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식으로 수련과 고뇌의 나날이 흘러갔다.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을 하면서 칼을 휘두르고, 마초가 되기 위해 근육을 단련했다. 그러나 그런 알찬 시간을 보냈음에도 아직도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춘기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었다.

카린의 말대로 역시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것 말고는 이 답답한 충동을 발산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확실히 길드에서 카린의 강습을 받을때는 아침부터 낮까지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냥을 한다거나 그럴 수가 없었다.

피를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무언가롤 쪼개버리거나 잘라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훈련을 끝내고 두르반을 찾기 위해 투기장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합법적으로 패버릴 수 있는 것은 두르반 말고는 없었으니까.

나는 그 어느때보다 강렬하게 두르반을 원했다.

드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여어, 바바리안 쉑. 여기서 뭐하고 있는가."

"뭐냐. 콥슨이냐."

"그럼 구누겠나. 진화가 덜 된 원시인으로 유명한 투기장의 스타께서 이 누추한 곳에 나타나셨군."

대충 골목에 몸을 숨기고 투기장을 주시하고 있었더니, 이게 웬걸. 나타난 것은 두르반이 아니라 콥슨이었다. 그는 껄렁거리는 팔자걸음을 과도하게 흉내내며 양 손을 주머니에 쑥 집어넣고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투기장의 스타라. 그것도 옛 말이었다.

지금의 나는 은퇴 검투사다.

"그 애꾸 오크와의 대결은 정말이지 굉장하더군. 설마 돌을 던져 이길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네. 전대미문일세. 아무튼 다음 경기에는 무엇을 상대하나? 오크를 잡았으니, 설마 다음은 트롤이라도 상대하는것이 아닌가? 하핫."

트롤은 뭔 씨팔.

벌버자도 존나 힘들게 잡았구만.

그러고보니 그때 이후로 콥슨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 투기장 관뒀다."

"뭐라? 갑자기 왜?"

그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르반이 내 뒤통수를 쳤거든. 아 씨팔, 맞다. 두르반 어디 있는지 알아? 그 새끼 죽이러 가야 되는데. 니랑 친구잖아."

"두르반이 뒤통수를 쳤다는게 대체 무슨 말인가. 설명해보게."

나는 콥슨에게 두르반이 행한 만행에 대해서 설명했다.

두르반은 응당 내게 상대방으로 노련한 오크 처형자인 벌버자가 나온다고 설명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의 뽕을 뽑기 위해 내게 설명하지 않고 도망쳤다. 그래서 뒈질뻔했다. 상대가 오크인줄 알았다면 그냥 좆까고 뛰쳐 나왔을 것이다.

자갈이 아니었다면 아마 50~60% 확률로 뒤지지 않았을 싶다.

두르반은 반 정도는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나 다름 없다.

거의 뭐 살인 방조죄다.

"생각보다 쉽게 승리한 것 처럼 보였는데, 알고보니 그런 뒷사정이 있었군. 하지만 아쉽게도 두르반의 소재지는 모른다네. 그냥 술친구였을 뿐이지. 나도 마침 술이나 마시자고 권유하기 위해 투기장을 찾아왔는데... 찾을 수는 없더군. 그러다 보니 네 녀석을 발견한 것이지."

콥슨 역시 두르반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이상한 부분에서 마음이 맞았다. 뭐, 마침 오랜만에 만났겠다, 나는 콥슨과 같이 근처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ㅡ솨아아.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었다. 하얀 석재로 바닥을 포장해 둔 것이 전반적으로 깨끗한 느낌이다. 대충 의자를 하나 잡아서 둘이 앉았다.

"그래서. 오늘은 왜 그렇게 우울해 보이나? 기껏 친구가 된 두르반한테 뒤통수를 맞아서 그런 것인가? 원한다면 린치에 동참해주지. 흐흐. 그 새끼가 술값을 삥땅 처먹은 적이 있거든. 사실 오늘도 고주망태로 만든 다음 독박을 씌울 생각이었지."

