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악!”

유리우스의 대답에도 여전히 울상을 짓고 있던 케인스의 뒤통수를 누군가 후려갈겼다.

“이놈이 황자 전하한테 이게 무슨 무례냐!”

“음?”

유리우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 전 부상자라고요! 거기에 전하가 보시는 앞이 아닙니까? 명색이 후계자인데 오히려 기를 살려 주셔야…….”

“이 멍청한 녀석이!”

퍽!

표정을 찡그린 그의 뒤통수를 다시 손바닥이 강타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케인스의 고개를 찍어 눌러서 강제로 허리를 굽히게 만들었다.

“전하! 못난 자식 놈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자식?”

유리우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부자의 다툼을 지켜보고 있었다. 케인스와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람은 머리가 희끗한 노령의 귀족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당대의 케인스 자작이란 말인가?’

“조금은 성격을 고쳤나 했더니 이것만 봐도 네 기사단 생활이 짐작이 간다! 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노귀족은 유리우스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절을 올렸다.

“1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저는 케인스 자작이라고 하지요. 이 못난 놈의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

유리우스는 살짝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현재 그의 위상이 높아도 자작 정도 작위를 가진 귀족이 대뜸 엎드려서 인사할 정도는 아니다.

그는 얼른 케인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네 아버지는 대체 왜 이러는 건가?’

“하하…….”

케인스는 겸연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급히 자작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로 감격에 겨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 답 없는 놈을 구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뭐요?”

* * *

발단은 몇 주 전이었다.

“형님! 이거 정말 수상합니다.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은데 저만 휴가라니요.”

“글쎄? 전하가 자네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임무를 맡기실 리가 있나? 그러면 진즉에 말씀이 있으셨겠지.”

“그렇긴 한데…….”

남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은 바로 케인스와 데반이었다.

둘은 나이가 비슷했고 나름 방황하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성격이 제법 맞았기에 어느새 호형호제 할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데반의 어조는 느긋했다.

“나는 오히려 자네가 부러운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하께서 처음부터 굉장히 관심을 가져주신 것 같은데 남들이 들으면 도리어 시기할 수도 있겠군.”

“형님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쨌거나 내가 듣기로는 그 계획은 수도 안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야. 자네를 아끼셔서 일부러 위험한 자리에서 빼주신 것일 수도 있지.”

“형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데반의 말에 수긍한 케인스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 고향은 수도에 비하면 깡촌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설마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는 표정에 약간 화색이 돌면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 바람에 마차 밖을 보고 있는 데반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는 암암리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부터는 길이 갈리는군? 나는 군단으로 복귀하겠네. 자네도 휴가 잘 즐기고 오게나.”

“형님도 편히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중간에 데반과 헤어진 케인스는 어느덧 고향 영지에 도착했다.

고향의 풍경이라고 해도 보이는 것이라곤 드넓게 펼쳐진 밀밭 밖에 없었지만 그는 오랜만에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시골 영지구만. 하지만 오랜만에 빈둥거릴 수 있겠어!’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케인스는 영지 중앙에 있는 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영지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이맘때쯤이면 한창 농사에 바쁠 시기인데 왜 영지민이 거의 안 보이지?’

성으로 향하는 도로 주변으로 펼쳐진 밭에는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모여서 축제라도 하나? 그럴 시기는 아닐 텐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는 성문으로 다가가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명색이 자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그가 돌아왔기 때문에 신속하게 마중이 나왔다.

성문이 열리더니 백발을 단정히 묶은 노기사가 반갑게 케인스를 맞이했다.

“도련님! 돌아오셨군요.”

“맥스 경, 오랜만이야.”

충성스러운 노기사 맥스 경은 어렸을 때부터 그를 잘 돌봐 주던 사람이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기사단에 들어간 뒤로 도련님의 활약은 모두 듣고 있습니다. 자작님께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셨지만 내심 흐뭇해하시는 것이 보이더군요.”

“아버지가? 그러고 보니 먼저 인사부터 드려야 하는데 어디 계시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케인스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인 자작은 상당히 엄격한 사람으로 부자간의 사이는 그리 살갑지 않았다.

거기에 그가 게을러지기 시작하면서 그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서신조차 주고받지 않게 되었다. 케인스가 기사단에 들어온 지도 몇 년이 흘렀지만 이제야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맥스 경은 살짝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실은 잠시 출타하셨습니다. 요새 영지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거든요.”

“그러고 보니 밖에도 사람이 없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케인스는 더욱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 영지에서 그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산 같은 큰 수입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이 조금 비옥할 뿐인 작은 영지에 무슨 사건이 터지겠는가?

“…….”

하지만 맥스 경은 그 질문에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실은…….”

쿠웅!

이윽고 그가 입을 열려고 하자 갑자기 성문이 내려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은 맥스 경은 말을 돌렸다.

“이 시간이면 자작님께서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인사를 드리러 가시죠.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 말에 케인스는 성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아버지 당대의 케인스 자작은 전직 중앙기사단 출신으로 공을 인정받아 말년에 작은 영지를 받게 된 특이한 케이스였다.

기사 출신답게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성 안으로 들어오던 자작은 아들인 케인스와 마주쳤다.

케인스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을 뵙습니다.”

“…….”

자작은 잠시 놀라는 것 같았지만 이내 냉랭한 표정을 짓더니 한동안 케인스를 바라보았다.

“수도에서 지내고 있을 네가 이런 촌구석까지 어쩐 일이냐?”

너무 차가운 말에 케인스는 순간 움찔했지만 휴가를 받아서 왔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 자작은 코웃음을 쳤다.

“흥! 게으른 버릇은 아직 못 고쳤나 보구나. 요새 제법 출세했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이 아비한테 자랑이라도 하러 왔느냐?”

