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ing Maker

Chapter 44 Protector of the Wild

제44장 야생의 수호자

아침이 밝았다.

해가 떠올랐고, 동부군은 진군을 개시했다.

서부군은 아니, 더 이상 서부군이라 부를 수 없는 악마의 무리는 오래지 않아 동구분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역시 오는가.”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은 더 이상 없었다.

온전히 마인의 모습을 드러낸 하라겐은 곤충처럼 마디가 갈라진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미천하긴 하나 그래도 신이라 불리는 이들.”

지옥의 문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느낀 것이 있을 터였다.

“참으로 절묘하구나.”

공격해온 시점이.

마치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끌끌끌 웃음을 흘린 하라겐은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락해 마물이 된 성난뿔소 부족은 아직 그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지옥의 문을 에워싼 마물들과 악마들은 그의 명을 듣지 않았고, 하라겐도 딱히 명령할 마음이 없었다.

‘우리 모두 같은 분을 모시게 될 터이니.’

데몬프린스.

작위를 가진 악마들 가운데서도 강대한 힘을 가진 진정한 대악마.

하라겐은 그저 동쪽을 바라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곧 시작될 싸움을, 서로 죽고 죽이는 와중에 피어날 공포와 두려움과 피의 향연을 기대했다.

&

위대한폭풍은 멀리 보았다.

그의 푸른 두 눈에 많은 것들이 비쳐졌다.

이제는 높이만 30미터에 육박할 정도로 거대해진 지옥의 문.

그리고 그 문을 에워싸듯 자리한 수천 어쩌면 일만에 육박할지도 모를 마물들.

그저 바라만 보는데도 식은땀이 흘렀다.

문에서 새어나오는 보랏빛 지옥의 기운과 죽어버린 땅을 활보하는 마물들, 위대한폭풍 자신의 시선을 눈치 채고 이쪽을 노려보는 악마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곳이 야생의 땅인지, 아니면 지옥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위대한폭풍은 억지로 웃었다.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온갖 감정들을 억누르며 지옥의 문을 바라보았다.

‘정말이구나.’

레나의 말대로였다.

터무니없이 강대한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보랏빛 지옥의 기운 너머에서 그가 똑바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닫지 못 하면.’

저 존재가 기어코 지상에 발을 딛게 한다면.

야생의 땅은 더 이상 없으리라.

이 땅은 지옥의 일부가 되어 죽음과 절망만이 가득하게 되리라.

위대한폭풍은 눈을 감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빠져들 것 같은, 헤어 나올 수 없는 곳에 발을 딛게 만들 것 같은 지옥의 문을 시야에서 차단했다.

그리고 들었다.

동부군의 목소리를.

그들이 기도하는 것을.

눈앞의 재앙에 절망하지 않고자, 어떻게든 맞서 싸울 용기를 얻고자 신을 찾는 이들.

마차 바퀴가 굴러갔다.

지옥의 문과 조금씩 가까워졌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싸움의 순간이 다가왔다.

위대한폭풍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칼날노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것도 일종의 기도일까.

싸울 힘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힘을 다오.’

적어도 절망하지 않도록,

부족을 이끌고 보살피는 야생신으로서 끝까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바람이 불었다.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가는 그 소리에 위대한폭풍은 미소 지었다.

칼날노래의 대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맡겨라.’

고운눈바람을, 야생의 아이들을.

위대한폭풍은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차 바퀴는 굴러갔고, 결전의 시간이 도래했다.

&

붉은질풍은 태양의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저주의 진행을 막아주고 있는 솔라리의 신물에 막연한 기도를 바친 뒤 고개를 들어 정면을,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꽃바람 평원.

하얀 눈이 내린 아름다운 설원.

더 이상 없었다.

눈은 모두 녹아 사라졌고, 땅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지상을 뒤덮은 것은 흉악한 마물들이었고, 하늘에는 날개 달린 악마들이 자리했다.

그리고 지옥의 문.

지금 선 자리로부터 불과 수백 미터 거리에 위치한, 하지만 닿기 위해서는 수천에 달하는 마물과 악마들을 돌파해야만 했다.

붉은질풍은 숨을 삼켰다.

사기로 오염된 대기가 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와 오염된 대기를 밀어냈다.