옆에 앉은 콥슨이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물론 빼앗은 돈은 반으로 나누는걸세." 라고 덧붙이는 걸 보니, 그의 우정에 대한 기묘한 생각의 편린이 엿보이는것 같아서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냥... 여자 문제로 생각할게 많아서."

"뭐라?"

"여자 두 명이 나보고 좋다는데, 진짜 어카냐."

"이 씨팔.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것인가?"

카린이랑 반응이 똑같네.

"걱정해서 손해봤군! 몹시 기분이 상하고 말았어...! 꺼져라 바바리안!"

쏘아뱉듯 말한 콥슨이 벌떡 일어나서 제 갈길을 가버렸다.

아니, 이 씹새 진짜 간단 말이야?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렇듯, 자신에게 진지한 고민이라고 할지라도 타인에겐 별 좆도 아닌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잠깐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숙소로 돌아가야지.

다시 거리를 걸었다. 점심때가 된 관계로 이곳 저곳에서 음식의 향기들이 풍겨왔다. 배고픈데 뭐 좀 처먹고 들어갈까... 아니. 그냥 가서 클라우디랑 먹어야겠다. 아쉽게도 두르반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 숙소에 도착해 문을 슬쩍 열었다. 나올때도 자고 있었으니, 아마 지금까지도 자고 있지 싶다. 들어가서 보니까 아직 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까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챘는지,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였다.

"으응...? 왔어?"

"왔다."

눈을 비빈 클라우디가 몸을 일으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은 정말이지 탄력적으로 보였다. 건강미가 넘쳐 흘렀다. 나는 클라우디 한명이면 충분한데... "후으으." 기지게를 피운 그녀가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지쳐 보이네? 꼬추 만져줘?"

"아, 아냐. 지금은 괜찮아."

"...아직도 마음이 불편해?"

"그럴리가. 이미 다 털어냈어."

걱정스럽게 묻는 그녀에게 그냥 괜찮다고 말을 했다. 요즘 계속 이런 상태다. 그래도 클라우디는 이런 병신 그 자체가 된 나를 위로해줬다. 그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글쎄, 내 눈엔 안 괜찮아 보이는걸?"

"괜찮어. 이제 끄떡 없다고."

"흐응... 조금 오래가네. 캇트. 거짓말 해도 안 통해."

"..."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가 속옷을 챙겨 입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옷 벗지 말고."

그러고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간단하게 씻고 나온 클라우디가 옷을 입었다. 나갈 생각인가?

"배고프지? 밖에 나가자."

"...그려."

그렇게 클라우디와 외출을 하게 되었다. 보통 둘이 안에 있으면 하루 종일 섹스를 하거나, 아니면 하루종일 섹스를 하는 것 말고는 없었기에 같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조금 오랜만이었다.

"캇트. 솔직히 나는 네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네가 그렇게 까지 고민을 하는 것이 잘 납득이 안가."

"나도 그래."

내게 팔짱을 껴오며 클라우디가 말했다.

"그러긴 무슨.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냥 있는대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아? 물론 네 생각은 존중해.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

"그냥 네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캇트 너는... 좀 바보같은 면이 있기는 해도 믿음직한 전사야. 사소한 것, 이라고 말하면 화내려나? 하지만 말하게. 그런건 사소한 문제일 뿐이야. 진정한 전사라면 자신의 생각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야 하지."

나긋나긋한 어조였다. 내 기분을 신경쓰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 하는 것에서 배려심이 느껴졌다. 괜히 나 때문에 걱정을 하게 만든것이 너무나도 미안했다.

"맞는 말이야. 그냥 내 성격이 좀 답답할 뿐이야... 고마워. 그렇게 얘기해 줘서. 그리고 미안하네. 괜히 걱정하게 해서."

"아니. 괜찮아."

클라우디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캇트 네가 그렇게 힘들어한다면, 그래. 아예 그냥 다른 여자 따위는 쳐다도 보지 못하게... 내 뜻이랑은 조금 다르지만,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하지만 이미 책임을 느껴버린거잖아? 그 마법사 아가씨한테."

"어쩜 그렇게 내 맘을 나보다 잘 알고 있냐."

"사랑하니까?"

