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ret

Chapter 14. Swearing

그 바람에 넋을 놓고 있던 바이칼에게 세이지가 다가와 물었다.

“저, 괜찮은 거야?”

“넵? 뭐 그럭저럭 버틸 만은 합니다.”

“지금 거의 산송장으로 보이오만.”

“……그 정돕니까?”

콜까지 한마디 거들자 바이칼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려다 훅 엄습하는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오, 더럽게 아프네.”

그리 중얼거리는 바이칼의 곁으로 에단이 툭 한마디 던지며 지나갔다.

“할 말은 많지만.”

“예?”

“치료가 끝난 뒤에 몰아서 하도록 하지.”

그리곤 휙 지나쳐 쥬다스의 뒤에 가 섰다.

바이칼은 치료가 끝난 후엔 다른 의미의 죽음을 맛보게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리해 내고 끙 자리에 드러누웠다.

바싹 마른 육포처럼 온몸에 마력이라곤 하나도 없고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리고 창에 꿰뚫린 어깨에선 불에 지지는 고통이 꾸역꾸역 숨을 달구고 있었다.

그로선 여태껏 정신을 놓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전하께선 왜 그런 표정을.’

그간 좀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주군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바이칼이 목격한 표정에는 약간이나마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빙산의 일각인 양 보이는 그 감정의 일부분은 분노와 가장 닮아 있었다.

얼떨떨함을 넘어서 불안까지 느끼기 시작한 바이칼의 염려대로 쥬다스는 현재 그리 평안한 심리 상태가 아니었다.

“흐음. 일행인가요? 고기를 낚다 운 좋게 얻어걸린 송사리 한 마리라고 생각했는데.”

“…….”

“생각보다 거물을 끌어들인 모양이네요. 루바르잔 황태자 전하.”

할더는 상대의 은발과 금안으로 곧장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마찬가지로 쥬다스 역시 그를 알아보았고, 그랬기에 침묵을 택했다.

“꼭 한번 만나보곤 싶었죠. 그 프리드가 관심을 가지는 것도 특이한 일이었지만. 전하껜 개인적으로도 흥미가 있었거든요.”

흥미가 있다는 사람치곤 지독하게 무감정한 어조였다.

프리드는 쥬다스를 만난 이후 누구에게도 ‘이그레트’의 환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더나 다른 그의 동료들은 쥬다스가 이그레트 본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할더는 지루해하는 아이처럼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자연계 4속성 정령과 전부 계약한 인간이 또 있다니. 과연 어떤 자기에 자연의 사랑을 받았다는 그분과 똑같은 찬사를 듣고 있는 걸까 해서…….”

고개를 살짝 기울인 할더가 손을 저어 남은 사령을 전부 물렸다.

“그런데 정말 짜증나네요.”

“무엇이 그리도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게냐.”

“당연한 걸 물으시네요. 빛나도록 영특해 보이면서 정작 당연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마저 닮았군요.”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옅은 경멸을 담고 쥬다스를 향했다.

“세상에서 위대한 자는 한 명으로 족해요. 그 칭송은 오직 이그레트 님을 위한 것이죠. 어리석은 당신이 아니라.”

“너는 그를 싫어한 것 아니었느냐.”

“싫어해요? 내가 그분을?”

할더는 고양이가 생선을 마다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럴 리가요. 그분은 내 어버이, 내 하늘이신데.”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그는 차가운 세상에 버려진 자신을 거두어준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자의 심장을 찌르려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진심으로 죽여 없애고자 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분의 사상이 방해가 되었을 뿐이죠. 다신 눈을 뜨지 못하게 되든지, 타락하여 사령의 지배를 받든지. 어떤 모습이라도 곁에 살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거지?’

문득 자신이 평소답지 않게 입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할더가 잠시 멈칫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늘 만사에 무심하며 무엇이든 크게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타인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상황 따위는 경험하기 힘들었다.