고운눈바람의 바람이었다.

붉은질풍은 그렇기에 다시 숨을 삼켰다 폐부 깊은 곳까지 들이마신 뒤 내쉬며 귀를 기울였다.

4만에 육박하는 대군.

그들이 모여 숨을 죽이고 있었다.

4만 명의 생각, 4만 명의 감정.

붉은질풍은 정면을 보았다. 아홉칼날의 뒷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는 오늘을 위해 목숨을 불태웠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남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였다.

그리고 오늘.

자신과 이 자리에 모인 4만여 대군.

‘결국에는 같구나.’

오늘의 싸움도.

내일의 양식을 구하고자 사냥에 나가 맹수와 싸우는 것도.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지키기 위해.

생명의 흐름을 이어가고자.

‘감상이 길었군.’

싸움을 눈앞에 두고 무슨 생각이람.

하지만 덕분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렇기에 붉은질풍은 맹진을 개시한 마물들을 보면서도 침착하게 명령할 수 있었다.

“북을 울려라.”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깃발이 올라갔다. 수백 개에 달하는 북이 동시에 울렸다.

쿵! 쿵! 쿵!

마물들이 언덕을 향해 돌진했다.

언덕 위의 동부군이 방패를 세우고 창을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폭풍이 불어왔다.

&

‘돌진이 아닙니다. 일단은 방어입니다.’

붉은질풍의 말.

위대한폭풍은 두 팔을 높이 들었다.

푸른 눈을 빛내며 야생신으로서의 힘을 발하였다.

위대한폭풍.

그 이름대로의 역사.

바람이 불었다.

작은 바람이 모이고 합쳐 큰 바람이 되었고, 점점 더 거세어져 질풍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자라 하늘을 울리고 땅을 진동시키는 폭풍이 되었다.

콰가가강!

하늘에서 벼락이 쳤다.

연이어 먹구름이 더해졌다.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야생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위대한폭풍 뒤에는 고운눈바람을 비롯한 야생신들이 서 있었다.

고운눈바람이 바람에 서리를 더했다.

무거운먹구름이 비와 번개를 불렀다. 폭풍의 힘을 강화했다.

“가라.”

위대한폭풍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눈이 빛났고, 푸른 스파크가 그의 전신에 일었다.

그리고 폭풍이 돌진했다.

지옥의 문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며 가로놓인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콰가가가!

벼락과 거센 바람.

칼날과 같은 눈보라.

눈앞에 일어난 기적에 동부군이 환호했다. 동시에 폭풍을 우회한 마물들이 언덕에 다다랗다.

“땅이여!”

무거운발걸음이 땅을 크게 밟았다.

본신이 코뿔소인 그는 인간의 모습일 때도 거대했다.

쿵! 쿵! 쿵!

혼자가 아니었다.

멧돼지 야생신인 멋진송곳니가 힘을 보탰고, 그 외에도 여러 야생신들이 함께 땅을 밟았다.

야기한 것은 지진이었다.

언덕을 따라 일자로 땅이 갈라졌고, 이내 지옥의 문을 향해 균열이 번져나갔다.

콰가가가가!

돌진해오던 마물들이 균열에 빠졌다.

융기되며 솟구친 땅이 그대로 성벽이 되었다.

폭풍과 지진.

야생신들이 불러온 재난.

그리고 붉은질풍이 손을 들었다. 마침내 명령했다.

“쏴라!”

깃발 수십 개가 동시에 솟구쳐 올랐다. 융기된 벽 뒤에 자리하고 있던 동부군이 명을 받들었다.

붉은바람이 활을 쏘았다.

옆에 자리한 태양노래가 창을 던졌고, 일만이 넘는 화살과 투창이 하늘을 뒤덮었다.

과가가가가가가가!

폭풍이 지난 자리에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창의 피가 소나기처럼 마물들과 악마들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키악! 칵!”

균열을 뛰어넘어 달리던 마물들이 고꾸라졌다. 하늪을 뒤덮은 화살의 비를 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족했다.

고꾸라진 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마물들은 화살을 무시했다. 악마들은 우습다는 듯 바람을 일으켜 화살의 궤적을 비틀었고, 일부는 아예 불꽃과 번개로 공격을 상쇄했다.

“방패 세워!”

