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촉으로부터 몇 시간 전.

‘제국의 1황자라…….’

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곧 오늘 있을 접촉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다른 상단을 비밀리에 키워 주어서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려고 할 정도면 필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겠지?’

실제로 근래 1황자의 명성은 제국 내부에서 제법 높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 쪽은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겠지.’

그가 황자 측과 주고받은 것은 아무리 손익을 계산해 봐도 반반이었다.

황자가 원하는 것은 라이언 상단의 몫을 빼앗는 것, 자신은 제국 북부에서 기반을 넓히는 것.

현재까지 양측이 크게 서로에게 빚진 것은 없었다.

만만치 않은 인물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신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절대적인 자신이 있다.

그러나 막상 황자의 첫마디를 듣는 순간 남자는 자신의 생각이 오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그 유명한 만병왕의 사대 무문인 제갈 세가의 사람들을 보게 되어 영광이오!”

“……!?”

남자는 순간 십 년을 연마한 부동심이 흔들리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어떻게 이 황자가 자신들의 배후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바다 건너 환에서도 청룡 상단 뒤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만한 세력은, 그들의 본가와 비교할 만한 힘을 지닌 단체들 밖에 없다.

“저희의 동방에서의 기반까지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역시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자신의 말을 보란 듯이 대뜸 되받아칠 정도라면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온 것이리라.

‘숨겨 봐야 별 소용없겠지.’

남자는 평정을 가장하며 유리우스와 마주앉았다.

“마레우스 님께 말씀드린 대로 제가 이 청룡 상단을 맡고 있는 제갈건이라고 합니다. 1황자님을 뵙게 되어 다시 한 번 영광입니다.”

‘이것 봐라?’

유리우스 또한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적지 않게 당황한 상태였다. 이유는 바로 상대의 스탯이었다.

‘스탯창!’

[제갈건]

직업: 창술사, 상인, 교관

근력A 순발력S 지력A 정신력A 포스적성A 포스A+

성향: 가족애, 충직

[특성]

창술(S+)

청룡의 숨결 - 플레이어의 유산 중 하나입니다. 익히면 사용자의 숙련도에 따라 순발력과 포스에 추가적인 보정을 받습니다. 플레이어의 유산에 따른 고유의 능력은 익히셔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띠링!”

[플레이어의 유산을 발견하셨습니다.]

[도움말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됩니다. 추가된 항목: 이청문]

[유산을 수집하시면 업적이 상승합니다.]

‘만병왕에 관한 내용은 대충 예상했어.’

물론 유리우스는 진즉에 이 청룡 상단이 만병왕의 무문을 이은 곳인 것을 알았기에 유산 자체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놀란 것은 이 청룡 상단주라고 자칭한 제갈건이라는 남자의 스탯이다.

‘초인은 아니로군. 하지만 순수 전투 능력만 치면 그렇게 차이가 나는 무인은 아닐 것이다.’

몇 개월 전 디오스 공작과 수련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내용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 말은 굳이 초인의 경지에 든 무인이 아니어도 강자들은 많다는 소리도 되는구려.”

“그렇습니다.”

플레이어의 유산을 물려받은 탓일까? 이 제갈건이라는 남자는 전생에는 실력을 제대로 볼 기회는 없었지만 대단한 수준의 무인이었던 것이다.

‘이자는 대륙에 파견된 사람일 뿐일 텐데.’

아마 이 남자의 본가가 있을 환제국에는 이 정도 무인이 더 존재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최고 책임자도 아닌 사람이 이 정도라면 어쩌면 초인급의 무인도 있을지도 모른다.

‘어지간한 조건이 아니면 이청문의 유산을 가져오기는 힘들겠군. 무력으로 빼앗기도 거의 불가능해 보여.’

유리우스가 이번 청룡 상단과의 접촉을 하려 한 이유는 우선은 플레이어의 유산이었다. 자신이 지금 확실하게 출처를 알 만한 곳은 청룡 상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유산에 관한 퀘스트를 얻기 전부터 세웠던 계획으로 북부에서 청룡 상단을 더 키워서 자신의 확실한 거래처이자 자금줄로 만들 계획.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말이나 꺼내 봐야겠군.’

