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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Full Moon

제7장 만월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눈을 뜨렴. 깨어나 나를 보렴.]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더는 천천히 눈을 떴다.

따뜻한 불빛, 아늑한 공간.

눈에 들어온 것은 검고 긴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마녀의 얼굴이었다.

[의식은 깨어났구나.]

서른 전후로 보이는 하얀 얼굴의 미녀.

마녀는 검은 새의 깃털로 장식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마치 마녀의 상징이라는 듯이 챙이 넓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여긴······.”

[내 의식 세계란다. 네 몸은 지금 너무 무리한 탓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으니까. 의식만 깨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란다. 자, 내 손을 잡고 일어나렴.]

몽롱한 가운데 유더는 마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마찬가지로 마녀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코델리아를 볼 수 있었다.

“코델리아?”

“유더?”

[여기서도 서로부터 챙기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구나.]

마지막 마녀의 목소리는 두 사람 앞에 각기 자리한 마녀들이 아닌, 벽난로 앞에서 유유히 흔들리는 흔들의자 위에서 들려왔다.

이번에도 역시 마녀였다.

[자, 두 사람 모두 이리 와보렴. 난로 앞이 따뜻하단다.]

벽난로 앞의 마녀가 손짓하자 거짓말처럼 유더와 코델리아 앞에 있던 마녀들이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졌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반사적으로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내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자.’

마녀가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터이니.

엉거주춤 일어선 유더와 코델리아가 벽난로 앞에 서자 마녀 역시 흔들의자에서 일어섰다.

[일단··· 이야기를 좀 해야겠구나. 하지만 그 전에 미리 물을 테니 답해주렴. 내가 여기에 봉인된 이유는 알고 있니?]

마녀가 봉인된 이유.

은근히 기대에 찬 마녀의 눈빛에 유더는 모른 척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코델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이건 또 아는구나··· 알고 있구나······.]

대놓고 시무룩해진 마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더니 조금이지만 입술을 삐쭉였다.

마녀가 봉인된 이유.

미천한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악마들을 거꾸러트린 마녀의 존재는 마계 지옥의 다섯 대군주들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마녀는 다섯 대군주 가운데 하나인 타락의 군주 벨리알과 격돌하게 되었고, 대군주의 압도적인 힘에 처참한 패배를 맞이하고 말았다.

하지만 벨리알의 불길이 마녀의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직전, 다른 대군주 하나가 마녀의 영혼을 빼돌렸으니, 그가 바로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였다.

‘아스모데우스는 수많은 악마들을 거꾸러트린 마녀의 영혼이 다른 대군주들을 찌를 비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요긴하게 쓸 날까지 다른 대군주들로부터 마녀의 영혼을 숨기기 위해, 더불어 마녀의 영혼을 복종시키기 위해 아스모데우스는 트레팔가 숲 깊은 곳에 마녀의 영혼을 봉인했다.

‘대마녀의 영혼이 인간계에, 그것도 마수 하나의 수호만 받으며 봉인된 이유이기도 하고.’

마녀의 봉인지가 지옥에 있다면, 인간계에 있더라도 으리으리한 수호를 받는다면 다른 대군주들이 눈치 챌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어찌되었든 마녀가 대놓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당황한 코델리아는 다급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자, 잘은 몰라요! 자세히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어요!”

[정말이니?]

“네, 정말요.”

마녀가 혹하자 코델리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고, 마녀의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유더는 생각했다.

‘외로웠구나.’

수백 년이나 홀로 봉인 속에 갇혀 있었으니 저럴 만도 했다.

[그러니까··· 시작은······.]

마녀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코델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좋은 청자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대략하여 네 시간 남짓.

[그렇게 된 거란다.]

마녀가 만족한 얼굴로 활짝 웃었고, 코델리아와 유더는 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는 간단히 요약된 이야기였는데, 본인에게 직접 풀 스토리로 들으니 참으로 길고 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 개운하다. 아무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네?!”

네 시간이나 이야기해놓고 이제 또 본론을 시작한다고?!

코델리아가 깜짝 놀라 반문하자 마녀는 까르르 웃더니 코델리아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과거는 결국 지나간 이야기니까. 앞으로를 위한 이야기를 하자꾸나.]