붉은질풍이 다시 외쳤다.

우르르 소리와 함께 방패병들이 앞으로 나섰다. 융기된 벽을 넘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마물들과 직접 대결을 시작했다.

“와아아!”

함성과 비명이 뒤섞였다.

벽을 뛰어넘던 늑대처럼 생긴 마물이 몇 개나 되는 창에 찔려 죽었고, 하늘에서 쏟아진 악마가 휘두른 대검에 위대한폭풍 부족의 전사 둘이 목이 찢어져 죽었다.

“크허엉!”

야생신 일부가 본신을 드러냈다. 거대한 늑대와 호랑이가 전장에 뛰어들어 악마들을 물어뜯었고, 위대한폭풍은 눈에 들어온 광경에 노성을 터트렸다.

검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악마.

칼날노래의 것이 분명한 그것.

“폭풍이여!”

위대한폭풍이 지옥문으로 뻗어가던 폭풍을 불렀다.

다시 회전시켜 동부군을 두드리는 마물들의 뒤를 쳤다.

아비규환.

무너지는 방벽과 죽어나가는 전열.

쓰러져 울부짖는 마물들과 지상에 끌어내려져 뭉개지는 악마들.

너무나 폭력적인 광경 속에서 고운눈바람은 손을 떨었다. 하지만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았다.

지옥의 문을.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하늘을.

“충분해요.”

싸움이 커졌어요.

충분히 많은 숫자의 마물들과 악마들이 동부군을 치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바로 이 순간.

하늘.

아주 높은 곳.

너무 높아 지상에서는 제대로 식별조차 할 수 없는 곳.

나무판이 날고 있었다.

그 위에 세 사람이 올라타고 있었다.

유더는 지상을 보았고, 고운눈바람과 같은 생각을 하였다.

바로 지금이었다.

“실드 풀어?”

“잠깐, 마지막으로 마음의 준비 좀 하고.”

혹시 모르니 좋은 것도 좀 보고.

유더는 코델리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코델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뭐라도 묻었나 얼굴을 매만졌다.

그래서 유더는 웃었다.

레나 또한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저 잠깐일뿐.

유더는 다시 숨을 삼켰다. 코델리아에게 눈짓했고, 두 손으로 뺨을 매만지던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실드를 해제했다.

콰가가가가!

미친 바람이 불었다.

너무나 높은 곳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고도가 얼마나 될까.

악마들에게 감지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높이 올라왔는데.

‘진짜 할 수 있어?’

‘어, 아마도.’

고공 강하를 안 해본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낙하산도 없이 하는 것 처음이었지만.

‘내가 세운 계획이지만, 미친놈 같기는 하네.’

하지만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가자.’

짤막한 말을 끝으로 유더는 나무판에서 뛰어내렸다.

연이어 코델리아와 레나가 지면을 향해 몸을 던졌다.

콰가가가가가!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유더 자체가 대기를 찢는 칼날이 되었다.

그리고 유더는 볼 수 있었다.

지상의 광경을.

점점 더 가까워지는 지옥의 문과 하늘을 뒤덮고 있는 날개 달린 악마들을.

“구천구문.”

아홉 개의 하늘과 아홉 개의 문.

아홉 개의 세상을 잇는 하나의 길.

유더는 눈을 감았다. 구천구문의 구결로 흑룡의 기운을 일으켰다.

자유롭게 부릴 수 있게 된 네 마리 용을 일시에 방출하였다.

“크롸라라라라라라!”

용들이 포효했다. 그리고 유더를 에워쌌다.

황금의 선풍이 일었고, 네 마리 흑룡이 하나 되어 거대한 칠흑의 기운이 되었다.

“카칵!”

“크라아!”

하늘의 악마들이 눈치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유더는 그것들을 보았다.

2차 세계 대전의 급강하폭격과 같이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울어라! 흑룡들이여!”

그 포효가 천지를 뒤흔드나니!

흑룡아!

흑룡이 요동쳤다.

거대한 용의 기운이 악마들을 집어삼켰다. 그대로 요동치며 길을 열었다.

‘부끄러어어어!’

뭐야, 저게!

비쥬얼은 멋있었지만, 악마들 사이를 헤집는 흑룡의 기운은 멋짐이라는 게 폭발했지만,

‘울긴 뭘 울어! 지가 애기야?’

