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서쪽 성문으로 향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고역이지만, 이세계 생활 처음으로 다른 도시에 간다고 생각하니, 나름대로 또 기대가 되어서 특유의 피로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5일 간의 여정을 위한 준비는 어제 다 끝내놨다. 책도 반납했고, 파우치에 적당히 아껴먹으면 5일 정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건량도 구비해뒀다. 수통에 물도 꽉 채웠다. 그리고 최소 4일 동안은 노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무려 20쿠퍼를 주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낡은 망토도 하나 샀다.

ㅡ펄럭.

나는 몸을 세차게 틀어 멋지게 망토를 펄럭였다. 나름대로 간지가 났다.

사실 망토가 원래 이런 간지용이 쓰고 다니는게 아니라, 여행중에 담요로 쓸라고 쓰고 다니는 실용적인 물건인 것이다. 둘러 쓰고 있으면 바람도 막아주고, 잘때는 뒤집어 쓸 수도 있다. 방어력은 딱히 기대할 수 없지만, 유사시엔 팔에 감아 방패 대용으로 사용할 정도는는 되었다. 결정적으로 망토를 쓰고 걷고 있자니, 영락 없이 모험가 나부랭이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망토를 마구 펄럭이면서 서쪽 성문에 도착했다. 보니까 대충 짐마차 세대 정도가 대기하고 있었는대, 아마도 이것들이 이스반트행 아브넬 상단 마차인듯 했다. 기웃거리고 있으니까 멋들어진 깃털이 달린 초록색 모자를 쓴 중년인이 다가왔다.

"자네는?"

"아브넬 상단 분이십니까?"

딱 봐도 책임자 비슷한 사람 같았기에 나는 주머니에서 받았던 나무패를 건네줬다. 전전날에 받았던 무려 10쿠퍼나 하는 나무패였다. 60쿠퍼를 벌자고 소개비로 10쿠퍼를 내야 한다니, 이 새끼들은 전문적인 강도 새끼들이 틀림 없었다.

"우리 상단의 표식이로군. 상단 호위로 온 모험가인가? 반갑네."

"예, 반갑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캇트입니다."

그는 내 이름을 듣고 가지고 있던 명단에 체크를 했다. 그의 시선이 잠깐 내 머리로 옮겨졌는대, 아무래도 내 검은 머리를 신경쓰는 것 같았다. 야만족 핏줄의 증거인 검은 머리는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뭐, 상관 없겠지. 여기서 잠시 기다렸다가 마차가 출발하면 따라오면 된다네. 아마 곧 해가 뜰테니, 그때 출발할걸세. 미리 말해두겠지만, 도중에 도망을 치거나 체력이 달려 낙오를 하게 된다면 보수는 일절 지급할 수 없네."

"당연한거죠. 알겠습니다."

"전투중 부상으로 업무를 속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마차에 태워 도시까지 옮겨주고 5일치 보수도 전부 지급할테니, 싸울 일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싸워 주게나."

"아이고, 물론 열심히 싸워야지요."

중년인은 그리 말하고 돌아섰다. 기대를 배신하게 되서 미안하지만, 목숨 걸고 싸워줄 의리는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마차 호위'라는 것은 적으로부터 마차를 지킨다는 뜻이었다. 왜 마차를 지키겠는가? 마차에는 돈이 될만한 것들이 많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견물생심이라고 산 속에서 물건이 가득 담긴 마차를 보게 된다면 '아 씨발 저 새끼들 다 죽이고 내가 싹 다 가져갈까?' 하는 기가막히는 멋진 생각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강도들이나 산적과 비적, 몬스터 등이 습격해올수도 있었다. 탐욕앞에 사람이나 몬스터나 둘 다 똑같은 것이다. 내가 이 근방 치안이 어떤식으로 개판이 났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호위라는 것이 필요한 걸 보니 어느 정도의 전투는 있을 것 같았다.

가끔 투기장에서 체포된 산적들이 처형되는 꼬라지를 몇번 본 적이 있는데, 그런걸 보면 아마도 산적들이 활개를 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뭐, 산 속에서 몬스터가 안튀어나올 일도 없었으니까.

"아는 새끼들은 없나?"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모험가들이 주섬주섬 모여들었다. 그 수를 헤아려보니 대략 10명. 세상에. 호위 비용만 두당 50쿠퍼씩 해서 열을 곱해 5실버나 되었다. 믿을 수가 없는 액수였다. 확실히 마차를 호위하는대 5실버나 쓴다면 무엇보다 안전할 것이다. 사람 대가리가 열개나 되는대, 걱정할 거 뭐 있겠나.

모험가들은 힐끔힐끔 서로를 살피는 듯이 보였다. 나도 아는 얼굴들을 찾았는데, 딱히 말을 튼 녀석은 보이질 않았다. 열명이나 되서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두명 정도가 낯익을 뿐이다.

"이스반트행 아브넬 상단 마차 출발합니다!"

선두에 있던 마부의 외침과 함께 세대의 마차가 출발하고, 모험가들은 각자 그 양 옆에 서서 적당히 걸었다. 짐마차와 걷는 속도를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눈치껏 맨 뒤에 자리잡았다. 뭐가 됬든지간에 선두보단 선미가 나은 법이다.

성문을 나서고 정비된 가도를 나아간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들은 대게 정비가 되어있기 마련이지만, 일정이 5일이나 되는 것을 보면 중간부터 도로가 씹창나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금이야 이렇게 나들이 가듯이 걸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질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 없다. 내가 누구인가, 무려 육군병장 출신이 아니던가. 그때의 증오스러웠던 군생활이, 지금의 내겐 크나큰 도움이 된다. 행군 마스터인 내게 걷는 것 보다 쉬운 일이 세상에 또 없었다.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 요오~♬"

신이난 나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유혈사태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옆 도시를 관광하는 것은 일종의 덤이다.