“내가 청룡 상단과 거래했던 내용들은 모두 기대 이상으로 완수가 된 것으로 알고 있소.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맺길 바라오.”

“과찬이십니다. 황자 전하의 은혜로 본가 또한 많은 수혜를 보았지요.”

‘제갈건이 아예 본가라고 말하는 것을 봐서는 제대로 협상할 마음이 든 모양이군.’

이건 이제부터 청룡 상단과의 협상이 아니라 환에 있는 사대 무문 중 하나인 제갈 세가와의 거래라고 본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유리우스는 슬슬 간보기는 끝났다고 느꼈다.

‘어설픈 탐색은 이제 집어치우고!’

“청룡 상단이 나를 몇 년 전부터 이 테이블에 꽤 앉히고 싶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부터 알 수 있소?”

유리우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더 이상의 방심은 없다.’

제갈건 또한 속으로 긴장하면서 본론을 꺼내 놓았다.

“본가는 사실 요 근래부터 서대륙으로 근거지를 옮길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호오.”

‘여기까지는 전생과 똑같군.’

그가 청룡 상단과 관계를 맺게 된 것도 그 이유가 크다.

청룡 상단은 북부에 안정적으로 가문의 기반을 옮겨 오고, 황제인 자신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라이언 상단을 대신해 그들의 자금 지원을 받는다.

왜 플레이어의 유산을 이어받은 사대 무문씩이나 되는 곳이 타 대륙에서 백년 넘게 쌓아 놓은 기반을 통째로 들고 오려는 것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무튼 전생의 그는 그 이유를 듣지 못하고 실패했다.

‘찔러 보기라도 해 볼까?’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죄송합니다. 그것은 제 권한으로는 힘든 일이어서…….”

‘역시 안 가르쳐 주는군?’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좋소. 아무튼 그것 말인데, 그래서 이쪽에게 필요한 것이 있겠소?”

“저희 측에서는 딱히 요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을 하는 제갈건의 어조에는 강한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어차피 이제 황자의 도움이 없이도 청룡 상단은 북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우리가 든든한 관계임을 확인하고 싶어, 굳이 날 부른 것이겠구려.”

“그런 이유로 감히 제국의 황자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한 것은 송구합니다.”

유리우스는 속으로 웃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우리대로 잘할 테니 방해만 하지 말라? 그리고 지원해 주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은 해 주겠다 이거로군?’

유리우스가 이번 생애에서 북부 도로 공사의 시기를 앞당긴 덕택에 그들은 이미 상당한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굳이 더 이상 그의 도움을 안 받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보인다.

‘하지만 이쪽은 그쪽에 원하는 것이 많거든?’

“그건 상관없는데, 나는 청룡 상단 쪽에 요구하고 싶은 것이 제법 많소.”

“황자께서는 본가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말은 그렇지만 물론 그는 그럴 마음이 없다.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터무니없는 조건이면 국물도 없습니다.’

“일단 요즘 우리 제국이 북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알 것이오.”

유리우스는 생각하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든다.

“그 북부 개발에서 나오는 이득의 지분을 상당 부분 그쪽에 양도하겠소. 그게 내가 제시할 거래요.”

“개발이라 하시면 구체적으로 무얼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제갈건은 의아하다는 듯 물어본다.

이미 도로 공사는 거의 완료되었다.

북부에 도시들이 점차 들어설 것이고 물류의 이동도 활발해질 것이다. 그런 것은 굳이 황자가 언급하지 않아도 자신들 역시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 아닌가?

“이건 기밀인데 말이오.”

유리우스의 말을 듣고 난 그는 처음으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그게 북부 산맥에 존재한단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오. 증명할 수는 없지만 조만간 북부 개발이 시작되면 사실이 밝혀지겠지.”

“허…….”

제갈건은 고민에 잠겼다.

이번 황자가 제시한 조건이 사실이라면 이 거래는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건수였다. 그의 권한으로만 해결될 일이 아닐 정도.

