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조금 잃기는 했었는데, 차근차근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니 해가 지기 전까지는 지도로 우리들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길을 찾은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나는 E급 모험가가 됬을때부터 왔던 길을 기억해두는 훈련을 해 왔기 때문에 방향을 잡는 것에 무리는 없었다.

"완전 깜깜해 졌는데요."

어느덧 태양이 완전히 저버렸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산 속은 밤이 되면 한치 앞이 보이질 않는다. 밤을 밝힐 수단이 없다면 더 이상의 행군은 무리다. 노숙 준비를 해야한다.

물론 모험가들에게 노숙이란 일상이나 다름이 없다. 도시에서 돈이 없어서 마구간조차 빌리지 못하였을때, 퀘스트가 오래 걸려서 밤이 되었을때. 아니면 장거리 행군을 해야 할때. 노숙은 언제나 모험가들과 함께한다.

딱히 걱정은 없다. 이 미개척 지대에서의 노숙 경험은 익숙하니까.

야행성 몬스터들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놈들은 낮에 숨어지내는 좆밥인 놈들이라서 밤에 움직이는 것들이니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가장 까다로운 고블린 놈들도 주행성이고. 무엇보다 야행성 몬스터들은 불을 두려워한다. 불 피워 놓고 교대로 잠들면 끝.

"그럼 적당한 곳에서 노숙 준비를..."

ㅡ광명께서 어둠을 비추어 주시나니.

"홀리 라이트(Holy Light)."

"오오."

엘리제가 기도문을 읊자 엘리제의 머리 위에 작은 빛의 고리가 나타나서 주변을 밝혔다. 엘리제는 말 그대로 만능 서바이벌 수녀였다. 사제랑 수녀 진짜 개 씹사기 직업 아니냐. 범용성이 마법사 이상이다.

"지속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합니다."

홀리 라이트는 빛을 발하는 천사의 고리를 소환하는 주문으로서, 횃불의 대용품으로 쓸 수 있는 편리한 신성 스킬이다.

어두운 던전이나, 한밤중에 주변을 밝힐 수 있다는 장점과 더불어, 어느정도의 몬스터를 쫓아내는 효과가 있다. 이 신의 위광을 대부분의 몬스터가 두려워하거나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조금 강한 몬스터들은 이 빛을 보고 다가온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는데, 그런 몬스터들은 아직 본 적도 없다. 최소 오크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오크가 도시랑 2시간 거리 밖에 되지 않는 곳에 있을리가 없다.

"진짜 개 씹쌍타취입니다."

아무튼 감탄한 나는 박수를 쳤다.

"씨, 씹쌍타취...?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제 고향에서 쓰는 말인데 최고중의 최고라는 뜻입니다."

"그렇군요."

내 엉터리 설명에 엘리제는 한번 웃어보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몇가지 비속어와 인터넷 은어는 번역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손전등도 있겠다, 거침없이 진군한 우리들의 익숙한 수풀 지대에 도착했다. 역시나 왔던 대로 우회해서 돌아갔다.

아까 생각없이 기름을 다 써버렸는데, 조금만 남겨놨으면 횃불이라도 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 조금 아쉽다. 화섭자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로 모닥불은 피울 수 있어도 횃불을 만들기는 무리다.

"지속시간이 다 됬군요."

홀리 라이트가 꺼졌다. 여기까지 오는데 몬스터들의 습격이 없었던 것만 해도 다행이다. 밤중에 습격해 오는 몬스터들은 대표적으로 늑대와 자이언트 배트. 또는 임프 따위가 있는데, 약하긴 하지만 밤 눈이 밝아서 조명없이 싸우다면 까다로운 상대들이다.

"수녀님, 한번 더 못씁니까?"

"아쉽게도요."

그럼 이쯤에서 노숙을 준비 해야겠군.

"캇트님, 야영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죠."

나는 파우치에서 화섭자를 꺼내서 반으로 쪼갰다. 푸쉬식.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연기가 나면서 불이 지펴졌다. 이건 사실 말만 화섭자지 전혀 다른 물건이다.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번역이 된 듯하니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이 이세계 화섭자는 대나무 비슷한 나무 통 속에 어떠한 종류의 인화 물질들을 넣고 봉해서 만든 것인데, 이걸 반으로 쪼개면 안쪽에서 불이 피워지는 도구다. 왠만한 모험가들이 애용하는 필수품.

"마른 나무가..."