특히 지금처럼 극히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게다가 이상하네. 방금 그 말은 마치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할더가 의문을 품고 입을 다문 시점까지 가만 듣고만 있던 쥬다스의 금안에 잔잔한 분노가 일렁였다.

그 분노에 감응한 정령들이 일제히 파앗 실체화하여 그 곁에 나타났다.

“어째서 저들이.”

할더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뒤로 훌쩍 물러섰다.

한때 이그레트의 가장 곁에 있던 이들 중 하나였던 만큼 정령왕들을 알아보는 일도 쉬웠다.

“뭐죠.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지조 없네요, 당신들.”

「저게 진짜? 누굴 바람난 여편네 취급이야!」

「유니, 그 표현은 좀 상처예요. 저건 그냥 저 자식이 우릴 빙다리 핫바지로 보는 거라구요.」

「끄앙. 둘 다 상처다요!」

씩씩거리는 유니와 말리는 척하며 험악하게 동조하는 카니를 향해 토니가 도리질했다.

묵묵히 쥬다스의 곁에 선 푸른 늑대가 사나운 기세로 그르르 목을 울렸다.

“하면 지하공간을 만든 건 일부러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나.”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일행을 건드린 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애초에 당신 일행인 줄 알았으면 건드리지도 않았죠, 할더는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그러자 쥬다스는 허공에 타오르는 불새를 하나 만들어냈다.

어둠을 밝히는 불새의 날갯짓에 할더가 후드를 뒤집어쓰며 중얼거렸다.

“아, 이런. 곱게 보내주실 생각은 없으신가 보죠.”

대답 대신 타오르는 불새가 그가 서 있던 자리로 돌진했다.

콰앙!

자비 없이 폭발하는 불기둥을 간발의 차로 피해낸 할더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큭.”

물러설 새도 주지 않고 사방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빠져나가려 할수록 몸이 불타 사라지게 되는 ‘불의 감옥’이었다.

꼼짝없이 그 안에 갇혀 버린 할더를 향해 쥬다스가 천천히 다가섰다.

“그래. 너 역시 다른 사람과 타협할 생각은 없나 보구나.”

허공에서 눈 결정을 흩뿌리며 생성된 얼음검이 철컥 그의 손에 잡혔다.

“할더.”

“…….”

할더는 제 목에 맞닿아 피를 머금고 있는 날카로운 얼음검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검신에 새겨진 빛나는 결정 문양과 날카로운 칼날, 잠깐 사이 물의 힘을 빌려 만들어낸 검치곤 정교한 구성이었다.

‘이것이 루바르잔의 황태자. 이상하다, 분명 만난 적이 없는데.’

할더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령술을 사용함에 있어서 프리드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그로서는 지금의 육체가 죽으면 그대로 끝이었다.

생기를 흡수하는 사령술사의 특징상 늙지는 않았어도 죽음만큼은 피할 수 없다.

죽은 그의 시신을 프리드가 사령술로 되살리는 일이야 가능하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페널티가 너무 컸다.

따라서 지금 검에 베인다면 끝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할더는 덤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곤란하네. 이건 완전히 자충수네요.”

생전 처음 보는 깨끗한 금안이 얼음검처럼 시리게 그를 비추었다.

“한 수만 봐주시면 안 됩니까? 저 지금 죽으면 정말 곤란한데요.”

쥬다스는 답하지 않고 검을 휙 들어 올렸다.

덤덤하게 그를 올려다보던 할더가 한숨과 함께 미리 포기하고 눈을 감던 순간이었다.

쩌엉!

곁을 경호하던 에단이 나서서 날아온 단검을 쳐 냈다.

단검은 가느다란 실에 연결되어 있어 다시 본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그사이 탁, 유연한 몸놀림으로 할더의 곁에 내려선 습격자는 사납게 쥬다스를 노려보았다.

짧은 스커트에 검은 구두, 전체적으로 매혹적인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인상이었다.

