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ret

Chapter 19. Wishes

눈 깜짝할 새 공터의 중앙으로 달려간 백호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멈춰 섰다.

망연히 고개를 들자 푸른 눈동자에 보라색 자수정이 가득 비쳤다.

「어째서.」

백호의 뒤를 따라 달려온 일행이 굳은 눈으로 눈앞의 장관을 바라보았다.

“……!”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이게 대체?”

동굴 중앙에 있는 건 그들이 지금껏 본 자수정 중 가장 거대한 자수정이었다.

역동적으로 천장까지 치솟아 오른 자수정은 길고 구불구불 이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마치 얼음에 갇힌 단풍잎처럼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거대한 용이 비쳤다.

「‘동면’이야.」

바람의 정령이 슬픈 어조로 계약자에게 속삭였다.

「흔하진 않지만 알 수 있어.」

금방이라도 자수정을 깨뜨리고 포효할 듯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청룡을 가둔 건 본래부터 보랏빛 자수정이 아니라 정령의 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명한 정기(精氣)다.

정령의 실체를 구성하는 생명에너지인 이 정기는 밖으로 뿜어져 나온 순간 얼음보다 차갑고 촛농보다 빨리 굳는다.

유니는 눈을 질끈 감으며 쥬다스의 옷자락을 끌어안았다.

「‘동면’은…… 정령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결수단인걸.」

본래는 시리도록 파랬을 비늘을 붉게 물들인 채, 청룡은 스스로 자신을 가두었다.

‘사령에 잠식당하고 있었구나.’

비늘색이 변했다는 건 폭주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붉음을 지나 검게 물드는 순간 청룡은 완벽히 사령으로 변질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자존심 강한 사방신수의 일원인 청룡이다. 그는 사령에게 억지로 잠식당해 타락하느니 제 손으로 눈을 감는 걸 택했다.

한 번 체내의 정기를 폭발시켜 동면에 들어간 정령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

정말 그대로 보석처럼 굳어져 소멸도 하지 못하고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종유석처럼 매달린 자수정은 전부 지옥 같은 폭주의 흔적이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미치기 직전까지 토혈하고 몸부림치다 스스로 목을 매단 것과 같았다. 핏자국처럼 번진 자수정들이 사방에서 위험스레 반짝였다.

백호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에 아연히 자리에 서 있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뜻이었다냥?」

“백호.”

서윤이 주저앉은 작은 호랑이 곁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백호의 머리통 위로 두터운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따뜻한 체온을 느낀 백호가 코를 씰룩거렸다.

「회복이라는 게…….」

“예, 아니었습니다.”

「저건 동면이잖냥.」

“미안합니다.”

「서윤!」

백호가 앞발로 서윤의 손바닥을 탁 밀어냈다. 그 아래 드러난 푸른 눈동자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있었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그리고 지켜드리지 못해서.”

당신들은 늘 우리를 지켜줬는데. 서윤은 백호의 앞에 무릎 꿇은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정말 미안합니다.”

고개 숙인 왕 곁으로 작은 그림자가 함께 무릎을 땅에 대었다. 그리곤 울고 있는 새끼 호랑이를 살며시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냐아아 냐앙!

토닥이는 손길에 백호는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동료들이 사령에게 잠식되었다면 단칼에 죽이라던 그였다.

그래도 괜찮겠냐는 물음에 억지로 조종당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라 대답했다.

그것도 백호와 가장 사이가 나쁜 청룡이다. 그런데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렇게 비참하게 눈을 감을 줄은 몰랐다냥. 뻔뻔한 청룡 자식이 이 따위로 엉망진창 당해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다냥.」

“그래.”

「당연히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냥. 다른 녀석도 아니고 무려 청룡이잖냥!」

“그랬구나.”

쥬다스는 조금 진정된 백호를 바닥에 내려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거대한 자수정에 갇혀 있는 청룡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동면에 들어간 정령을 되돌릴 방법은 없어.”

「알고 있다냥…….」

“하지만.”