하지만 불 자체는 오래 가지 않기 때문에 주변이 밝아진 이 틈을 타서 마른 나뭇가지나 잎사귀들을 모았다. 엘리제의 도움으로 모닥불을 금방 완성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야전 경험이 많은 것이, 특전사라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럼 수녀님, 교대로 자도록 할까요. 순서랑 시간은 수녀님이 정하세요."

"불침번은 딱히 필요 없습니다. 잠귀가 밝거든요."

"음... 그런가요?"

불침번도 없이 이러 이런 곳에서 노숙을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지만, 거진 특전사나 다름 없는 엘리제가 하는 말이니 그냥 자기로 했다. 애초에 난 반쯤 목숨을 내놓고 사는 사람이라 뭔 일 터지면 그냥 뒈지면 그만이었다.

목숨은 분명 소중했지만, 요즘 그런 생각이 좀 잦아들었다. 사는 것이 참 팍팍하고 거지같으니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단 말이다.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원래한 목표가 있기는 했지만, 그딴 감도 안잡히는 꿈을 위해 살아갈 만큼 이세계는 녹록한 세상이 아니었다.

"수녀님 이거 덮고 주무세요. 저는 갑옷이 따뜻해서."

나는 엘리제에게 예의 그 코볼트 가죽을 내밀었다. 불길한 물건이고 나발이건 간에 자다가 추우면 입돌아간다. 최악의 경우 저체온증으로 뒤질수도 있었다. 이건 퀼티드 아머, 즉 패딩처럼 보온 기능이 뛰어난 천 갑옷을 입고 있는 내가 양보하기로 했다.

마음같아서 이거라도 벗어주고 싶기는 한데, 그럼 내가 너무 춥다.

"감사합니다."

가죽 보따리를 받아 든 엘리제는 쿨하게 안에 들어있던 코볼트의 두개골을 발치에 치워버리고 가죽을 몸에 둘렀다. 이교의 문장이 신경쓰였지만, 그딴 건 추위 앞에 무력했다.

"그런데 가죽이 조금 크네요, 같이 덮도록 하죠."

아무래도 깃발 역할로 쓸거라 조금 크긴 했다. 여러개를 기워 붙여서 그런지 품이 조금 남았다

"으으, 저는 괜찮습니다. 뭐랄까 그 가죽 조금 불길하지 않습니까? 저는 보기만해도 으스스하네요."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나는 미신을 신봉하는 경향이 있기에, 저금 꺼려졌다. 나는 다 큰 남자였지만 귀신을 무서워했다. 애초에 한국 문화 전반에 미신이 스며 들어 있지않던가. 그런 곳에서 평생을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직도 나는 머리를 북쪽에 두고 자지 못한다.

옛날에 다른 모험가한테 이런말을 하니까 바바리안의 미개한 풍습이라고 욕을 먹은 적이 있다. 근데 사실이네, 씨발.

"그러면 저한테는 왜 권하신거죠?"

"수녀님은 괜찮을거 아닙니까."

신성력 같은 걸로 보호 될테니. 나는 딱히 믿는 신이나 종교가 없어서 그런 악마적인 것에 대한 내성이 없다.

"...그냥 들어오십시오. 그 편이 더 따뜻할 겁니다."

"에잉..."

나는 엘리제의 옆으로 기어가서 남는 부분을 걸쳤다. 뭐랄까, 이 불길한 가죽을 덮고 있자니, 굉장히 불안해졌다.

"그럼 수녀님만 믿고 자면 되는건가요? 진짜 밤귀 밝으시죠?"

"뭔가 다가온다면 바로 깰 수준입니다. 그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씁, 그럼 자죠, 머."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나는 원체 잘려고 누워도 좀처럼 잠이 안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세계에 온 뒤로 부터는 하루도 안피곤할 날이 없어서 누우면 그냥 잠이 왔다. 잠이 안와서 고민이다, 뭐 이런건 등 따숩고 배부른 새끼들이나 하는 소리인것이다.

타오르는 모닥불의 소리를 자장가삼아 나는 잠들었다.

***

좆되는 악몽을 꾸면서 일어나니까 새벽이었다.

"시, 싯팔..."

다행히도 간밤에 몬스터들의 습격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잠을 설쳐서 그런지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저딴 좆박은 가죽 따위를 덮고 자는데 정상적으로 잘 수 있을리 만무하다.

"일어나셨습니까?"

"출발하시죠."

주변이 밝아지고 있는것이, 슬슬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다. 수통물로 간단히 세수를 한 나는 기지게를 피며 일어섰다.

