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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Millwall

제10장 밀월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손님방에서 코델리아의 편지가 발견되기 10시간 전.

침대 위에 편지지를 올려놓은 코델리아는 입술을 삐쭉였다.

“근데 있잖아.”

“어.”

“왜 또 내가 써야하는 건데?”

벨카인 산맥의 중턱에서 뛰어내렸을 때도,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같이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 사랑의 도피 아니, 동반 가출도 아니고 아무튼 둘이서 빠져나갈 때도.

“음, 그건 말이지.”

“그건 말이지?”

코델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제대로 된 이유가 없으면 각오하라는 뜻이 분명히 담긴 눈빛이었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유더였지만 이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코델리아, 머릿속으로 한 번 상상을 해봐. 잉크가 가득 든 비커가 있고, 유리 막대가 하나 있어.”

“상상했어.”

“그래, 그럼 이제 유리 막대를 비커 안에 넣었다가 빼봐. 어떻게 될까?”

“유리 막대가··· 까맣게 변하겠지?”

잉크범벅이 될 테니까.

“맞아, 그럼 그걸 한 번 더 넣었다가 빼봐. 어떻게 될까?”

“여전히 검겠지?”

“바로 그거야.”

“그게 무··· 씨발?”

“아니, 전과도 초범은 눈에 확 띄지만 세 번이나 네 번은 그게 그······.”

“아주 말이면 다지? 말이면 다야!”

분노한 코델리아가 손바닥으로 유더의 등짝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야! 아파! 진짜로 아파!”

“아프라고 때리는 거거든? 응?”

찰싹찰싹 유더를 찰지게 때리던 코델리아는 내친 김에 유더의 정강이까지 걷어차려 했지만 유더가 조금 더 빨랐다.

팍!

질풍이십사보.

순간 선풍이 이는가 싶더니 유더의 신영이 흐릿해졌고, 코델리아의 발차기는 허공만을 격타했다.

“야! 치사하게 그걸 또 피하냐? 그것도 신기술로?”

“맞으면 진짜로 아프거든?”

생각 이상으로 손이 매운 코델리아였다.

유더가 꽤나 다급한 얼굴로 자세를 잡자 코델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무튼 진짜 쪽팔려 죽겠어.”

“그래도 이제 제법 익숙··· 아닙니다, 익숙해질 일이 아니지요.”

유더가 알아서 쭈그러들자 코델리아는 다시 한숨을 푹 쉰 뒤 유더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무튼 이제 어떡할 거야?”

단순히 흐레스벨그 백작가를 나서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프로스트 앤빌에 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아는 유더는 아무 계획 없이 일을 벌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일단 준비를 해야지. 방한대책도 대책이지만, 베르드폴니르를 안전하게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성벽을 넘을 방법과 우리 둘이 타고 다닐 말, 갖가지 여행 용품 등이 필요해.”

정론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돈이 없잖아.”

집에서 가져온 돈은 이미 랑게스트에서 마법사들을 고용하느라 다 쓰고 말았다.

체이스 백작이 챙겨준 돈 역시 랑게스트를 떠날 때 각종 장구류를 갖추느라 거의 다 써버렸고.

더욱이 문제는 돈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한밤중이었다.

해떨어진 후에도 영업하는 업종은 베르드폴니르에 딱 하나, 술과 도박 등등 각종 환락을 즐길 수 있는 유흥가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침까지 기다릴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몇 시간에 불과했다.

“그래서 말인데, 가까이 좀 와봐.”

“또 그런다, 또. 어차피 우리 둘 밖에 없잖아.”

“음··· 그래도 기분상.”

“하여간.”

코델리아는 무어라 투덜투덜 거리긴 했지만 이내 유더에게 바짝 다가선 뒤 귀를 가까이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유더의 귀속말을 들은 코델리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

믹은 전문 사기꾼이었다.

그의 전공은 결혼사기.

타고난 얼굴과 다년간의 수련으로 습득한 화려한 언변은 순진한 처녀들과 외로움에 지친 과부들을 꼬시는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절세미소녀에게 짓밟힌 채 나자빠져 있었다.

“내,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사기 당한 피해자들 그중에서도 빨간머리 메리벨과 대화를 하다보면 단서를 얻을 수 있지. 믹과 처음 만나던 날 어쭙잖게 시비를 걸던 동네 건달들에 대해 말이야.

동네 건달의 이름은 빅. 베르드폴니르 뒷골목을 조금 뒤지다보면 만날 수 있는데, 녀석을 족치다보면 믹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늘어놔. 물론 그것만으로는 믹의 거처를 알 수 없어.

믹은 약삭빠른 녀석이거든. 하지만 소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야. 결혼 사기범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 하고, 믹 역시 타지에서 건너온 지 얼마 안 되는 녀석이거든. 당연히 이런 녀석들이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현지인들의 도움이 필요해. 빅은 바로 그 현지인과 접촉할 방법을 알려주는 녀석이지.

