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화가 가능한 악기는 보통 이능으로 만들어진다.

극히 희귀한 확률로 이계에서 악기 아이템 카드를 획득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아이템명이나 설명에 획득장소에 관한 정보나, 영향을 준 상위존재의 이름이 들어갔을 거다.

이레나가 권제인에게 받은 이 악기는, 이능에 의해 제작된 바이올린이다.

'한 번 비교해볼까.'

아이템 창을 열어, '무명의 운명'의 정보를 확인해 봤다.

[아이템명] 무명의 운명

[형식] 무기

[희귀도] N~EX

[숙련도] 0%

[효과] 미정

[설명]

사용자의 경험, 기대, 사상, 목표, 신념 등에 근거하여 이름도, 희귀도도, 효과도 변하는 무기.

운명력을 지닌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이능 바이올린과 형식도 다르고, 희귀도의 변경범위도 작아. 굳이 따지면 열화 판이지만··· 설명이 너무 유사해. 이 바이올린은 '무명의 운명'을 흉내 낸 것 같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이 무기의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능 바이올린 장인한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현존하는 이능 바이올린 장인은 한 명뿐.

워낙 찾는 사람이 많다 보니, 몸을 숨기고 사는 장인이다.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떤 수를 둬서 정보를 얻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실체화한 모습도 보고 싶어···!"

"저도요! 레나, 부탁드려요!"

눈을 반짝이며 카드를 관찰하던 김유리와 사월세음이 부탁하자 이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 떨린다···."

카드를 손에 쥔 이레나가 이능파를 흘리자 카드는 금색 몸체의 바이올린으로 변하였다.

턱받침판, 줄걸이판, 지판과 줄감개는 검은색이었지만 몸통 대부분이 황금색.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백금색으로 보이기도 하는 오묘한 색을 가진 예술품 같은 바이올린이었다.

"예쁘다···!"

"멋지네요! 어떤 소리를 낼지 궁금해요!"

이능 바이올린에 눈을 떼지 못하던 이레나가 주저하다 말했다.

"활은 지금 없어서 아르코 주법은 못 하지만··· 피치카토는 가능한데, 들어볼래?"

"손을 사용하는 주법 말하는 거지? 권제인 선배님이 첫 곡 연주하실 때 쓰시던 거!"

"듣고 싶어요···!"

"나도."

김유리와 사월세음의 열렬한 요청과 내 한마디가 덧붙여지자 이레나가 바이올린을 품에 안고 현 위에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외엔 아무도 없는 1학년 산책로 야외 휴게실.

조명이라곤 달하고 가로등밖에 없는 이곳.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현을 튕기는 이레나를 보며 우리 셋은 숨을 죽여 감탄했다.

'지금 이레나가 연주하고 있는 건 오늘 연주회에서 발표된 권제인의 신곡인데. 고작 한 번 듣고 코드를 전부 따내고 암기한 건가.'

권제인의 완벽한 기교에 비하면 이레나의 연주는 아주 서툴렀지만, 음계는 정확했다.

권제인의 신곡에서 피치카토 부분을 모두 연주한 이레나가 수줍어하는 얼굴로 현에서 손을 뗐다.

짝짝짝―!

우리 세 명의 관객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박수를 보냈다.

"멋진 연주였어요!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고 연주할 수 있죠?"

"몇 시간 전에 세상에 처음으로 발표된 곡이잖아? 굉장해···!"

"박자도 다 맞았던 것 같은데. 활로 연주하는 것도 듣고 싶어."

이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맙다고 인사하곤 이능 바이올린을 꼭 끌어안았다.

우리는 김유리의 통금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얘기하다 해산했다.

나비령이 남긴 여섯 개의 단어.

무명의 운명과 유사한 아이템을 제작한 장인.

생각해야 할 게 많았지만, 오늘은 연주회의 여운을 즐기고 싶었다.

고찰은 내일의 나한테 미루기로 하고 평소처럼 꿈 없이 잠들었다.

***

한밤중.

은광고 교문.

정문 너머로 보이는, 은은하게 조명을 밝힌 은광고 시계탑.

그 앞에 기분이 지나치게 좋아 보이는 얼굴의 용제건이 서 있었다.

용제건이 정문의 결계를 통과해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이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토윤 씨, 마중 나왔어. 토연 씨는?"