조건이 괜찮다면 이스반트에서 새출발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신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당장만해도 그 위니아한테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걸렸던 위암이 1기쯤 진정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정도로 내 마음은 가벼워져 있었다.

늘 그렇듯, 불상사는 방심했을때 벌어지는 법이지만.

"휴식시간!"

그 누구와 대화하는 일 없이 정오 쯤 까지 걸었을까, 휴식시간이 되었다. 상단의 고용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신이나서 축 처진 표정으로 말에게 물과 여물을 먹였지만, 우리 모험가들은 그저 자리에 주저앉거나 대자로 뻗을 뿐이다. 정규 병사도 아니고 일당 10쿠퍼로 냉혹하게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니, 이런 호위 임무에서 모험가들은 그저 유사시 화살받이 정도로 싸게 쓸 수 있는 간편한 일회용품이나 다름 없다. 행렬에는 모험가들 말고도 무장 수준이 괜찮은 상단의 사병들도 따라 붙고 있었느대, 아마 이 놈들이 주 전력이겠지. 그들의 사람 좀 썰어 봤을 것처럼 생긴 흉흉한 낯빛들이 썩 믿음직스러웠다.

나도 자리에 주저 앉아서 물이나 마셨다. 물을 언제 뜰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벌컥벌컥 마셔서는 안된다. 입에 머급고 차근차근 입 안 전체를 적신다는 느낌으로 음미한 다음, 목구멍으로 천천히 넘긴다. 한번에 많이 먹어봐야 땀으로 다 빠져나간다.

그리하고 영양 보충을 위해 건량을 쪼개고 있자니,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음?"

어쩐지 누군가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상남자 특) 걸어온 눈싸움 안피함. 그래서 나도 빤히 쳐다봤다. 체구가 작은 걸로 보아하니, 어렸을때 조금 굶주렸던 친구인가 싶어서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량을 나눠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대,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이 새끼... 한입충인가?"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네? 누구시죠?"

어쩐지 나를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생각을 해 봤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그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찰랑거리는 금빛 머리에 약간 중성적인 느낌이 드는 듯한 선이 얇은 얼굴. 만일 이 새끼가 바텀알바(Bottom Arbeit)라도 뛰고 있으면 납득이 될 것만 같은 그런 생김새였다.

뭐? 바텀알바? 이 십새끼 지금 초면인 사람을 상대로 이 무슨 실례되는 생각이냐, 라고 적잖히 내 도덕성에 대해서 질타를 날릴 수도 있겠는대, 이새끼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꼬라지를 보면 그 생각이 싹 달아날 것이다.

"쟈일로라고 합니다."

"아... 저는 캇트라고 하는대요. 뭔가 볼 일이 있습니까?"

나는 의문을 담아서 물었다. 남자 주제에 제법 상큼하게 생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허리에 칼을 찬 걸 보면 이 녀석도 나랑 같은 모험가겠지. 내 물음에 쟈일로라고 하는 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종교에 관심있습니까?"

"예?"

"믿고 있는 종교가 있나요?"

"예? 머라구요?"

순간 나는 이곳에 한국에 있는 대로변인가, 하는 착각을 느꼈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옆에 있는 중세풍의 마차만 아니었다면 아마 이곳이 한국인지 이세계인지 구분이 안될 지경이었다. 아니, 지금 이거 도를 아세요인가? 그 정겨운 울림에 고향의 향기인 매연냄새가 떠오를 뻔 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없는 모양이군요."

"..."

"험한 세상입니다, 종교가 없으시다면 제 이야기를 들어보심이..."

"아 제기랄. 필요 없으니 돌아가시죠."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 새끼가 여자였으면 그냥 심심풀이로 이야기나 한번 들어봤을텐대, 남자라서 걍 거른다. 상남자 특) 남자는 거름.

왠 종교쟁이 때문에 귀중한 휴식시간을 빼앗길 뻔했다.

훠이훠이, 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그는 떠날 기미가 없었다.

"캇트님이라고 하셨나요? 캇트님이 선해 보이셔서 지금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이야기라도 들어 보시면 분명..."

"아니, 당신 뭐 사제야? 교회 다녀? 난 관심 없으니까 저기 옆에 엎어져 있는 저새끼한테 한번 가 봐."

폭탄을 돌릴 목적으로 맞은 편에서 누워있던 녀석을 조용히 가리켰다. 그런대 도대체 왜 이 새끼는 그걸 보는 척도 안하는 것일까.

"...이게 다 캇트님이 선해 보이셔서 그런겁니다. 분명 좋은 기회가 될 테지요.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심이 어떻습니까? 그리고 저는 사제가 아닙니다."

놈은 여전히도 웃으면서 내게 종교를 권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귀에 귀걸이가 하나 달려 있었는대, 아무래도 종교적인 심벌 같았다. 사제가 아니라더니,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꺼지질 않는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새끼... 설마 내 뒷구멍을 노리는건가?"

"오해입니다."

"오해는 무슨! 당장 꺼져!"

내가 발작하며 개소리를 포함한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놈은 아스팔트 바닥에 뿌리내린 나무마냥 움직이질 않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난 종교에 가입할 생각 따윈 전혀 없는 사람이다.

"제가 캇트님을 보고, 느낀 것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지 마시고, 이렇게 다툴 시간에 시간에 이야기를 들었으면 진작 끝났을 일입니다."

"쉬는 시간은 곧 끝날 것 같은데, 이 새끼야? 그리고 나도 널 보고 좆같음을 느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