단단한 자수정 위에 살짝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쥬다스는 냉기에도 아랑곳 않고 살짝 눈을 감았다.

“정령의 소망은 곧 계약자의 소망을 따른다.”

정령은 계약할 때마다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받는다. 심지어 그 외형조차 술사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듯 변화한다. 특히 친화력이 강한 정령술사일수록 그 소망은 절대적이다.

지금 자연계 정령왕들에게 오로지 이그레트의 의지만이 절대적이듯.

뒤늦게 쥬다스가 하려는 일을 눈치챈 서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가, 설마 네가……!”

“제가 사방신수와 계약할 자질이 있는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만일 가능하다면 허하시겠습니까, 외숙?”

쥬다스는 자수정에 손바닥을 맞댄 채 서윤에게 마지막 결정권을 넘겼다.

모른다곤 했지만 사실상 모든 정령은 그와의 계약을 염원했다. 다른 정령들은 청룡이라고 비단 다를 바 없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신분이다. 쥬다스가 아무리 하윤 공주의 아들이라 한들, 그는 현재 루바르잔 제국의 황태자였다.

만일 그가 청룡과의 계약에 성공한다면 대대손손 해동왕가의 핏줄과 계약하며 해동을 수호하던 사방신수 중 하나를 루바르잔에 보내버리는 격이 된다.

해동의 임금으로서는 할 수 없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서윤은 흔들리는 눈으로 쥬다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고고히 빛을 발하는 은빛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흔들리지 않는 어깨와 백호를 다독이던 다정한 손. 그 손은 이제 스스로 눈을 감아버린 청룡에게 닿아 있었다.

“…….”

잠시 침묵하던 서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매달렸다.

“하…….”

그는 작게 어깨를 들썩이다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하다니, 과한 욕심이로다.”

모두의 시선이 서윤에게로 향했다. 그는 뚝 웃음을 그치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신수 청룡을 잃었지. 그러므로 더 이상 그는 해동의 수호신이 아니다.”

외숙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으며 쥬다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부디 할 수만 있다면, 그를 구해다오.”

해동의 임금은 진정으로 청룡을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청룡을 구할 수 있는 자가 하윤의 아이라면.

“나는 널 믿는단다. 쥬다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간 주지 못했던 신뢰를 주리라. 서윤은 굳은 결심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 진심을 받아들인 쥬다스는 고개를 들어 청룡을 바라보았다.

「이그레트.」

녹색 바람이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다른 정령에게 너를 내어주는 건.」

「솔직히 마음에 안 들지만요.」

파앗!

토네이도처럼 몰아닥친 바람에 의해 그와 청룡의 모습이 다른 이들의 시야에서 차단되었다.

성왕과 루바르잔 측 수하들은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뒤로 물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백호마저도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바람의 장막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오로지 쥬다스 뿐이다. 모습과 소리가 모두 완벽히 차단되며, 설령 안에서 폭탄이 터져도 밖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다.

“이런, 다들 다른 정령을 원치 않는 모양이구나.”

「무지무지 싫다요!」

「으응. 그래도 당신이 간절히 바란다면 막지 않을게요.」

자연계 정령들은 꽤나 날이 서 있었다.

같은 계열의 동급 정령왕들끼리는 큰 경쟁심 없이 사이좋게 계약을 공유했다지만 이번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계약자의 바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해야 했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그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쥬다스는 난처한 미소와 함께 그들을 달랬다.

“그리 오래 지속할 계약은 아니니 진정하렴.”

「힝. 그치마안.」

“무엇보다 이 계약의 목적은 청룡을 되살리는 데에 있으니 말이다.”

이미 자연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에게 청룡의 힘까지는 필요치 않다.

힘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가지고 있다. 그래서 쥬다스는 청룡이 기력을 회복하고 사령의 위협이 사라져 안전하다 판단이 될 때쯤 자연스레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었다.

우웅!

그의 손바닥과 맞닿아 있는 자수정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너는 이 나라를 정말로 사랑했기에 이런 선택을 한 거겠지.’

