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시체를 보는 것이 한두번도 아니었기에 나는 일단 챙길만한 것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RPG 게임에서도 유저가 사망하면 템을 떨구지 않았던가. 그 비슷한 원리로 무연고 사망자들의 유류품은 살아있는 자들의 차지가 되는 법이었다.

과연 던전까지 기어들어온 모험가라 그런지 장비 상태가 그리 열악한 편은 아니었다. 멋들어진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기는 했다만, 물론 몬스터들이 파먹느라 대부분이 찢어지고 뜯어져 특별한 가치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그 품속을 뒤져서야 겨우 지갑을 찾아내었고, 주변에 떨어져 있는 매끄러운 디자인의 나이프를 두개 발견했다. 주무장으로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어떤 새ㅡ끼가 던전 들어오는대 나이프만 들고 다녀?

지갑 안에는 대략 80쿠퍼 상당의 구리 동전들이 들어있어서 각자 20쿠퍼씩 나누도록 했다. 나이프는 품에 넣어 뒀다가 추후 팔아서 정산하면 될 것이다. 그 길로 바로 떠나려고 했는대 엘리제가 나를 잡아 세웠다.

"몬스터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이들은 연옥에 들게 됩니다."

"연옥 말입니까?"

"누군가 그 시신을 수습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그 말이 시체를 수습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임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솔직히 흉측하게 죽어 나자빠져 있는 시체를 만지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종교인인 엘리제를 배려해서 간단히 수습을 하기로 했다.

"수습의 방식은 시체에 대한 악의적인 모독이 아닌 이상 크게 구애받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손으로 수습을 한다는 것 그 자체지요. 그리하여 망자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나다."

"그렇군요."

그것을 수습이라고 해야할까, 간단하게 시체를 구석에 정위치 시키고 자세를 바로한 뒤에 그의 찢어진 옷을 이용해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망자에 대한 예의는 끝이 났다.

"길을 잃은 영혼을 본래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어..."

엘리제는 짧게 기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콥슨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엘리제에게 물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뭔가 축복 같은 것을 기대한 모양이었다. 내 생각에 단지 사람이 몇마디 주절거렸다고 해서 축복 따위가 될 리는 없었다. 엘리제도 그것을 아는지 콥슨에게 유감을 전했다.

아무튼 우리를 당초의 목적이었던 물소리를 향해 다가갔다.

"과연, 지하수가 흐르고 있었군."

"그러게 말이다."

제법 잘 만들어진 수로로 지하수가 콸콸 흐르고 있었다. 칼집을 이용해 깊을 재보니 무릎정도의 높이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몸을 담가도 괜찮을 수준인것 같았으나 어떠한 종류의 수중 생물이 들어차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물이 있으니 주변으로 몬스터가 모이는 걸까?"

"뭐 그러지 않을까 싶다만. 몬스터라도 물은 마셔야 하니까 말이지."

"일단 몸에 묻은 이 더러운 것들을 좀 씻고 싶은데..."

그 말대로 방금의 격전으로 온 몸에 이빨 구더기들의 체액이며 육편 같은 것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확실히 씻어내는 것이 정신 건강은 물론이고 육체적인 건강에도 이로울 것이었다.

우리들은 교대로 주변을 경계하며 간단하게 몸과 옷을 씻어냈다. 천에 물을 젹셔 옷을 닦아냈고, 머리와 얼굴을 씻었다. 잊지말고 수통에도 물을 채우도록 했다.

방패를 닦던 메리아가 말했다.

"음, 생각해보니까 물은 지하로 흐르는 법이지?"

"그렇겠지?"

"그럼 돌아갈 필요 없이 이 물길을 따라가면 지하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 그 편이 길을 기억하기도 더 쉬울테고."

"괜찮은 생각입니다."

그 말대로 세면세족을 끝낸 뒤에 수로를 따라 걸었다.

지하 3층 역시 딱히 볼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어둠속에서 흘러들어온 몬스터들이 제 나름대로 불쾌한 생태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계층이랄까, 당초 엘리제가 말했던 '조사'라는 것을 할 껀덕지도 없었고, 돈이 될만한 것 역시 찾아보기 힘들었다.