얼굴이 빨개진 코델리아는 빛의 날개를 펼쳤다.

레나가 들었는지,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했지만 굳이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레나가 그런 코델리아의 손을 잡았다. 함께 유더가 만든 길을 지나며 지옥의 문을 노려보았다.

“막아!”

하라겐이 지상에서 소리쳤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여러 악마들이 소리쳤고, 날개달린 마물들이 일시에 솟구쳐 올랐다.

적지 않은 수였다.

동부군이 놈들의 주의를 끌었지만, 그래도 수백에 달하는 마물들과 악마들이 몰려들었다.

유더가 만들어낸 흑룡의 기운으로도 저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기에 레나는 날개를 펼쳤다. 코델리아와 함께 천상의 심판을 움켜쥐었다.

콰하!

반전.

추락하듯 비행하던 코델리아와 레나가 솟구쳤다. 빛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나눠 쥔 천상의 심판을 높이 들어올렸다.

지상의 악마들.

수백에 달하는 무리.

그것들 모두를 보았다.

흑룡의 기운조차 묻어버린 그것들을 향해 코델리아가 검을 휘둘렀다. 레나가 주문을 발동시켰다.

부르는 것은 빛.

천상의 기운.

지금 이 순간 신벌의 때가 도래했나니!

심판의 날!

파하아!

하늘이 열렸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것.

하늘에서 지상으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황금의 광채!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빛이, 그저 빛이, 황금의 섬광이!

수십, 수백의 달하는 그것들이 허공을 꿰뚫었다. 지상에 강림하였고, 마물들과 악마들을 문자 그대로 녹여버렸다.

“아아악!”

악마들의 육신이 불타올랐다.

빛에 휩쓸려 비명을 질렀다.

유더를 공격하기 위해 밀집해 있었던 터라 수백에 달하는 마물들과 악마들 모두가 심판의 날을 벗어나지 못 했다.

콰가가가!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마를 멸하는 빛.

지옥의 힘이 가득한 곳에 쏟아진 천상의 기운.

성천사인 레나가 함께하기에 발휘될 수 있었던 천상의 심판의 진정한 힘.

“우오오오오오오!”

동부군 전체가 포효하듯 외쳤다.

너무나 압도적인 광경에 전장 전체가 일순 정지했다.

동부군을 두들기던 마물들과 악마들이 멍한 얼굴로 천상의 빛을 바라보았다.

“와우.”

유더도 그러했다.

흑룡의 기운에 휩싸인 채로 하늘을 올려다본 유더는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심판의 날은 마를 불태우는 힘.

그렇기에 유더에게는 조금의 해도 끼치지 않았고, 덕분에 유더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과 그 사이에 자리한 두 천사의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

첫 번째 심판에 코델리아가 굳이 함께한 이유.

코델리아의 가슴께에 연속해서 떠오른 빛의 고리 때문이 아니었다.

레벨 업도 레벨 업이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일소된 전장.

그렇기에 온전히 드러난 지옥의 문.

첫 번째 심판의 날에 힘을 소진한 코델리아가 천상의 심판에서 손을 놓았다.

레나가 모든 힘을 천상의 심판에 집중시켰다.

지옥의 문을 직접 공격한다.

엔디미온의 것보다 너무나 거대한 그것에 천상의 힘을 쏟아 부어 부수고 약화시킨다. 닫을 수 있는 크기까지 축소시킨다.

“막아아아아!”

지상에서 하라겐이 외쳤다.

악마들 몇이 소리쳤다.

동부군과 싸우던 악마들 가운데 일부가 지옥의 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너무 멀었다.

레나와 지옥의 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아무 것도 없었다.

“심판의 힘이여.”

레나가 전력을 쏟아부었다.

지상을 뒤덮는 심판의 날 대신, 하나로 집중된 빛을 지옥의 문을 향해 내쏘았다.

이것으로 지옥의 문을 부순다.

반파하여 축소시킨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남은 천사의 힘으로 봉문의 주술을 펼친다.

지옥의 문을 닫아 놈들의 야욕을 저지한다.

빛이 나아갔다.

찰나, 순간.

하지만 정지한 것 같은 시간 때문에 다가오지 않는 것.

