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의 돌격 때 방패로 세운 부족들의 불만이 너무 심해지는 것 같소.”

“어쩔 수 없는 희생이지 않소? 잘 다독여 보시오.”

요새 군다르와 드미트리의 주요 화제는 부족간의 화합 문제였다. 어떻게 모아 놓기는 했는데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군다르는 북부의 전통대로 결투를 통해 지휘권을 확보한 것도 아니고 위협을 느낀 산맥 초입의 부족들을 세력을 이용해 통합한 것이니 위화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제국과의 소규모 교전이 계속되자 이 불만은 도처에서 터져 나온다.

“우리 부족의 전사 대부분이 전사했소. 아무리 대족장이라고 하지만 너무한 것 아니오!”

“대족장 옆에 믿기지 않는 무력을 가진 이방인들도 있던데, 왜 그들을 쓰지 않고 우리들의 희생을 강요하는지, 원…….”

군다르는 침통한 표정으로 드미트리를 본다.

“당신들이 조금 부족들의 사정도 헤아려 주면…….”

“그건 불가능하지!”

드미트리는 단호하게 끊는다. 그는 애초에 군다르를 단순 장기 말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데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무리 우리라도 초인을 막으면서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것인 줄 아나!’

이번에 대공이 투입한 그림자는 총 4개 분대, 이 중 2개 분대만 투입해도 초인 한 명을 완벽하게 막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붙들어 놓는 것은 가능하다.

‘휴식하는 로테이션이 깨지면 이쪽도 안데르손 후작을 막을 인원이 없어진다.’

따라서 그들은 두 개 분대씩 돌아가면서 초인인 안데르손 후작을 막고 있다.

“당신 사정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참아 주시오. 우리도 여유가 없소!”

군다르 또한 할 말이 없다. 이 관계는 어찌되었건 그들이 갑이었으니까.

‘뭐 그래도 당분간은 큰 균열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괜찮겠지.’

그날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균열을 기다릴 것도 없이 붕괴는 이미 시작되었다.

* * *

참모 중 한 명이 말을 달리며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후작에게 질문한다.

“정말 전하가 직접 오신 것이 맞긴 한 겁니까?”

“내가 아무리 피곤하다 해도 아직 헛것을 볼 정도는 아니야.”

안데르손 후작도 일단 새벽에 병력을 이끌고 나오긴 했는데 찝찝한 것은 마찬가지다.

참모는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의견을 낸다.

“하지만 이번 기습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아무리 황자 전하라고 해도…….”

“흠…….”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후작도 상당한 고민을 거쳐야 했다. 일단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유리우스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결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단은 유리우스를 믿어 보자!’

이것이 후작의 최종 판단이다. 그가 그동안 북부에서 쌓은 신뢰가 결코 낮지 않기에 이루어진 결정이다.

‘또 그 지겨운 놈들이랑 한판 벌여야겠군.’

후작은 기사단을 중심으로 기습을 준비한다.

“돌격하라!”

“히히히힝!”

기마의 소리를 기점으로 제국군의 야습이 시작되었다.

* * *

바스락!

야심한 새벽 군다르는 잠에서 번쩍 깬다. 그 또한 나름 산맥 초입에서는 뛰어난 전사다. 진지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감지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야!”

“대족장님!”

헐레벌떡 그의 심복들이 뛰어 들어오더니 상황을 보고한다.

“이방인 놈들의 습격입니다. 빨리 응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야습이라고?”

군다르는 순간 의문에 빠진다. 그들이 대비를 하지 않은 갑작스런 기습이라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진영을 충분히 갖추고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는 곳에 야습을 해 봐야 별 소용은 없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찝찝함을 느꼈다. 적도 바보가 아니고 소득도 없는데 갑자기 쳐들어올 리가 있나.

“그들을 불러!”

역시 막 잠에서 깬 드미트리를 비롯한 그림자들이 급히 군다르의 막사 쪽으로 온다.

“야습이라고 하던데 무슨 일이요?”

“나도 잘 모르겠소. 아무튼 정찰한 전사의 보고에 의하면 거의 전면전으로 갈 규모인데…….”

“……!”

드미트리 또한 아연한 표정이다. 안데르손 후작이 그들이랑 공멸할 각오라도 했단 말인가?

“아무튼 우리는 적의 기사단을 막으러 가겠소. 그쪽은 전사들을 수습해서 방어만 잘 해 주시오.”

“알겠소.”

‘대체 무슨 일이지?’

군다르와 드미트리 두 공모자는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막사를 나온다.

* * *

채채챙!

이윽고 다시금 후작의 기사단과 드미트리를 비롯한 그림자들이 무기를 맞대기 시작한다.

‘이 늙은이가 왜 이 야밤에 갑자기 미친 짓을 하는 거야?’

‘황자 전하께서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셨길 바라야겠군.’