아무리 아들이라지만 대뜸 시비를 거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라 케인스도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네 성격이 고쳐졌을 리는 없고… 황자 전하께 아부라도 잘해서 다행이구나.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가도록 해라. 네 얼굴은 보기도 싫으니!”

자작은 차가운 표정으로 일갈한 뒤 케인스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니, 저 노인네가 또 왜 저래!’

케인스는 울컥해서 당장이라도 따지려고 했지만 그를 급히 붙드는 손이 있었다. 바로 맥스 경이었다.

“왜 저러시는 거야?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

“휴우…….”

맥스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작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명령했지만 그는 자작과 케인스가 화해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었다.

“일단 도련님께서 쓰시던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서 이야기를 해 드리지요.”

잠시 뒤.

케인스는 자신의 방에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영지전?”

“그렇습니다. 말만 영지전이지 사실 강압에 가깝지요.”

맥스 경은 드물게 분개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근래에 근처에서 힘깨나 쓴다는 귀족 분들이 비밀리에 접촉을 해왔습니다.”

[우리 신 남부연합은 1황자의 횡포에 맞서서 제국의 질서를 지키려고 한다.

…(중략)…

그러니 케인스 자작에게도 협력을 청한다. 그 내용은…….]

근래 남부의 귀족들 사이에는 신 남부연합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가 설립되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남부의 귀족들을 하나로 모아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귀족들이라고 다 그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작님을 비롯한 근처의 영주 분들은 다 거절하셨지요. 하지만 그랬더니 그들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수도는 마침 귀족들의 시위로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어서 중앙에 중재를 요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신 남부 연합에 속한 귀족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꼬투리를 잡아 영지전을 신청해 영주들을 굴복시키거나 혹은 쫒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영지도 결투를 통한 대리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작님께서는 병사의 수가 워낙 적으니 피를 흘리기보다 그 편이 낫다고 판단하셨겠지요.”

케인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결투면 오히려 날 환영해 주셔야 하는 것 아냐? 이 영지에는 변변한 기사가 없을 텐데?”

자기가 말하기에는 조금 겸연쩍었지만 케인스는 근래 제법 명성을 얻은 상태였다. 그래 봐야 특별수련에서는 얻어터지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말이다.

맥스 경은 더욱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저도 실은 그 말씀을 드려 봤지만 자작께서 완고히 반대하셨습니다.”

“날 싫어하셔서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대리전을 치를 상대가 문제였지요.”

“……!?”

케인스는 한층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영주의 개인 기사가 실력이 높으면 얼마나 높다는 말인가?

“이번에 영지전을 신청해 온 사람은 근처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로렌스 백작입니다. 그는 이미 두 곳의 영지에서 결투를 치렀지요. 그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충격적이라니?”

“로렌스 백작 측에서 나온 기사가 상대 기사를 불과 십여 합만에 꺾어 버리더군요. 그 패배한 기사는 마스터급이었습니다.”

“…….”

케인스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 정도 실력의 기사가 어떻게 고작 백작의 밑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치밀히 준비된 계획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 그들에게 가담하면 될 텐데 왜 자작은 굳이 결투를 선택한 것일까?

그 질문에 맥스 경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자작님께서 도련님을 불러들이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데?”

“도련님께서 현재 황자 전하의 기사단에서 한 자리를 맡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작님께서는 도련님의 앞길을 생각해서 이런 선택을 하신 겁니다.”

“아!”

모든 것을 이해한 케인스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확실히 그의 아버지는 무뚝뚝하긴 했지만 방금 전처럼 대뜸 시비를 걸 사람은 아니었다.

맥스 경은 말을 이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셨지만 제가 말씀드렸듯이 자작님께서는 도련님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 이번에 매몰차게 대한 것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이윽고 케인스의 입이 열렸다.

“맥스 경.”

“네, 도련님.”

“그 망할 대리전은 언제 하는 거지?”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한편 케인스 자작가의 초라한 성과는 대비되는 상당히 화려한 성안.

남자는 살집이 오른 두툼한 손에 깍지를 끼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흠… 케인스 자작가의 영지는 별다른 수입원은 없어도 제법 비옥하다고 했지.’

그가 바로 이 주변에서 가장 큰 영지를 가졌다는 로렌스 백작이었다. 그 튼튼한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에도 상당히 연줄을 보유한 귀족이기도 했다.

근처에서 욕심으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귀족답게 가장 적극적으로 신 남부 연합 결성에 참여한 귀족들 중 하나인 그는 그 보답을 받아 주변의 귀족들을 흡수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흐흐… 얌전히 복종하면 아무 일도 없을 텐데 굳이 영지전을 받아들이다니 하늘에서 복이 굴러 들어온 게야.’

그렇게 싱글벙글하고 있던 그의 귀에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군?”

“헉! 오셨습니까?”

기겁한 로렌스 백작은 그 비대한 몸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놀라운 속도로 벌떡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은은한 두려움이 서린 그의 눈을 보고 들어온 남자는 피식 웃었다.

“다음 상대가 결정되었다고 해서 정보를 들으러 왔네.”

“헤헤… 솔직히 나설 차례가 있으실지 의문입니다. 기사라고 해봐야 영주를 비롯해서 다 늙어 빠진 자들밖에 없다고 들었거든요.”

“방심은 안 되네. 1황자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당연히 제대로 조사도 해왔지요!”

남자는 고작 삼십 대 중반 정도의 외견에 문장도 없는 평범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오십이 넘은 로렌스 백작은 그 젊은 기사의 말에 꼼짝도 못하고 비위만 맞추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남자야말로 이번 계획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맡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총책임자라고 봐도 무방했다.

“각하께서 와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쉿! 지금의 나는 평범한 자유기사일세. 말을 삼가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