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오 그룹 소유의 섬, 주오 아일랜드.

이계 충돌로 인해 세계가 변하며 섬 거래 규제가 풀리자 주오 그룹은 무인도를 몇 개 사들였다.

주오 그룹은 입지가 가장 좋은 섬에 ‘주오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비영리 목적의 리조트를 세웠다.

이 리조트의 존재 목적은 오로지 주오 그룹이 선별한 VIP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것.

주오 그룹과 연이 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고 유명해도 주오 아일랜드에 방문할 수 없었다.

예전에 키모폴레이아호가 불의의 사고로 회항을 결정했을 때, 안도하는 이들보다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주오 아일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청소년 수련회를 주오 아일랜드로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주수혁은 통 크게 청소년 수련회 일정대로 3박 4일간 주오 아일랜드를 전세 내 1학년 0반, 1반, 2반 학생들과 교사진을 초대했다.

아무리 현 주오 그룹 총수의 증손자라 해도 바캉스 시즌에 이렇게 주오 아일랜드 전체를 빌리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역시 타이틀 히어로답다.

‘여름 방학 때 주수혁의 입지가 올라서 그런 걸까.’

여름 방학 사이, 주수혁은 적극적으로 이계 공략에 나섰다.

물론, 단순히 이계 공략만 한 게 아니었다.

만년설 속에 묻힌 별장의 비밀, 어느 진족의 가든이 남긴 잔해 정화, 가출 사건으로 위장된 연속 유괴 사건의 해결 등등.

그의 멘탈을 터뜨리는 사건과 인물 중 일부가 1학기 사이에 제거된 탓일까.

주수혁은 게임 속에서보다 더 타이틀 히어로다운 행보를 보이며 성장하고 있었다.

앞으로 요 며칠 동안 성장한 타이틀 히어로의 호의에 기대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명목은 청소년 수련회지만, 이번 건은 기합도, 강제로 짜인 스케줄 같은 것도 없는 단순한 여행이니까.

“얘들아, 우리 왔어!”

천자(天子)의 갑판에 설치된 2단 파라솔 아래.

김유리가 팔을 힘차게 흔들며 등장했다.

김유리는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손목에는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은 덕에 길게 뻗은 팔이 태양 아래로 드러나 있었다.

아직 김유리는 광림을 완전히 제어할 수 없었고, 공격 스킬을 사용할 때 실리는 이능파를 조절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황지호가 붙여 줬다는 수석 주술사의 지도가 유효했는지,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이능파를 억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김유리를 마중 가기 전, 황지호가 이렇게 말했다.

—당분간 김유리의 주변을 감시할 거다. 본인의 동의는 받았다.

—김유리의 활동 범위는 신역 은광고 안으로 제한할 생각이다. 신역 밖으로 나갈 때는 수석 주술사나 그 이상의 이능술사를 붙일 거다.

황지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덧붙였다.

—뭐, 이번 여행은 이 몸도 가니까 문제가 없지.

지나치게 자신이 넘치는 태도에 눈꼴이 셨지만 저놈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지켜 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

김유리가 반 아이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있으니 보고 있는 나도 즐거워졌다.

‘광림 봉인술식이 사라진 후에도 김유리가 계속 긴소매 옷을 입었던 게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이다. 이제 괜찮은 것 같네.’

김유리 뒤로는 우리 반 아이들이 몇 명 보였다.

저번에 천자(天子)에서 몸이 좋지 않던 김유리를 돌보느라 선실에 있던 권레나.

그날 은광한빛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느라 자리에 없던 한이.

아이들 가운데에서 AR 글래스와 후드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민그린까지.

천자(天子)를 처음 오르거나, 청소년 수련회 당시 배 구경을 하지 못했던 아이들이었다.

‘황지호가 천자(天子)를 빌려주다니. 좋은 생각을 했네.’

청호의 제자들이 매일 보육원에서 상주하며 잡일을 하고 있으니 일손이 넉넉해져 한이도 이번 여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민그린은 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먼저 가고 싶다고 말을 했다.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다 은광고 사람들이잖아. 우리 반 애들도 다 가니까 나도 가고 싶어.

미술부는 괜찮은 것 같지만, 면식이 거의 없는 1반, 2반 아이들은 아직 대하기 힘든지 민그린은 반 아이들 사이에 숨어서 다녔다.