"잽싸게 돌아가도록 하죠."

나보다 먼저 일어난 듯 보이는 엘리제는 이미 출발 준비를 마쳤다. 나는 코볼트 가죽과 두개골을 챙겼다.

지도를 꺼낸 엘리제가 앞장을 섰다. 그렇게 우리는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한시간 정도면 도착하겠군요."

드디어 도시로 돌아간다. 하루 좆빠지게 고생하고 1실버를 벌었다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 일주일 생활비가 30쿠퍼 정도 하니까, 이것만 있으면 3주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도 10쿠퍼가 남았다. 생각해보니 갈퀴버섯도 하나 챙겨오지 않았던가. 기뻐서 미칠지경이다.

"히히."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일 끝났으니까요. 수녀님도 좋지 않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좆같은 마데카솔만 안샀어도... 생활비 자체는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 않지만, 필요한 물품들이 값이 좀 나가는 편이다. 장비 하나를 살려면 저금을 좆빠지게 해야한다.

한참을 거르니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햇빛을 받으며 이형의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아닛!"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우리들에게 기어온 것들은 시꺼면 [자이언트 스파이더] 두마리였다. 도사견들보다 큰 이 거미들은 하급 몬스터긴 하지만 비주얼이 씹창이라 여성 모험가들이 극도로 기피하는 몬스터였다.

"일단 죽이겠습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가서 깨부숴버릴 듯한 흉흉한 기세로 엘리제가 모닝스타를 빼들었다.

"아니아니, 잠깐만요!"

엘리제가 팔을 높이 쳐들었다. 나는 경악을 하면서 팔을 붙잡았다.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녀석들의 등껍질은 대장간에 팔 수가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온전하게 뜯어낸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등껍질은 방어구의 재료가 되기 때문에 대장간에 가져가면 보통 1쿠퍼 정도로 판매를 할 수 있다. 물론 박살이 나거나 금이 간 껍질은 상품가치가 없다. 숙련된 엘리제가 모닝스타로 후려친다면 단번에 깨져버릴 분명할 터.

ㅡ퀴이익.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앞 발을 쳐들었다. 여덟개의 눈을 부라리며 벌렁거리는 독니 사이로 초록색 진액을 칠칠맞게 흘려대는 꼴을 보면, 제 아무리 엘리제라고 해도 기겁을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겁하는 쪽은 나였다.

"히익!"

난 징그러운거에 약하단 말이다.

꼴사나운 소리를 낸 나는 거리를 잰 다음 앞차기로 놈의 입을 걷어찼다. 퍼억! 박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독니 두개가 뜯겨져 나갔다. 말했듯이 나는 태권도 3단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경련했다.

"뒤졋!"

그리고 칼을 내리쳐서 뇌를 쪼개는 것으로 끝. 자이언트 스파이더는 그 흉한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전투력은 형편 없었다. 그냥 생긴 구조부터가 인간에겐 조금 불리한 것 같다. 물론 이 거미들이 성장해서 사람보다 커지기 시작한다면 나로선 손 쓸 도리가 없긴 하지만.

ㅡ퀴익!

다른 한마리가 내게 덤벼들었다. 어떻게든 내게 독니를 박아넣기 위해 약간의 점프를 가미해서 뛰어올랐다. 나는 간단하게 올려베기로 뛰어오른 놈의 입을 강타한 뒤에, 그대로 양손 내려베기로 끝장을 냈다.

"좋아."

완벽한 사냥이었다. 둘 다 등껍질에는 전혀 손상이 없는 퍼펙트 킬이었다. 나는 파우치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서 죽은 자이언트 스파이더들의 등껍질을 떼어냈다.

"끔찍하군요."

"너무 징그럽습니다, 수녀님."

등껍질을 떼어내면 그 안에 근육과 내장이 차 있다. 모험가들은 종종 이 거미고기를 먹고는 하지만, 그건 굶주릴때의 이야기다. 굳이 먹고싶지는 않다.

나는 능숙한 솜씨로 등껍질 두개를 다 발라냈다. 쩌억, 등껍질 안쪽에 늘러붙은 체액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실처럼 늘어졌다.

"수녀님, 이거 하나는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간직하실 필요는 없고, 팔아서 맛있는거라도 사 드세요."

등껍질 하나를 엘리제에게 내밀었다. 일종의 점수따기용 선물이다.

"음... 그러니까... 가,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등껍질을 받아들었다.

여자는 선물에 약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