칼같이 약속한 시각에 맞춰 은광고에 도착한 토족 최고의 전사 옥토윤.

그녀는 지나치게 들뜬 분위기의 용제건을 보니 마음이 불안해져 발을 돌리고 싶어졌다.

저 용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옥토연이라면 저 얼굴을 보면 바로 불길한 예감이 드니 집에 가겠다고 징징대기 시작했을 거다.

'···토족의 대표로 왔으니 일을 해야지.'

옥토윤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표정을 숨기고 사무적으로 답했다.

"오랜만이야, 제건 씨. 토연이는 6월 중순까지 은광구에 접근 못 해."

"왜? ···아, 또 토연 씨가 황호 씨의 신경 건드린 거구나."

"공간의 용, 당신은 여전히 감이 좋네."

"감이라기보단 이건 경험에 근거한 생각이야. 토연 씨의 월궁계도도 직접 보고 싶었는데."

용제건은 옥토윤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정문에서 은휘관까지 거리가 좀 있어, 눈에 띄게 이동하고 싶지 않아. 손 좀 빌려줘."

"그래. 이동은 맡길게."

옥토윤이 손을 얹자, 공간술로 기척을 차단한 용제건이 은휘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휙―

걷는다고 표현했지만, 용제건이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주위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어 갔다.

공간제어력과 신체 능력을 이용한 이동법으로 추측되지만, 원리를 알더라도 흉내 내는 건 불가능하리라 옥토윤은 추측했다.

'이게 황호와의 교원 계약으로 묶여 있는 상태라니···! 용왕신이 가장 아끼던 여의주에서 태어난 총아(寵兒)는 다르구나.'

지금 자신이 용제건과 싸우면 어떻게 될까.

만전의 상태라면 옥토윤이 필패할 것이다.

아직 만우절에 입은 부상의 후유증이 남은 옥토윤, 은광고 교내에서는 힘이 묶이는 용제건.

이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궁금한데.'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용제건이 옥토윤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토윤 씨. 대련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나한테 지면 토족 본거지 구경 정도는 시켜줘야겠지만."

"용족하고 우리는 교류가 없어서 곤란한데."

"토윤 씨가 나랑 대련하고 싶은 건 사실인가 보네."

탁!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말투가 기분 나빠 옥토윤은 용제건의 손을 놓아버렸다.

마침 은휘관 앞에 도착해, 미아가 될 일은 없었다.

보안 체크를 거쳐 도착한 은휘관 응접실.

안은 시끄러웠다.

"표를 갖고 계셨다면 진작에 말씀하셨어야죠! 긴장했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데!"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 아닌가요? 왜 저희가 은휘관에 왔어야 하는 거죠?"

"개인적으로 명상을 하면서 권제인 양의 연주를 되새김질하고 싶은데요. 빠른 퇴근을 희망합니다."

"옳소! 저희는 지금 인간 호적도 갖고 있으니, 인간이 정한 표준 근로 시간을 준수해주십시오! 황호 님!"

안에 있는 건 진족 넷.

대화의 내용상 전원 호족인 듯했다.

'인간이 정한 표준 근로 시간? 그런 건 인간들 사이에서도 잘 안 지켜지는데.'

옥토윤이 그렇게 생각하며 응접실로 돌아갔지만, 네 명의 호족은 한 번 이쪽을 흘끗 봤을 뿐.

결계를 재구축 중인 듯한 황호를 향해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황호는 짜증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저 말 많은 호족들을 내버려 두고 있었다.

'황호가 저걸 참아주고 있다니. 아끼는 호족인가.'

그때, 복도 너머로 인간 몇 명이 이곳을 향해 오는 게 느껴졌다.

쉬지 않고 구시렁거리던 호족 넷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문을 노려봤다.

'왜 저러지?'

지금 접근 중인 인간이 위험한 존재인가?

옥토윤이 전투태세를 갖추며 문을 주시할 때.

자동문이 열리자 금발의 외국인 남성과 푸른 눈의 한국인 여성이 나타났다.

호족 넷이 한국인 여성 앞으로 달려들거나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며 탄성을 질렀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권제인 양이었어···."

"세상에···! 바이올린 천재인 줄만 알았는데 실물도 천재야!"

"패, 팬입니다! 은광고 재학 시절, 연주회 하실 때마다 빠짐없이 들으러 갔습니다."