사실 원작에서는 지금 같은 대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코델리아의 몸에 강림해 마수를 물리친 마녀는 그대로 승천해버렸으니 말이다.

[코델리아, 사랑스러운 아이야. 너는 잠시나마 나의 영혼을 담았고, 나는 네 영육으로부터 가능성을 읽어냈단다. 나와 같은 힘을 네가 가질 가능성을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마녀는 지금까지와 달리 조금은 요사스런 미소를 짓더니 코델리아의 이마와 눈, 뺨, 목, 가슴, 손등에 차례대로 입술을 맞추었다.

“마, 마녀님?”

[네 영혼에 내 흔적을 남겨두었단다. 내 힘을 다루었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렴. 그로 말미암아 너만의 힘을 키워나가렴.]

거기까지 말한 마녀는 코델리아의 귀에 무어라 작게 속삭였고, 코델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마녀가 가르쳐준 주문을 읊조렸다.

변화는 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마녀가 직접 강림해 이루어진 마녀화와는 조금 달랐다.

코델리아의 머리칼이 검게 물들었지만 그 끝은 여전히 붉은 색이었다.

두 눈은 초록색으로 변하는 대신 종래의 푸른빛이 보다 강해졌다.

[너의 힘을 키워나가렴.]

코델리아의 마녀화.

시간제한이 붙은 강화 변신 주문으로, 마녀 상태일 때는 모든 마법적 능력이 대폭 상승하는 효과가 있었다.

스스로를 돌아본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녀는 정말로 사랑스럽다는 듯 코델리아의 이마에 한 차례 더 입술을 맞추었다.

[내가 봉인되어 있던 장소를 잘 살펴보렴. 내가 집필한 마법서가 있을 터이니.]

마녀의 모든 주문이 담긴 마법서.

“정말 고맙습니다, 마녀님.”

코델리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마녀는 까르르 웃으며 코델리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유더는 아주 작게 헛기침을 토했다.

“흠흠.”

‘저는 뭐 없나요?’라는 뜻을 담은 헛기침.

원작과 달리 유더도 마녀와 만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뭐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번 여정으로 이미 신격권과 성십자수호단의 술식을 손에 넣은 유더였지만 다다익선이란 말도 있지 않던가.

유더의 어필에 마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술을 살짝 핥으며 말했다.

[유더, 너는 나와 맞지 않단다.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지.]

예상치 못 한 이야기에 유더는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가능성?’

원작의 유더는 구음절맥을 치료한 뒤 천무지체의 힘으로 강력한 무인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지금 마녀의 말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직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 하는 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렴. 운명이 널 인도할지니.]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흘린 마녀는 유더와 마찬가지로 눈을 깜박이며 궁금해 하는 코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수가 거하던 곳을 찾아보렴. 너희 둘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있을 거란다.]

거기까지였다.

마녀는 안고 있던 코델리아를 풀어준 뒤 한 걸음 물러서서 유더와 코델리아 두 사람 모두를 시야에 담았다.

[너무 오래 지체했구나. 이제는 떠나야 할 것 같구나. 하지만 코델리아, 그리고 유더.]

마녀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아늑한 벽난로 앞이었던 주변 역시 그저 어둠뿐인 새카만 공간으로 화했다.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란다.]

영원한 이별이 아닌, 재회를 암시하는 말.

원작과는 다른 대사에 유더와 코델리아가 순간 눈을 부릅떴지만 거기까지였다.

무어라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

““아.””

유더와 코델리아는 동시에 눈을 떴고, 동시에 상체를 일으켰다.

“도련님.”

“아가씨.”

거의 동시에 들려온 목소리는 각각 준과 달리아의 것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이다가 서로를 보았고, 이내 자신들이 아직 마녀의 봉인지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 정신이 드셨군요!”

저만치에 서서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루카스가 환한 얼굴이 되어 다가왔다.

“마녀님이 기사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제가 모두에게 전해두었고요.”

“어···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요?”

“예, 제가 본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했습니다.”

자랑스럽게 어깨를 편 루카스가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데, 어째 기사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다들 유더와 코델리아를 보며 무척이나 흐뭇하면서도 훈훈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야, 얘 대체 뭐라고 전한 거야? 달리아 표정이 왜 저래?’

코델리아가 얼른 유더에게 눈짓으로 물었지만 유더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눈만 꽉 감았다.