반 아이들과 후드 모자, AR 글래스와 송대석에게 의지하고 있긴 했다.

그러나 민그린이 중간고사 첫날 처음 만났을 때 일곱 명이 많다고 도망치던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성장이었다.

민그린은 가끔 뒷걸음질 치거나 멈춰 서기도 했지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 갑판에서 사진 찍자!”

“함근형 선생님 모셔 올게.”

“세음이는 어디 있어?”

“부담임이랑 비행한다는데.”

하늘 위에서는 용제건과 사월세음이 배의 속도에 맞춰 날고 있었다.

용제건은 청소년 수련회 당시 크루저, 천자(天子)에 오르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열심히 돌아다니며 놀았다.

천자(天子)에 오르는 건 처음이라는 용제건은 김신록에게 안내해 달라며 귀찮게 굴었다.

김신록은 ‘바쁘니까 꺼져, 학생들 앞에서 친한 척 좀 하지 마.’라는 의사 표현을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돌려 말했지만 용제건은 열심히 들이댔다.

착한 사월세음이 안내역을 자청하고 배의 이동 속도에 맞춰 비행 스킬을 컨트롤 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며 다행히 일단락됐다.

그런 용제건이 있지만, 현재 우리 반에는 용제건보다 더 강력한 트러블 메이커가 있었다.

“저기, 우람이는 괜찮아?”

권레나가 걱정스럽게 묻자 아이스팩을 얼굴에 얹어 두고 있던 목우람이 몸을 번쩍 일으켰다.

목우람은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다시 선베드 위로 뻗고 자진해서 아이스팩을 머리 위에 덮었다.

기절하지 않은 걸 보니 권레나에게 조금 익숙해지긴 한 것 같았다.

“안 괜찮은가 봐.”

“저 새끼는 어디 아픈 거 아니야?”

“하하하! 목우람은 멀쩡하다.”

아마 권레나가 말을 걸지 않는 한 괜찮을 거다.

억지로 목우람을 일으켜 세우기도 뭣해서 우리는 볕이 잘 드는 갑판에서 한 번, 목우람이 뻗어 있는 선베드 근처에서도 단체 사진을 찍기로 했다.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목우람의 사진을 남기는 건 과연 본인을 위한 일일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권레나와 같이 찍힌 사진이니 목우람도 좋아할 거다, 아마도.

“김신록 선생님, 사진 좀 찍어 줄래?”

“……은광고에서 지급한 디바이스에 자동 촬영 기능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누가 직접 찍어 주는 것과 다르잖아. 반 아이들과 찍는 단체 사진인데.”

비행을 마치고 등장한 용제건이 그새 건수를 잡아서 김신록에게 말을 걸었다.

김신록은 평소대로 사람 좋은 교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눈빛이 점점 음산해 지고 있었다.

김신록은 당장이라도 용제건의 혓바닥에 압정을 꽂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반면에 용제건은 특유의 황홀한 얼굴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나서 죽는 얼굴이었다.

‘용제건이 이런 성격이었나?’

용제건은 게임 속에서 봤던 것보다 더 장난기가 넘치고 활기찼다.

오랜 친우가 플마고의 전개와 달리 살아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용제건은 김신록이 후예인 걸 밝히고 다녔으면 하는 것 같은데.’

황명호 대저택에서 김신록의 진짜 얼굴을 봤을 때 용제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이 얼굴은 처음 보는 거야? 이쪽이 진짜 얼굴이야. 훨씬 낫지? 신분을 계속 바꾸다 보니 얼굴도 바꾸고 있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나처럼 드러내고 살면…….

그러나 김신록이 후예인 건 밝히더라도 본 얼굴을 드러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거다.

여전히 호족과 웅족이 대립하고 있으니 적호와 비탄의 웅녀를 빼닮은 얼굴을 세상에 보이는 건 현재 상황에선 어려울 것 같았다.

“이쪽에 서자!”

“어, 지금 사람 없다. 빨리 찍자.”

선베드 위에서 일사병 비슷한 것에 시달리는 중인 목우람을 제외한 아이들이 모여 섰다.

아이들 외에도 담임과 부담임, 함근형 선생님과 용제건도 함께였다.

“찍겠습니다. 셋, 둘…….”