어깨선에서 단정하게 정돈한 코코아색 단발머리가 부드럽게 찰랑였다.

‘레이야.’

오랜 추억 속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소녀를 알아본 쥬다스가 작게 탄식했다.

전부 한때 가장 소중한 동료이자 가족 같던 아이들이었다.

예측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긴 했지만 이대로 그들을 놓칠 수는 없다.

그리 여긴 쥬다스가 정령의 힘을 움직이려던 찰나, 별안간 뒤쪽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끄아아!”

“사, 살려줘!”

비명의 주체는 제물로 모아두었던 사람들이었다.

근처에 숨어 있던 사령들이 일제히 제물에 달려들어 그들을 뜯어먹기 시작한 것이다.

“……!”

쥬다스는 황급히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눈앞의 적도 중요했지만 잔혹하게 사령의 제물로 먹혀 가는 사람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다른 기사단원들도 즉시 투입하여 사령들을 상대하기 시작했지만 놈들을 해치우는 것과 달리 인간에게 달라붙은 사령을 안전하게 떼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명과 그 원흉을 제거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우선인가를 따졌을 때, 쥬다스는 전자를 택했다.

그가 다루는 4속성 정령왕의 힘은 곧장 방향을 돌려 사람들을 보호했다.

그 짧은 사이에 레이야는 할더를 품에 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등가죽과 옷자락을 찢고 까만 뼈와 피막으로 구성된 날개가 우드득 자라났다.

펄럭!

그녀의 등을 따라 돋아난 검은 박쥐 날개가 음산하게 바람을 갈랐다.

날개에서 흘러나온 피가 섞인 끈적한 액체가 투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끈거리는 검은 날개를 사용해 살짝 허공에 떠오른 그녀는 붙잡을 새도 없이 그대로 낙하하여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져 버렸다.

사령들이 사용하는 그림자 공간이동술이었다.

사령이 전부 사라진 지하공간에선 피 냄새와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만 가득했다.

“전하.”

“……우리도 일단 이곳에서 나가자꾸나. 치료가 필요한 이도 많아 보이니 말이다.”

잠시 할더와 레이야가 사라진 그림자를 응시하던 쥬다스는 곧장 발길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부상자들의 치료가 시급했다.

치료를 받던 중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린 바이칼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팔다리를 뜯어 먹히거나 산 채로 가슴이 꿰뚫린 자들도 있었다.

부상자와 구조자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온 일행은 다시 오아시스 옆 휴게소로 돌아갔다.

납치되었던 사람들의 신상을 조사해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는 건 조금 나중 문제였다.

일단 공포에 질린 그들을 진정시키고 상처를 돌보아주는 게 급선무다.

그리 명한 쥬다스는 홀로 자리를 빠져나와 거친 모래언덕을 올랐다.

휴게소가 내려다보이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이렇게라도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자 함이었다.

슬슬 어둡던 하늘에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막 태어난 모래바람이 그를 한 차례 휘감고 지나쳐 갔다.

「이그레트.」

유니가 불안한 얼굴로 그의 볼을 쓸었다.

감정을 공유하는 그들에게 있어 괜찮냐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정령들은 그저 언제나처럼 조용히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남긴 후회들이 ‘이그레트’가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세상에 남아 있어.”

「…….」

“이제와 다시 죽는다 할지라도.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쥬다스는 깨달았다.

그가 남긴 후회는 하나가 아니었다.

작은 불씨인 줄 알았던 것이 마른 나무에 옮겨 붙고, 또 옮겨 붙어 이내 큰 산을 모조리 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분노? 슬픔? 아니, 그런 것보다는.’

그저 두려웠다.

작품 후기

* By. 공든탑

초콜렛 데이 잘 보내셨나요? ㅎ

저는 백화점에서 40% 세일을 하길래 두통이나!!!.....사서 먹었습니다. 아직 남았어요. 헤헤. 맛있습니다, 초코...

....맛있는데 왜 눈물이 흐르지.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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