쥬다스는 그 상태로 잠든 정령을 향해 가만히 말을 걸었다.

“이제 괜찮아.”

「…….」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던 청룡의 의식이 꿈틀거렸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잘 버텨왔어. 이제 혼자서 애쓸 필요 없단다.”

그 순간, 자수정 안에 갇혀 있던 청룡이 눈을 번쩍 떴다.

몸은 여전히 갇힌 채로 길게 찢어진 눈알만 하얗게 빛났다.

「나를…… 찾은 이……. 누구인가.」

“이그레트.”

쥬다스는 정령과의 계약에서만큼은 옛 이름을 사용했다.

전생이라고 해서 잊어야 한다거나 지워 버려야 할 기억은 아니다.

오히려 전생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쥬다스는 정령들로부터 그 이름으로 불리는 편이 더 편했다.

마찬가지로 정령 간 소통의 통일화를 위해서라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의 이름을 들은 청룡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의…… 이름은?」

이는 계약 수락이나 다름없는 질문이다.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정령은 술사에게로 귀속된다.

쥬다스는 하얗게 빛나는 청룡의 눈을 응시한 후 입을 열었다.

“가야.”

「계약자 ‘이그레트’, 계약명은 ‘가야’. 계약은 성립되었다.」

쩌엉!

계약을 알리는 선언이 끝나자마자 자수정은 폭발하듯 산산조각 나 부서졌다. 길고도 거대한 동양계 용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잔해물만 남았다.

주변을 감싸던 정령의 기운이 흩어지면서 그들을 가려주던 녹색 바람도 사르르 흩어져 버렸다.

밖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반색하여 그에게 달려왔다.

「청룡은? 그 자식 어디로 갔다냥?」

백호가 조각난 자수정 사이를 헤집으며 물었다.

「기운은 아직 느껴지는데. 왜 보이질 않는다냥?」

“시끄러워.”

「냥?」

자수정에 코를 킁킁거리고 있던 백호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말이 많은 건 여전하구나, 빌어먹을 야옹아.”

「……청룡?」

“뭐. 왜.”

청룡은 백호처럼 동물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형을 취하고 있었다.

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양계 남성으로 건장한 체격에 파란 도포를 둘렀으며 머리는 검고 눈만 백호와 똑같이 푸르게 빛났다.

정령은 계약과 동시에 계약자가 바라는 소망을 실체에 반영한다. 따라서 동물계 정령인 청룡도 예전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백호는 띠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청룡을 향해 우물쭈물 물었다.

「너……. 성격이 좀 변한 것 같다냥?」

“아아. 계약했으니까.”

백호의 시선이 귀찮다는 투로 짤막하게 대꾸하는 청룡에게서 스르르 그 옆으로 옮겨갔다.

청룡과 막 계약을 마친 쥬다스가 넓적한 자수정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 담긴 맹렬한 의문을 알아차린 그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속을 알 수 없으면 대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솔직했으면 해서.”

「하긴. 넌 언제나 솔직한 성향을 좋아했지.」

유니가 묘한 표정으로 쥬다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면 자연계 정령들도 모두 단순한 성격을 취하고 있었다.

계약을 맺고 나면 굳이 말로 소통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지만, 그는 명확하고 분명한 소통이 이뤄지길 원했다.

그간 해동 왕족들은 대대로 사방신수와 계약을 이어오면서 그들이 가진 본래 성격과 이미지를 고착화했다.

선대부터 보고 들어온 전례가 있으니 자연히 큰 변화 없이 성격이 유지되어 온 것이다.

그렇지만 쥬다스는 이전의 청룡을 본 적도 없고, 따로 전해 들은 적도 없으니 자유롭게 청룡의 새 이미지를 구현해 냈다.

작품 후기

* By. 공든탑

청룡을 죽이지 않은 건 결코 제가 용덕후라서가 아닙니다....ㅎ..

음, 사실 원래 청룡의 이름후보엔 '이오'도 있었습니다. 아쉽네요.

야쿠르트 Vs 이오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는 반쯤 농입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