눈을 감고 사진에 찍히는 걸 피하려는 듯, 아이들이 눈에 힘을 부릅 줬을 때였다.

김신록의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전, 황지호와 용제건, 함근형이 갑자기 김유리를 봤다.

‘이건……!’

김유리 주변에 묶여 있던 강렬한 이능파가 순간 일렁였다.

곧 김유리의 주변에서 강렬한 이능파가 뿜어져 나와 갑판 너머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이능파는 바닷물의 표면을 두드렸다.

파앗! 촤아악!

해수면이 잘게 흔들리다 이윽고 물기둥과 물보라가 크게 일어났다.

천자(天子)의 규모에 비해 작은 물보라라 항해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등을 적실 정도는 되었다.

“앗, 차거!”

“뭐야!”

반응이 늦은 아이들이 물을 뒤집어썼다.

일찌감치 물보라가 일어날 것을 눈치채고 이능파를 두르거나, 나처럼 반사적으로 이능파로 몸을 감싼 이들 몇 명만이 무사했다.

“하하하하! 다들 시원한가!”

“저 돌아이 새끼는 지 혼자 안 젖었네.”

“아니에요, 의신이도 안 젖었어요! 역시 의신이는 굉장해요!”

황지호는 이렇게 될 걸 알았는지 신나게 처웃었다.

바닷물을 뒤집어쓴 한이가 황지호를 가만히 쳐다봤다.

“…….”

“하하하하! 타올을 빌려줄까?”

“필요없어.”

“하하하하하!”

노친네가 좋단다.

저 꼴을 보니 한이가 청호였던 시절에도 대충 저러고 논 것 같았다.

청호의 제자였던 김신록이 복잡한 얼굴로 한이와 황지호를 보는 게 보였다.

하나는 스승, 하나는 삼촌 같던 존재인 호랑이들이 학생이 되어 저러고 있으니 기분이 묘할 것 같았다.

“얘들아, 미안…… 좀 장난스러운 상위 존재가 하나 있는데, 좋은 배경을 만들어 주려고 멋대로 이능파를 움직인 것 같아.”

가장 바닷물을 많이 뒤집어쓴 김유리가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물 주변에 가면 김유리한테 들러붙어 있는 물과 연관된 상위 존재들 탓에 이능파 컨트롤이 좀 어려워질 거다.

“유리가 한 말 대로야. 배경은 예쁘게 나왔어.”

“헐, 진짜네.”

“나도 볼래!”

송대석과 함께 찍힌 사진을 보던 민그린이 말하자 김신록이 각자의 디바이스로 사진을 보내 줬다.

김유리 쪽을 본 이들 때문에 대열은 조금 흐트러졌지만, 태양빛을 반사하는 물방울이 쏟아지는 광경이 환상적으로 보였다.

“한 번 더 해 달라고 하자!”

“유리만 괜찮으면 또 하면 안 될까?”

“맞아! 젖더라도 선실에 전신 드라이실도 있고, 날도 좋으니까 옷도 금방 마를 거 아니야.”

머뭇거리던 김유리가 웃으면서 답했다.

“응! 부탁해 볼게!”

김유리가 이능파를 다스리고 상위 존재를 어르는 동안, 반 아이들이 다시 대열을 짰다.

“일단 나도 이능파로 막아 볼까.”

“이능파 몸에 두르는 건 좀 어려운데.”

“하하하하! 결계를 쳐 줄까?”

그렇게 우리는 단체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목우람이 뻗은 선베드 쪽에서도 몇 장 찍었는데, 다행히 사진을 찍을 때 기절하지는 않아 그럴싸한 단체 사진이 나왔다.

‘지난번에 천자(天子)에서 찍은 사진이랑 비교되네.’

저번 청소년 수련회 당시, 천자(天子)에서 찍은 단체 사진에 찍힌 이들은 몇 없었다.

오지 못하는 사정이 있거나, 선실에 있거나, 허공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1학년 0반 소속원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그날 갑판에서 사진을 찍은 건 나, 황지호, 맹효돈, 사월세음, 송대석, 함근형 선생님 여섯 명뿐.

그 배가 되는 인물이 찍힌 단체 사진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진을 몇 번이나 쳐다보던 사이, 천자(天子)는 주오 아일랜드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