하라겐이 몸부림쳤다.

쏟아지는 천상의 힘에 악마들이 시선을 돌렸다. 감히 마주하지도 못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심판의 힘이 지옥문과 충돌하려 할 때.

유더는 보았다.

지옥의 문으로부터 솟구치는 것을.

찰나를 비집고 나온 그것이 심판의 힘과 정면에서 충돌하는 것을.

콰가가가가강!

빛이 폭발했다.

어마어마한 섬광이 전장에 자리한 모두의 시각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유더는 알 수 있었다.

레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데몬프린스.

마계의 대공!

콰가강!

심판의 힘이 부서졌다.

지옥의 문에 닿지 못 했다.

코델리아는 억지로 눈을 뜨며 지옥의 문을 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지옥의 문 사이로 비집고 나온 검고 거대한 팔을.

악마의 손을.

저것이 심판의 힘을 저지했다. 지옥의 문을 지켜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

악마의 손이 불타올랐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지상에 떨궈졌다.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소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보랏빛 기운을 일으키더니 기진맥지한 상태로 서 있는 레나를 공격했다.

“레나!”

코델리아가 급히 몸을 날려 레나를 밀쳐냈다.

데몬프린스가 쏘아낸 보랏빛 구체가 허공을 관통했고, 걸리는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퍼플썬!’

어지간한 수준의 대마법사가 아닌 한 인간은 사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 하는 최고위 마법.

비록 작은 규모이긴 했지만 분명 퍼플썬이었다. 무시무시한 파괴의 마법을 단숨에 구현해냈다.

‘아냐.’

코델리아는 다시 지상을 보았다.

데몬프린스는 아직 지옥의 문을 통과하지 못 했다. 나온 것은 그저 팔에 불과했고, 심판의 힘을 막아내느라 그 팔 역시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반격까지 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놈의 팔은 늘어져 있을 뿐, 재차 마법을 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나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너무나 많은 힘을 소진한 것도 있지만, 작금의 상황에서 절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는 방법이 없어.’

방금 일격에 모든 힘을 다했다.

더 이상은 여력이 없었다.

데몬프린스의 오른팔을 저지하긴 했지만, 이제 시간은 놈들의 편이었다.

레나 자신만의 힘으로는 데몬프린스를 저지할 수 없었다.

코델리아의 힘으로는 저렇게 거대한 지옥의 문을 닫을 수 없었다.

“레나!”

코델리아가 소리쳤다.

기세가 오른 마물들과 악마들의 공격을 피하고자 더 높이 날아올랐다.

레나를 끌어안으며 지상에 시선을 던졌다. 유더를 찾기 위함이었다.

“크오오!”

“카아아!”

지상에 착지한 유더에게 마물들이 밀려들었다.

황금빛 선풍이 유더를 중심으로 일었지만, 사방에서 밀려드는 마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하라겐이 웃었다.

안도의 숨을 토했고, 이내 가슴이 터지도록 큰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이것이었구나.

이것이 너희가 준비한 수였구나.

그래, 인정하마.

간담이 서늘했다.

데몬프린스께서 조금만 늦으셨다면, 무리를 하지 않으셨다면 지옥의 문은 닫혔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닫히지 않았다.

방금 일격을 막아내느라 데몬프린스의 강림이 늦어지긴 할 터였지만,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었다.

동부군과 마물들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라겐은 웃음을 흘리며 지상을 보았다. 잘 싸우고 있지만 얼마 안 있어 마물들에게 짓뭉개질 유더를 보았고, 하늘에 자리한 두 천사를 보았다.

“너희였구나.”

사사건건 일을 방해한 것이.

자신에게 지금과 같은 선택을 강요한 것이.

하지만 너희가 밉지는 않구나.

너희 덕분에 오히려 올바른 선택을 한 것 같으니.

하라겐은 계속해서 웃었다.

필사적으로 싸우는 유더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러 위태로운 코델리아를 보았다.

절망해버린 레나를 보며 즐겼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유더를 보았다.

레나의 허리를 안은 채, 남은 한 손으로 광탄을 마구 터트리며 유더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유더가 그 시선을 받았다.

눈빛을 교환하기에는 턱없이 먼 거리였지만 그대로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고, 언제나처럼 뜻을 나누었다.

