이라고!”

“형제님, 일단 진정하시고…….”

“당신 같으면 진정이 되겠습니까?!”

포탈을 이용하지 못한 방문객들의 항의가 점차 거세졌다.

포탈 관리자는 관리자대로 난색을 표하고 있었으나 대다수의 사람은 남의 사정 봐줄 의향은 없었다.

이윽고 상황이 위로 전달된 모양인지 성녀 위그드라실이 헤브를 대동하고 포탈로 달려왔다.

성녀가 등장하자 혼란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성 위그드라실의 이름을 자녀 중 하나입니다. 우선 형제자매님들께 불편을 겪게 해드린 점 사죄드립니다. 즉시 포탈 수리에 전심전력을 다할 것이니, 나가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머무시는 동안의 편의는 정성껏 제공하겠습니다.”

성녀씩이나 되는 자가 머리를 숙였으니 거기에 대고 함부로 삿대질을 할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었다.

불만 어린 표정들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의 항의는 이어지지 않았다.

위그드라실의 사과를 들은 방문객들은 투덜거리며 관리실 밖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직 포탈에 미련이 남은 몇몇 사람과 쥬다스 일행만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작품 후기

* By. 공든탑

사족으로 교황청의 포탈관리가 허술한 건 아닙니다. 침입자의 실력이 월등히 좋은 것일 뿐(...)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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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