과연 4층에는 뭔가가 있을 것인가.

수로의 끝에는 커다란 석제 문이 있었다. 문에는 제법 정교하게 생긴 인간의 해골이 커다랗게 세겨져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해골은 별로 좋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법이다. 문 앞에서 세발자국 떨어진 콥슨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해골 문이라... 조금 불길하군."

"조금? 난 존나 불길해."

하지만 딱 봐도 뭔가가 들어있을 것 같지 않은가. 으레 던전은 깊숙히 들어갈 수록 큰 보상을 약속했다. 납골궁이라는 이름치고 여태 본 해골이라고는 방금 전에 봤던 시체 말곤 없었다.

문에 해골이 장식된 걸 보니 지하 4층이야말로 유골들을 안치해 놓은 곳이지 싶다. 그리고 보통 유골을 보관할때는 그들의 유품이나 망자를 위한 귀중품등도 함께 넣어두는 것이 관습이다. 내가 봤을때 이것이야말로 돈이 되는 부분이었다. 괜히 모험가가 도굴꾼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지.

"언데드."

유골과 언데드.

"언데드가 출몰한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던전에서 언데드들이 출몰한다는 정보가 있었지요. 제 주된 목적은 그것들에 대한 조사입니다."

엘리제는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파티를 찾았고 말이다. 코볼트 우상의 파괴 건도 있고, 이제부터가 본방 시작이다. 힘차게 문을 밀자 곧 자욱한 먼지가 일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콜록, 콜록. 여긴 공기가 안좋아 보이네. 오래된 창고 안에 들어온듯한 느낌이야."

메리아의 말대로 안쪽은 공기가 탁하다 못해 분진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설마 사람의 뼛가루라던가 하는 소름 끼치는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니다. 와, 숨만 쉬어도 칼슘이 보급되냐? 나는 헝겊을 꺼내서 얼굴 하단부에 감아 마스크처럼 착용했다.

"아, 빛이... 바바리안, 기름 더 있나?"

"벌써 다 썼나?"

"그래도 몇 시간은 쓴 것 같군."

랜턴의 기름을 갈았다. 몇시간은 지속된다던 랜턴이 다 닳은 것을 보니, 이제서야 던전 안에서의 시간이 실감이 났다. 콥슨은 본래의 불빛을 되찾은 랜턴을 들어올렸다.

다시 진형은 메리아를 선두로 콥슨, 엘리제, 나를 순서로 전진했다. 길의 폭은 문의 크기 만큼이나 넓었고, 질리지도 않는지 다시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 오른쪽?"

선두의 메리아가 말했다.

"..."

그러나 일행들도 긴장한 탓인지 섣불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어느 길을 하나 선택하고 진입했는대, 갑자기 앞 뒤에서 적들이 몰려오면 그대로 줄초상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별 수 있나. 그냥 오른쪽으로 가세."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니 방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우리들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ㅡ저벅저벅.

돌로 된 벽. 그리고 돌로 된 바닥.

오직 랜턴 빛에만 의지해서 이 먼지가 자욱한 공간을 걷는다. 말 그대로 본격적인 던전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것이다. 그리고 던전인 만큼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이 예정되어 있을 터.

한참을 걷다보니 메리아가 돌연 멈춰섰다.

뭔가를 발견했나?

"저기, 캇트. 저기 저거."

메리이가 칼로 정면을 가리켰다. 랜턴의 빛이 거기까지 닿지는 않아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ㅡ덜그럭, 덜그럭.

기어오거나 네발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다. 목을 쭉 빼고 눈을 찡그리며 보니까 대강 윤곽이 잡혔는데, 그것은 두 발로 서서 걸어오는 듯이 보였다.

"...다른 모험가인가?"

ㅡ꿀꺽.

던전에 들어온 다른 모험가들일지도 몰랐다.