처음 기습으로 당황했던 것도 잠시 전선은 다시금 팽팽한 균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후작을 비롯한 기사단은 전사들이 막아서고 일반 병사마저 이민족들과 치열한 난전에 돌입한다.

“적들의 전사는 이방인들이 잘 막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지의 방어에도 문제는 없습니다.”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군다르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냥 막무가내로 들어온 기습이었나 보군.’

하지만 그 안도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산맥 쪽에서 들려온 함성이 그의 진지를 뒤흔든다.

“와아아아아!”

“대족장님! 산맥 내부의 부족으로 보이는 자들이 갑자기 기습을 해 왔습니다!”

“전선의 측면에도 못 보던 이방인의 부대가 출현했습니다!”

“뭐라고?”

군다르는 황급히 전선을 관찰하려고 따르는 전사들과 함께 뛰쳐나온다. 그러나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콰아아앙!

단단한 목재로 만들고 그 뒤에 무거운 바위 등을 쌓아 올려 보강한 진지의 뒷문이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린다.

“오랜만이군, 대족장!”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선두에서 누아다가 순식간에 진지를 부수고 뛰어든다. 그 뒤에 그가 모은 동맹 부족의 정예 전사들이 밀려든다.

“마… 막아라!”

군다르의 명령에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전사들과 병사들이 누아다의 돌진을 저지하려고 뛰어든다.

“귀찮은 놈들…….”

펑펑!

그가 귀찮다는 듯이 휘두르는 주먹질과 발길질에 걸리면 병사, 전사 할 것 없이 나동그라진다.

“모든 전사들은 저놈을 막아!”

그러나 단순한 전사의 수라면 산맥 초입의 부족을 규합한 군다르 쪽이 압도적이다. 인해전술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상황.

* * *

한편 유리우스가 있는 두 번째 공격로는 상당히 수월하게 풀려 가고 있다.

“돌파하라!”

유리우스 또한 기사를 동원해 단번에 목책을 깨부수고 진지로 파고든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군.’

촤악!

“크아아악!”

달려드는 전사 한 명을 가볍게 베어 버리며 유리우스는 적진 내부로 병사들을 이끌고 깊숙이 파고든다.

“전하의 예측대로 측면엔 뛰어난 전사도 없고 경계의 수준도 낮군요!”

“아마 정예들은 대다수가 후작을 상대하거나 대족장을 지키러 갔을 걸세!”

유리우스가 노린 것은 바로 측면 돌파였다. 그리고 정예가 빠진 틈을 타 그가 노리는 진정한 목적은!

‘이쯤에 있었을 터?’

“누구냐!”

서걱!

‘누구긴 누구겠어 개새끼들 때려잡으러 온 사람이지!’

무형 검으로 보초의 머리통을 단번에 날려 버린 유리우스는 신중한 표정으로 기사들에게 지시한다.

“일반 기사들은 두셋씩 조를 나누어 상대하게 아마 정상적인 몸 상태는 아니어도 상대가 보통 정예가 아니니!”

“알겠습니다.”

그들이 습격한 곳은 바로 대공의 그림자가 부상이나 체력 보존을 위해 쉬고 있는 분대였다.

‘대공의 비밀 세력을 이 기회에 최대한 처리해야 한다.’

어차피 적진을 붕괴시키는 역할은 누아다와 안데르손 후작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친다.

자신은 여기서 부상당해서 쉬고 있거나 예비 전력으로 남겨 둔 대공의 개들을 때려잡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부상당했다고 해도 대공의 비밀 세력인 그림자는 강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초인인 유리우스가 개입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

“크아아악!”

그의 반박귀진과 무형 검은 기습에는 최적의 위력을 발휘한다.

‘안데르손 후작같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초인이라면 진형을 갖춰서 막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아니지’

유리우스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다.

그림자들은 가뜩이나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닌데 북부의 기사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그의 무형 검이 기습적으로 파고 들어오니 견딜 재간이 있을 리가 없다.

‘어디서 이런 자들이 출현했지?’

‘드미트리 대장에게 알려야 해!’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울 리가 만무하다.

이윽고 그림자들은 속수무책으로 유리우스와 기사들에게 전멸당했다.

“희생자는?”

“기사는 전사 다섯 명 중상, 열 명가량입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크구려.”

“전하의 말씀대로 상대가 보통 실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보고하는 린필드를 보며 유리우스 또한 혀를 찬다.

‘역시 대공의 정예는 상대하기 힘들군. 후작이 애먹을 만해.’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애도할 시간이 없다.

“빠르게 후작의 본대로 합류해야겠소. 아마 비슷한 놈들이 후작을 애먹게 하고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유리우스의 별동대는 일직선으로 후작이 있는 최전선 방향으로 질주한다. 이미 우왕좌왕하고 있는 적병들은 허수아비와도 같다.