현지인의 이름은 카알. 칼이 아닌 카알. 아무튼 카알을 족치다보면 믹에 대해 이야기를 해줘. 어디서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냥 바로 찾아왔어.”

듣다가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건 코델리아도 마찬가지인지 어지럽다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유더위키 이상해.”

“아무튼 중요한 건 네가 잡혔다는 거야.”

코델리아의 말을 흘려들은 유더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믹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을 이었다.

“믹을 잡으면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어. 하나는 감방에 집어넣는 거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연계 퀘스트를 이어나가는 거지. 베르드폴니르는 번화한 도시이고, 번화한 도시답게 범죄자들 역시 제법 모여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믹을 원하거든. 정확히는 랑게스트의 도둑길드장에게 바칠 선물로서 말이야.”

“무··· 무슨?”

“메리벨은 랑게스트 도둑길드장의 막내여동생이거든.”

유더의 환한 미소에 믹의 잘생긴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고, 코델리아는 바로 마비 마법을 시전한 뒤 말했다.

“유더.”

“응?”

“너 방금 그거 하고 싶었지?”

잡게 된 과정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

“뭐··· 습관일지도?”

“흠?”

“어찌되었든 잡았으니 가자. 시간이 별로 없어.”

아무리 늦어도 새벽 전에는 베르드폴니르를 떠나야 했으니까.

“좋아, 가자.”

베르드폴니르의 갱단 중 하나인 파비안의 소굴로.

두 사람의 동작이 조금 더 빨라졌다.

&

파비안은 잘나가는 운송업자였다.

사람, 돈, 편지, 약물, 위험한 물건 등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 운송한다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잠옷차림을 한 채 눈앞에 나타난 절세미소년과 절세미소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믹을 내게 선물로 주겠다고?”

“그래, 파비안.”

유더가 바로 답했지만 그의 시선은 파비안이 아닌 파비안의 거실에 급히 소집된 그의 부하들 정확히는 창가에 앉은 금발의 여인에게 향해 있었다.

“어딜 보고······.”

“아니, 됐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빙긋 웃으며 말한 금발여인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녀의 손짓에 가짜 파비안 배불뚝이 중년남은 꾹 고개를 한 번 숙인 뒤 뒤로 물러섰다.

진짜 파비안.

20대 중반인 금발의 미녀.

베르드폴니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도 유독 예쁘게 생긴 터라 인기가 무척 좋았지만 유더의 눈에는 그 미모가 들어오지 않았다.

‘코델리아가 훨씬 예쁘네.’

저도 모르게 코델리아와 비교를 한 유더는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했고, 진짜 파비안은 왜인지 쓴웃음을 한 벗 짓더니 두 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좋아, 내가 진짜 파비안인 건 어떻게 아는 거지?”

“클리셰잖아. 그리고 우리 위키가 좀 쩔거든.”

믹을 짓밟고 선 코델리아가 씩 웃으며 말하자 파비안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한 차례 좁히더니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흥, 우리도 너희를 알 것 같은데? 아니, 귀한 분들이라고 해야 하려나? 12가문의 자제분들이시니.”

“우릴 알아?”

파비안과는 완전히 초면이었다.

더욱이 베르드폴니르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말이다.

코델리아가 깜짝 놀라 묻자 파비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유더 바이엘과 코델리아 체이스. 서로 죽고 못 사는 흑발녹안의 절세미소년과 적발청안의 절세미소녀. 진짜로 보니 소문 이상으로 예쁘게 생겼네. 아무튼, 이 정도면 솔직히 몰라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각자 한 명씩 나타났다면 확신할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눈에 확 띄는 절세미소년과 절세미소녀가 함께 나타났으니 절로 소문의 두 사람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머리색과 눈색 역시 같았고 말이다.

파비안의 지적에 코델리아는 처음엔 우쭐해하다가 이내 걱정 섞인 얼굴이 되었다.

‘야, 어쩌지?’

파비안에게 정체를 들킨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대로면 어딜 가든 정체를 들킬 거란 사실이 문제였다.

이러나저러나 야반도주 중인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변장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별 일 아니라는 듯 눈빛으로 답한 유더는 다시 파비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좋아, 서로 정체를 아니 이야기가 편하겠네. 괜히 질질 끌지 말고 시원하게 가자. 믹을 넘겨줄 테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줘.”

“도련님과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게 뭔데?”

“오늘 새벽 전까지 베르드폴니르의 성벽을 넘을 수단과 타고 다닐 말 한 필, 거기에 기본적인 여행용품들과 우리가 갈아입을 평범한 여행복까지. 운송업자니 모두 가능하겠지?”

유더가 베르드폴니르의 여러 이벤트들 중에서 하필 ‘결혼사기꾼 믹’을 고른 이유였다.