많이들 오고가는 던전이니 안쪽에서 다른 모험가 파티를 만나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일단 인사를 해 볼까? 이곳에는 랜턴 빛이 있으니 저쪽은 우리를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먼저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쪽에서 갑자기 공격을 해 올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이 좁은 공간에서 모험가를 빙자한 살인강도들을 만난다면 한바탕 드잡이질을 하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증거가 남지 않는 던전 안에서의 살인강도질 모험가들끼리 술집에서 이야기하는 도시전설이 아니라 그냥 진짜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그들을 죽여 얻을 수 있는 전리품들은 군침이 도는 것이었지만, 무장한 사람들과 싸우는 이상 피해는 반드시 생기는 법이다. 이쪽에 믿을 만한 전투원이 넷이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계속되는 긴장 가운대 그것은 여전히도 천천히 걸어왔다.

"걸음걸이 느려..."

나는 느낀 바 그대로를 읊조렸다... 그런대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저 새끼들은 랜턴도 안들고 다니나?"

왜 저쪽에는 빛이 없지?

사람인 이상 어둠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랜턴이나 횃불, 또는 그에 준하는 것들은 필수였다. 설마 밤에도 낮처럼 볼 수 있다는 엘프들인 것인가? 엘프는 딱 한번 본적이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신비로운 존재들이었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군, 바바리안."

"동감입니다."

콥슨과 엘리제 역시 이상을 깨달았는지 말했다.

ㅡ덜그럭, 덜그럭.

몬스터일 수도 있었다. 그것도 이족보행을 하는 종류의.

머릿속에서 걸어다니는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들이 지나갔다. 고블린... 코볼트... 크기로 봤을때 그 중 무엇도 아닌것 같았다.

마침내 녀석이 우리의 시야까지 다가왔다.

그 모습이 드러났다.

"어, 엄마."

그것은 믿을 수가 없는 존재였다. 나는 얼굴을 본지도 벌써 몇년이나 된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스켈레톤입니다. 이로서 던전에 언데드가 출몰한다는 정보는 사실로 드러났군요."

ㅡ덜그럭, 덜그럭.

이 덜그럭 거리는 소리는 해골이 자신의 뼈를 부딪치며 걷는 소리였다! 해골이 지 혼자 처 움직이는게 말이 되냐, 이 씨발롬아!

"씨발! 해골이 걸어온다!"

언데드언데드 말만 들어봤지 진짜로 보니까 구라 안치고 존나게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산사람보다 그저 해골에 불과한 저것이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말 그대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죽은자가 되살아나서 움직이다니, 상식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리 겁먹지 마십시오. 저들도 본디 사람이었던 자들입니다."

"저들?"

ㅡ덜그럭, 덜그럭.

되살아나 걸어오는 해골은 하나가 아니었다. 각자 썩어빠지고 녹이 슬은 무장을 한 고대의 병사들이 침입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저편에서부터 몰려오고 있던 것이다!

"뭐, 좀비보다는 볼만하군."

"그러게~. 우리 고향에도 가끔 좀비가 나타나긴 했었는데, 걔들보단 덜 징그럽네."

"뭐? 뭐?"

그러나 콥슨과 메리아의 반응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르게 충격에 빠지지도, 겁을 먹지도 않았다. 마치 저렇게 되살아나 걸어다니는 것들이 지극히도 상식에 합당하는 존재라고 느낀다는 양 여유로워 보였다.

"기본적으로 하급 언데드는 생명을 가진 몬스터에 비해서 약해 빠졌으니까 말이지. 바바리안, 뭘 그리 겁을 먹었나."

"약해 빠졌다고? 명색이 되살아난 새끼들인대?"

"그럼 저기 근육도 없고 다 썩어 문드러진 뼈다귀 녀석들이 강해보이나? 힘은 근육와 뼈에서 나오는 법인대, 놈들은 둘 다 애자로군."

이것이 이세계인인 콥슨과 현대 지구인인 나의 차이였다. 그들은 이 판타지 세계의 사물을 어떠한 종류의 선입견 없이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경험과 삶의 방식부터가 달랐다. 콥슨의 말은 이치에 합당했으며, 맞는 말이었다.

나는 호러영화에 나올법한 스켈레톤들을 다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