하지만 미처 적진을 절반도 돌파하기 전에 유리우스는 후작과 마주쳤다.

“유리우스 전하!”

“안데르손 후작!”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유리우스의 예상과는 달리 훨씬 빨리 마주쳤다.

‘후작도 대공의 개들이 가로막고 있었을 텐데?’

“일단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내가 전에 말했던 대로 군법을 어겨서 미안하오. 나중에 꼭 이 책임은 지도록 하리다.”

후작과 나란히 말을 몰며 유리우스는 본론을 꺼낸다.

“근데 내가 전장을 달려오면서 보니 이민족은 아닌 괴상한 실력자들이 많던데 그놈들이 후작을 막고 있던 것이 아니었소?”

“전하께서도 그놈들과 마주치신 모양이군요.”

후작은 놀랍다는 듯이 눈에 이채를 띄더니 설명을 해 준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저를 가로막더니 뒤편의 전황이 불리한 걸 알고 저와 기사들을 막는 것을 포기하고 귀신같이 도망치더군요.”

‘대공의 수하 중에도 상황 판단이 상당히 빠른 놈이 있는 모양이군.’

유리우스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상황이 글렀으니 철수한 모양이다.

‘아예 전멸시키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절반을 처리한 것만 해도 큰 소득이다.’

그는 사실 후작과 합류해서 나머지 놈들도 모조리 처리할 계획이었지만 철수했다니 별수 없는 노릇.

후작과 유리우스가 접촉할 무렵 후방의 싸움도 마무리되었는지 누아다가 그의 수하들을 이끌고 달려온다.

“야만족이다!”

“표식을 보시오! 그들은 적이 아닐세.”

유리우스가 달려오는 누아다를 보고 손을 들어 제지한다. 그는 분한 듯이 그를 보자마자 말을 내뱉는다.

“군다르 그자를 사로잡기 직전에 전에 말한 괴상한 이방인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놓쳐 버렸소. 면목이 없소이다.”

“너무 신경 쓸 것 없소. 이번에 치명타를 입힌 것만 해도 큰 소득이니. 동맹의 상황은 어떻소?”

“당신의 말대로 표식을 다니 적군의 구별은 잘 되더구려, 포로로 잡은 전사나 족장도 꽤 되오.”

누아다는 팔에 감은 노란 천을 내밀면서 이야기한다.

“피아식별 띠가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구려.”

이것은 그가 처음 기습을 논의할 때 나온 의견이었다. 그가 야습을 제안하자 누아다가 의문을 제기한다.

“밤에 기습은 효과적이지만 그러면 적들과 뒤섞일 때 우리와 다른 부족의 구분이 힘들지 않겠소?”

‘아!’

유리우스는 그때서야 전생과는 상황이 조금 다름을 알아챈다. 당연히 북부 이민족이 아군일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밤에 기습한다면 난전이 발생할 경우 같은 복식을 한 유리우스 동맹 쪽의 부족들과 군다르의 부족 간의 구분이 힘들어진다.

하지만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였다.

[도움말 – 피아식별을 열람합니다.]

[야간에 잘 띄는 색은 노란색, 하얀색 등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색대비라고 하며…….]

‘여전히 뒷말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노란색 띠를 두르면 된다 이거지?’

이번 습격에 참가하는 누아다의 동맹 부족들은 유리우스가 도움말로 열람한 정보에 따라 노란색의 띠를 어깨에 둘렀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대규모로 부딪치는 이상 어느 정도 희생은 각오해야 하지만 가능하면 피는 적게 흘려야 하니 말이오.”

그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야밤에 기습할 때 적군과 아군 구별이 되니 필요 없는 피를 안 흘려도 되고 군다르와 함께 재빨리 도망친 부족들을 제외하면 남은 부족들은 누아다의 무력을 보고 질려서 항복해 버린 자들이 반수가 넘는다.

“전하… 이들은?”

후작은 조심스럽게 유리우스의 기색을 살핀다.”

유리우스는 씩 웃으며 후작에게 설명을 시작한다.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구려? 내가 동맹을 맺은 자들이오.”

그리고 유리우스는 말을 돌린다.

“일단 이들이 동맹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면 되오. 전장의 수습부터 시작합시다.”

“알겠습니다.”

유리우스는 말을 달리면서 다음 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다. 사실 그는 군다르가 도망쳤을 때의 상황도 생각을 해 놓았다.

‘예상보다 대공이 수하들을 많이 보내 놓았으니 아무리 누아다라 해도 그들을 전부 뚫어 내긴 힘들었겠지.’

군다르를 따라 도망간 부족들도 상당하다. 하지만 그들이 이미 상당수의 부족들을 버려둔 채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군다르를 그전처럼 확실한 대족장으로 인정해 줄까?

여기서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다음 작전으로 가능하면 대공의 세력과 대족장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