그러다 그는 문득 의문에 잠긴다. 이 정도 조건을 걸면서 이 1황자가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저희에겐 나쁠 것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일이 크다 보니 시일을 주셔야 할 것 같군요.”

제갈건 또한 궁금한 점을 물어본다.

“어떤 부탁을 하실지 제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유리우스는 씩 웃는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네 가문이 가지고 있는 ‘무제의 비보’일세.”

쨍그랑!

그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져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제갈건의 얼굴에 처음으로 평정심이 사라졌다.

“상단주님!”

그때 처음으로 뒤에 시립해 있던 여자가 그에게 다가와 깨진 찻잔을 정리한다.

“흠……. 제가 잠시 실례를 했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제갈건은 의혹의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유리우스를 바라본다.

‘무제의 비보.’ 이것은 이 서대륙에서는 만병왕이라고 불리고, 동방에서는 만병무제라고 불렸던 전설적인 무인 이청문의 유산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무제가 남긴 그들 가문의 유산을 내놓으라는 소리다.

“황자님, 아무리 이 거래가 크다고 하지만 그 말씀은 본가의 밑천을 내놓으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아아, 내가 말을 잘못했구려.”

유리우스는 능청스럽게 말을 정정한다.

“나는 플레이어 만병왕의 유산을 나에게 아예 달라는 것이 아닐세.”

“……!?”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제갈건이 잠시 침묵하자 유리우스는 말을 재개한다.

“나는 전부터 내 선조들인 플레이어들의 행적에 대해 관심이 많았네. 개인적으로 연구도 하고 있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래, 거래가 성사되었을 때 자네들은 나에게 그 비보를 잠시 빌려주기만 하면 돼. 내가 그것을 가져간다는 소리가 아닐세.”

유리우스는 짐짓 심기가 상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내가 황자라 해도 그리 도둑놈으로 보였나? 이 대륙에도 명문 무가는 많아. 무가의 비기를 통째로 내놓으라니, 그런 요구는 아무래도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그 말에도 제갈건은 의혹의 눈초리로 그를 본다.

“…….”

“조건이 너무 작다거나, 수상하다고 생각하는군?”

유리우스는 다시 쐐기를 박는다.

“정 그러면, 자네들의 입회하에 그것을 봐도 좋네. 내가 알기로 동방에서는 비급이라고 불리는 형태로 무가의 비기가 전해진다고 들었어.”

“황자님의 요구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쪽에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요. 거기에…….”

“내가 처음에 건 조건이 사실인지 확인도 필요하겠지.”

유리우스는 말을 끊으며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차피 나는 북부 개발 때문에 적어도 몇 년은 북부에 체류할 계획이네. 언제든지 연락을 받을 수 있지.”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몸을 돌리며 이야기를 마친다.

“앞으로도 많은 협력을 부탁한다는 것은 내 이름으로 보장해 주겠네.”

제갈건은 일어서더니 급히 고개를 숙인다.

“거래의 조건에 대해서는 본가에 연락을 보내 꼭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유리우스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그 방을 나간다.

“다음에는 진짜 상단주를 불러 오게. 솔직히 최고 책임자도 아닌 자를 계속 대리인으로 앉혀 놓은 것은 꽤 불쾌하군.”

제갈건은 순간 얼빠진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본가의 배후뿐만 아니라 그것까지 눈치 챘단 말인가?’

‘그야, 진짜 상단주를 내가 만나 봤으니 당연히 알지. 이 친구야.’

유리우스는 속으로 웃으며 기분 좋게 건물 밖으로 나선다.

그가 떠나고 잠시 뒤.

“건, 오늘은 너 답지 않게 실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지?”

“면목이 없습니다. 아가씨.”

상단주를 자처했던 제갈건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대상은 처음부터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시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청룡 상단의 책임자다.

“하지만 책임은 묻지 않겠어. 오늘 내용은 나라도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거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턱을 괴면서 생각에 잠긴다.

“제국 1황자 유리우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