‘해야겠지?’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가 쓰게 웃었다.

‘그래, 플랜B로 가자.’

레나의 계획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것.

코델리아가 웃었다.

억지로라도 그리했다.

최고의 미소를 보여주며 주먹을 당겼다. 천사의 힘을 거두고 마녀의 힘을 발하였다.

파하!

코델리아의 머리칼이 검게 물들었다. 검붉은 기운이 코델리아의 오른팔을 타고 불타올랐다.

레나가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코델리아는 활짝 웃으며 오른팔을 휘둘렀다.

검은 칼날을 지면을 향해 내던졌다.

하라겐이 그런 코델리아를 보았다.

검은 칼날의 궤적을 쫓았다.

지면.

야생신들이 일으킨 지진으로 인해 갈라진 틈.

그 속으로 검은 칼날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하라겐은 깨달았다.

코델리아가 무엇을 하려는지.

그렇기에 폭소했다. 코델리아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멍청한 것.”

그래, 눈꽃바람 평원에도 용맥이 흐른다.

하지만 그저 그뿐이다.

용맥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용맥을 폭주시키든 뭐하든 작은 폭발이 일어날 뿐이다.

무슨 짓을 해도 지옥의 문은 건재할 것이다.

틀리지 않았다.

바른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유더와 코델리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쾅.”

코델리아가 말했다.

그리고 작은 폭발이 일었다.

그래도 용맥의 일부를 건드린 것이라 지면이 요동쳤다.

유더를 향해 몰려들던 마물들이 일순 멈칫할 정도의 폭발은 되었다.

그리고 그것뿐.

단지 그것으로 끝나야 하는 일.

하지만 아니었다.

코델리아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으니까.

방아쇠를 당긴 것 뿐이니까.

유더와 코델리아가 준비한 것.

레나의 부활을 알기 전에 하고자 했던 일.

“우리집 유더는 굉장해요.”

코델리아가 말했고, 레나는 눈을 깜박였다.

하라겐이 다시 코델리아를 노려보았다.

하나.

그리고 둘.

카운트 다운을 하던 코델리아는 다시 활짝 웃었다.

최고의 미소와 함께 말했다.

“씨발 쾅.”

그리고 일어난 폭발.

쾅.

이번에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졌다.

땅 속에서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다.

쾅, 쾅, 쾅.

심상치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악마들이 모두 같은 곳을 보았다.

그리고 하라겐은 깨달았다. 폭발이 한쪽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흘러가고 있음’을.

“폭발은, 예술이니까.”

콰강!

어마어마한, 실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먼 곳이었다.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어졌다. 계속해서 폭발이 일어났다.

동부를 향해, 서부를 향해.

하나의 선을 그리며.

흐름을 따라.

“용맥.”

흐름.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

코델리아가 발상은 단순했다.

용맥은 흐름이니까. 그 흐름을 이용하자.

뭘 어떻게 이용하자는 아이디어도 없는, 사실상 떠넘기기에 가까운 발상.

하지만 충분했다. 그 발상이 유더의 머릿속에서 구체화되었다.

마젤란의 하이 엘프들이 구축해 놓은 인프라.

마젤란의 하이 엘프들이 세워놓은 연구시설.

용맥천을 터트려도 다른 용맥천이 연쇄적으로 폭발하지 않은 것은 용맥천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를 중계할 것이 있다면.

용맥이 마치 도미노처럼 연쇄 폭발을 일으킬 수 있게 한다면.

눈의 여왕은 하나가 아니었다.

버려진 연구 시설들이 동부와 서부에도 있었다.

하이 엘프들의 인프라는 용맥이란 하나의 흐름을 보다 명확하게 해주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용맥에 폭탄을 흘려보냈다.

눈의 여왕의 힘으로 얼린 폭탄들.

그리고 두 발로 뛰며 타운포탈을 최대한 이용했다. 시간 안에 돌 수 있는 연구시설들 모두를 폭주하기 직전 상태로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플랜B를 발동시켰다.

도미노의 첫 조각을 밀어버렸다.

쾅! 쾅! 쾅!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 먼 곳에서 계속해서 폭발이 일어났다.