대충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그냥 물어보지 말아야지.’

하지만 루카스는 그럴 마음이 없는지 이미 입을 열고 있었다.

“마수의 공격이 코델리아 양을 덮치려는 그 순간! 유더 공자가 코델리아 양을 향해 몸을 날리던 그 광경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사랑의 증명이었죠.”

영웅소설 마니아답게 묘한 곳에서 말솜씨가 살아나는 루카스였다.

달리아를 필두로 한 기사들은 다들 다시 흐뭇한 얼굴로 유더와 코델리아를 보았고, 코델리아는 유더를 보았다.

때문에 유더는 급히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거든? 요정의 발걸음 믿고 한 거거든?’

‘나도 알거든?’

눈빛만으로 찰떡같이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헛기침으로 상황을 넘기려 했다.

그리고 다행히 루카스도 그런 두 사람을 너무 괴롭히지는 않았다.

“기사들은 다들 무사합니다. 마녀님께서 말씀하시길 두 분께서도 많이 지치셨을 뿐 건강에는 지장이 없다하셨고요.”

피를 한 바가지나 쏟긴 했지만 과연 루카스의 말마따나 피로할 뿐 딱히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숙을 하고, 내일 아침 일찍 숲을 나서기로 했습니다.”

“예, 그게 좋을 것 같군요.”

마녀의 마법서와 마수의 보금자리에 자리하고 있다는 도움이 되는 물건도 챙겨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지친 것도 지친 것이었고.

유더는 잠시 눈을 감고 원작의 흐름을 생각해보았다.

‘마녀화를 손에 넣은 코델리아는······.’

악마의 손의 추격자들을 마녀의 숲에서 격퇴하는 와중에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악마의 손이 12가문의 자식들을 납치한 이유가 악마 소환의 제물로 쓰기 위함이란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악마 소환 의식이 거행되는 장소와 의식을 진행하기로 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체이스 백작가로 돌아가 위기를 알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던 터라 코델리아는 고민 끝에 의식을 막고 12가문의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북부로 향한다.

‘이미 동떨어졌단 말이지.’

악마의 손은 12가문의 자식들을 아예 납치하지 못 했으니까.

원작에서야 코델리아를 놓쳤어도 루카스와 실비아 등등 제물로 쓸 인물들이 있었으니 의식을 강행했지만, 한 명도 확보하지 못 한 지금 의식을 거행할지 의문이었다.

더욱이 이번 악마의 손의 습격은 북부에 자리한 도시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충분했다.

악마 추종자들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진 지금 대규모 집회를 여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의 목적은 단순히 메인 시나리오를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메인 시나리오를 뒤틀어 본래는 존재하지 않는 해피엔딩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였다.

‘북부에 가자.’

의식이 거행된다면 막는다.

그리고 유더의 메인 시나리오인 ‘북부 야만족의 대공습’ 시나리오를 근본부터 뒤틀어 버린다.

마음을 정한 유더가 눈을 뜨자 루카스가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일단은 예정대로 노던 자작의 저택에 들러 하루에서 이틀 정도 묵어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마 본가에서 마중오신 분과도 노던 자작가에서 합류할 것 같습니다.”

루카스의 설명에 유더는 반사적으로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 역시 유더를 돌아본 터라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누가 오는 거지?’

12가문 각자의 집에서 마중할 인원을 보내는 이벤트는 원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에서 게일과 체이스 백작이 온 것부터가 원작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에서 마중 오는 것은 누구인가.

유더가 진지한 얼굴로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하자 코델리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냥 루카스를 보고 물었다.

“루카스 공자, 어떤 분이 오시는지 아시나요?”

“예, 제가 무척 존경하는 분이 오신다고 합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도 오랜만에 뵙는 지라 만남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루카스가 모험 이야기를 할 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유더와 코델리아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누구일까.

누구길래 루카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유더와 코델리아가 부쩍 관심을 보이자 루카스는 자랑스러운 얼굴이 되어 말했다.

“두 분 모두, ‘붉은 머리의 전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유더와 코델리아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붉은 머리의 전사.

적염의 란디우스.

영웅전기2에서는 설정상 초반에 사망하여 등장하지 않는, 영웅전기1의 다섯 주인공들 중 하나였다.

&

< 제7장 만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