운송업자인 파비안만이 지금 유더가 원하는 것들을 확실하고 빠르게 준비할 수 있었다.

“할 수는 있어.”

“그럼 해줘.”

“뭐, 좋아. 12가문의 자제분들이 죄 짓고 도망치는 상황은 아닐 테니까. 둘이 밀월여행이라도 떠나는 거야?”

“아니거든?”

“어.”

코델리아와 유더가 동시에 상반된 대답을 내놓았고, 파비안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우셔라.”

새빨개진 코델리아의 얼굴과 헛기침을 터트리는 유더의 얼굴을 번갈아 감상하던 파비안은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음에 들었어. 선물도 확실하고. 바로 준비해줄게. 12가문의 자제분들과 척을 질 바에는 빚을 얹어두는 편이 낫겠지.”

“빚 아니거든? 거래거든?”

“그럼 친분이라고 하지 뭐.”

코델리아가 반박하자 다시 유쾌하게 말한 파비안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더니 유더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러는데 아가씨 한 번만 안아봐도 돼?”

“나야 괜찮지만 우리 애는 물어서요.”

유더의 능글맞은 대답에 코델리아는 무슨 개소리냐는 듯 으르렁거렸고, 파비안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너무 마음에 든다. 소문 이상인걸?”

파비안이 다시 소문을 언급하자 코델리아가 언짢은 얼굴로 물었다.

“저기, 대체 어떻게 소문이 났는데 그래?”

“서로 죽고 못 살아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완전 잉꼬 커플? 아, 도련님보다는 아가씨 쪽이 훨씬 적극적이라는 이야기도 있어. 정말로 그래?”

코델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싸늘한 눈으로 유더를 보았고, 유더는 헛기침을 터트린 뒤 말했다.

“아무튼 서둘러 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좋아, 바로 시작하자고.”

짝하고 손뼉을 친 파비안이 부하들에게 눈짓을 하자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

이러나저러나 역시 프로인 파비안과 그 부하들이었다.

“특별히 내가 직접 안내할게.”

베르드폴니르는 교역도시였고, 대부분의 교역도시들이 그러하듯 정문을 제외한 성벽은 제법 허술한 곳이 많았다.

유더와 코델리아를 데리고 도시 외곽에 도착한 파비안은 나무 상자들 사이에 숨겨져 있는 개구멍을 통해 성벽을 빠져나갔다.

“말은 한 필뿐이지만 튼튼한 녀석이니 두 사람을 태워도 문제없을 거야. 짐 가방에는 침낭이랑 물통, 식기 등등 기본적인 여행물품이 채워져 있고. 식량은 일단 3일치 채워놨어.”

성 밖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 앞에는 과연 안장을 얹은 커다란 말 한 필과 파비안의 부하가 서 있었다.

“아가씨가 앞에 앉는 걸 추천할게.”

“왜?”

그렇지 않아도 누가 앞에 앉아야 하나 고민하던 코델리아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파비안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쪽이 도련님께 안길 수 있어서 좀 더 로맨틱하거든.”

“뒤에 탈게.”

“음, 그것도 좋지. 아가씨 쪽에서 꼭 끌어안아야 하니까.”

“···그냥 말 한 필 더 구해줄 수 없어?”

“말장난이니까 휘둘리지 말고.”

두 사람의 대화를 끊은 유더는 파비안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거래긴 하지만 좋은 거래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할게.”

“도련님과 아가씨는 좋은 거래 상대가 될 것 같으니까.”

그리고 사실 앞서 말했듯 12가문의 자제들과 척을 져서 좋을 것이 하나 없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래도 유더는 파비안이 마음에 들었다. 때문에 작은 친절 하나를 베풀기로 했다.

“파비안, 잠깐 가까이 와봐.”

“아가씨가 보고 있는데?”

“헛소리 말고.”

파비안이 눈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가까이 하자 유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길토는 배신자야. 네 뒤통수를 치려고 바투와 뒤에서 손을 잡고 있어.”

유더의 말에 파비안이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라는 물음이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유더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한 번 조사해봐. 내 말대로일 테니.”

여기까지였다. 유더는 훌쩍 말위에 오른 뒤 코델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에 타.”

“흥.”

괜히 한 번 흥흥거린 코델리아는 유더의 앞에 자리를 잡았고, 유더는 고삐를 잡았다.

귀족가 자식들답게 유더와 코델리아 모두 승마를 할 줄 알았다.

물론 유더야 전생에도 이미 승마 정도는 할 줄 알았지만 말이다.

“그럼 가볼게. 항상 행운이 함께하기를.”

“근육이 아니라?”

코델리아의 작은 중얼거림을 뭉개듯 유더가 얼른 말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딱딱한 얼굴로 서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파비안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정말 소문대로네.”

환상의 커플이라더니.

어깨를 으쓱인 파비안은 부하들에게 길토의 뒤를 캘 것을 명령했다.

&

< 제10장 밀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