코델리아가 이번 전투에서 눈의 여왕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용맥을 폭주시키기 위한 폭탄으로 사용했으니까.

물론 유더와 코델리아라 해도 불과 나흘 만에 드넓은 용맥 전체에 투입할 폭탄을 양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애당초 필요하지 않았다.

용맥은 흐름이니까.

일정 수준 이상의 폭주를 일으키면 결국 용맥 전체가 폭주하게 되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콰가가가가가가가!

용맥이 요동쳤다.

용맥천들이 연달아 폭주했고, 하나가 폭주할 때마다 용맥 전체의 폭주가 가속화되었다.

인공정령들이 연달아 폭발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하이 엘프들의 연구시설들이 폭발하며 폭주의 힘을 더했다.

동부와 서부.

야생의 땅 전부가.

용맥 전체가!

콰가가가가가가가가!

지축이 뒤흔들렸다.

서부와 동부의 용맥천들이 모조리 폭주한 결과였다.

지축이 뒤흔들렸고,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야생신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 했다.

고운눈바람은 자신의 성역이 박살나는 것을 느꼈고, 푸른수염은 성지가 통으로 날아가는 것을 감지했다. 위대한폭풍은 멍청한 얼굴로 유더와 코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쿠쿠쿵!

저 멀리 하늘지붕산맥에서도 폭발이 일어났다.

다시 싸움이 멈췄다.

야생의 땅 전부를 뒤흔드는 용맥의 폭주에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라겐조차 멍청한 얼굴로 코델리아를 보았다.

어떻게든 현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미 초토화된 서부였다.

야생신들의 성지나 용맥천은 부족들의 거처와 거리가 꽤 있으니, 용맥 전체가 폭주한다 해도 막상 인명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용맥 전체를 폭주시킨다?

야생신들의 성지 전체를 날려버린다?

정상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보다 다른 쪽이 더 중요했다.

대체 왜.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위대한폭풍은 알았다.

그렇기에 욕지거리를 토하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들.”

하지만 우리집 미친놈들.

고운눈바람도 알았다. 푸름수염도 깨달았다.

용맥 전체가 폭주했다.

그로 인해 용맥 전체가 정화되었다. 지옥의 기운을 폭발로 떨쳐내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로인해 깨어나는 자.

크롸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하늘에서 포효가 터졌다.

다시 한 번 하늘이 갈라지며 황금빛이 지상을 뒤덮었다.

하라겐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레나는 눈을 껌벅였고, 코델리아는 송곳니를 빛내며 웃었다.

“황금의 용왕.”

유더가 말했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주먹에 자리한 용의 문장이 빛을 발했고, 하늘에서 포효가 이어졌다.

그것은 야생의 땅의 주인인 동시에 야생신들의 왕인 자가, 용맥 그 자체인 자의 울부짖음이었다.

지옥의 문에서 솟구치던 지옥의 기운이 일순 사라졌다.

눈꽃바람 평원이 일순간에 정화되었다.

그리고 벼락이 쳤다.

거대한 황금의 섬광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정확히는 유더를 향해 내리쳤다.

“유더!”

코델리아가 다급히 외치며 몸을 던지려하자 레나가 저지했다.

성천사인 그녀는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금의 용왕이 유더를 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넘겨준 것이었다.

[대범하구나.]

황금의 용왕이 유더에게 말했다.

오염된 용맥천들을 터트리라고 허락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용맥 전체를 폭주시킬 줄이야.

[덕분에 나도 정상이 아니다.]

깨어났지만,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황금의 용왕은 유더를 택했다.

야생의 수호자에게 자신의 힘을 맡겼다.

[마무리를 짓거라.]

지옥의 문을 부수고 파하여라.

야생의 힘이 너와 함께할 것이니.

빛이 작렬했다.

유더를 에워싸고 있던 마물들과 악마들이 비명과 함께 사그라졌다.

그리고 유더가 서 있었다.

전신을 황금빛 광휘로 물들인 채.

황금의 용왕의 화신이 되어.

“시작할까?”

유더가 하늘을 보며 말했고,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문장을 통해 코델리아에게도 야생의 힘이 전달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지옥의 문을 닫는 것뿐.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시 서로를 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미소를 나눈 뒤 지옥의 문을 돌아보았다.

&

< 제44장 야생의 수호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