"저도요! 특히 1학년 때 청랑호에서 짝을 잃은 혼을 달래신다며 진혼곡을 연주하시는 모습! 아직도 동영상으로 간직하고 시간 날 때마다 봅니다."

"···야, 내가 전에 데이터 복사해달라고 할 때 잃어버렸다면서!"

"너도 저번에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콘서트 블루레이 한정판 안 보여줬잖아!"

토족과 용족을 공기 취급하던 이들이 인간 앞에서 완벽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로에게 살기를 내뿜는 이들.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질 때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쫓아내기 전에 넷 다 닥쳐."

황호의 말에 호족 넷은 즉시 닥쳤다.

권제인이 있는 공간에서 쫓겨나기 싫은 모양이었다.

"전원 도착한 것 같군. 접족의 대책은 끝냈다. 이능 패턴이 수시로 바뀌는 것 같으니, 은휘관 밖까지 결계를 확장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곳은 지금 안전해."

"···접족?"

옥토윤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황호가 답했다.

"달토끼의 전사는 그 자리에 없었지. 접족이 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어. 대담하게도 은광고 결계를 뚫고서."

황호의 황금색 눈에는 아직 노기와 불쾌감이 남아있었다.

황호는 이곳에 있는 용제건, 옥토윤, 권제인, 재러드 리의 얼굴을 한 번씩 둘러보고 말했다.

"인사가 늦었군. 은광고에 온 걸 환영한다. 내가 호족의 수장, 황호다. 오랜만이구나, 권제인."

"안녕하세요. 당신은 황명호 이사님, 아니··· 지금은 이사장님이셨죠. 그분의 젊은 시절을 닮으셨군요."

"닮은 게 아니라 본인이야. 황명호라는 이름도 쓰고 있어. 황명호의 모습으로 너와 몇 번 대화도 했었지. 네 연주를 직접 들은 건 처음인데, 아까운 짓을 했어.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많이 들어둘걸."

많이 쳐줘야 30대 중반 정도의 모습을 한 황호가 말했다.

권제인은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조금 눈을 크게 떠 놀라움을 표했다.

"본론부터 이야기할까. 왜 우리 호족에게 연락한 거지?"

"나비···, 접족을 찾고 있어요. 호족과 협력하고 싶습니다."

"접족이라."

황호는 김신록이 캐낸 '미물'의 존재를 떠올렸지만, 미물에 관한 정보를 아는 건 호족의 일부와 조의신뿐.

왜 권제인이 호족을 찾아왔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황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한 듯, 용제건이 말했다.

"그건 내가 설명할게요, 황호 이사장님."

이 자리를 주선한 용제건이 자신이 떠올린 '감'에 대해 설명했다.

"용제건, 네 감이 잘 맞는 건 알아. 그래도 근거가 부족해."

황호는 권제인을 보고 있었다.

보통 인간과는 다른 사고패턴을 보이는 변덕스러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한 권제인.

하지만 권제인의 재학 시절 황호가 주목한 건 그녀의 우수한 플레이어로서의 면모와 신중함이었다.

그 나비라는 걸 잡는다고 영국에서 계속 움직이지 않던 권제인이 용제건의 말 하나에 바로 한국으로 왔으리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권제인이 이렇게 서둘러 움직인 이유는 또 있을 거다.'

황호의 시선을 받던 권제인.

권제인이 재러드 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호족은 그동안 모든 일에 미온적인 대응을 보였죠. 그래서 두 진족이 반목하는 걸 알면서도 신뢰하지 못했었어요."

"···무슨 말이냐."

"맨체스터 대이계공략 하루 전, 그 당시 플레이어 협회 영국지부는 진족에 의해 습격을 받아 궤멸 상태에 놓였어요. 주요 프로 플레이어 팀이 지원하고, 무수한 전사자가 나왔습니다. 그 탓에 이계 공략이 아주 더뎌졌죠."

"그래, 당시 영국의 협회와 진족 간의 관계는 최악이었어. 언제 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

"저희 팀은 당시 습격에 참여한 진족을 생포했습니다. 운 좋게 스스로를 영물이라 칭하는 진족의 조력을 받아 10년이 넘는 정신 조작과 분석 끝에 단서를 잡았어요."

권제인은 잠시 말을 쉬었다.

"사로잡힌 진족은 한반도 출신의 웅족이었어요. '그분'이라는 존재의 명령을 받고 협회를 습격했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