"크으..."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건 공격력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한다.

"발기했어?"

"네."

"후훗, 그래도 밖에서는 안돼. 아, 저기로 들어가자."

그렇게 대화를 하면서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했다. 공복이었음에도 밥이 잘 넘어가질 않았다. 왜 이러니, 진짜. 나는 역시 마초가 아니라 걸프린세스인걸까? 확실히 어릴적의 나는 인형 옷입히기를 즐겨 했었다.

아버지의 영향이다.

전성기의 사춘기 소녀도 연애 문제로 이렇게 고민하진 않을 것이다.

"자, 아앙."

"아앙."

"정말, 이건 안되겠네."

고민속에 거의 클라우디가 먹여주다시피 해서 식사를 끝마쳤다.

"이거는 중중이야. 빨리 해결을 봐야겠어."

"내가 봤을땐 시간이 알아서 해결..."

"벌써 충분히 지났다구. 해결이 됐으면 진작 될 시간이지. 아으, 이걸 어쩐담. 해결을 볼려 해도 정작 그 당사자가... 아."

식당의 밖으로 나온 클라우디가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어디 갈 곳이라도 생각났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그리 도착한 곳은 모험가 길드였다.

"저기 있네. 이럴것 같더라."

"으응? 누가 있... 아."

턱짓한 곳에 서 있는 것은 위니아였다.

여태까지 그랬듯이, 위니아는 길드의 앞에서서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사실 내가 어디 살고 있는지 모르니 만나기 위해선 이렇게 길드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가서 이야기 좀 하고 와. 보니까 계속 기다리고 있었네. 캇트 너를."

클라우디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미안함을 씹으며 위니아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내니, 그녀가 나를 돌아 보았다.

"위니아."

내 얼굴을 본 위니아가 환하게 웃었다.

"깜둥이 왔어?"

"...기다리고 있었던거냐."

"응. 어제도. 그저께도. 그리고 그 전날에도. 여기 있으면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드디어 만났네? 깜둥이 나 안보고 싶었어?"

"..."

"난 깜둥이 많이 보고 싶었어."

헤어진 뒤로, 매일같이 길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구체적으로 조직의 공금을 횡령한 탓에 공구리를 당해서 태평양 한가운대에 빠져드는 것 만큼이나 무거워졌다.

씨팔 살려줘요, 보스!

진짜 앰창까고 조직의 돈을 빼돌린 것은 자의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

위니아랑 헤어진 이후로 검사길드에서 훈련을 하느라 모험가 길드 쪽으로는 올 일이 없었다. 어쩌면 그 나날동안 전부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말... 해주면 안돼?"

"후. 나도 보고 싶었다."

"다행이네."

불안한듯 움츠러든 위니아가 내 말에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보니까 만난 뒤로 지금까지 욕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 그때 이후로 더 순해진 것으로 보였다.

"깜둥아. 안아줄래?"

그리고 양 팔을 벌리며 말했다. 마치 내가 전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클라우디를 보았다. 그러자 위니아 역시 내 뒤쪽을 보고는 클라우디가 있음을 깨달았다.

"...!"

순간 얼어붙은 위니아가 눈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 보았다. 아니, 나한테 그런 시선을 보내도... 클라우디가 다가와 위니아에게 인사했다.

"안녕? 오랜만이네? 마법사 아가씨."

"..."

나를 노려보던 시선이 클라우디에게 넘어갔다. 공격적인 시선이었지만, 그것을 받고 있는 클라우디의 얼굴은 싱글벙글 그 자체였다.

"캇트랑 데이트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만나버렸네?"

"...진짜 마음에 안드는 여자네. 그런식으로 말하면 시비로 밖에 안들리는데. 지금 내 앞에서 깜둥이랑 데이트 했다고 자랑하는거야?"

"설마. 조금 과민하게 반응하네."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위니아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이거 말려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클라우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

"이야기? 실례지만, 난 너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어머, 내 애인을 유혹해 놓고 그렇게 나오기?"

"뭐? 유, 유혹이라니, 나는!"

"진정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뿐이니까."

부들거리는 위니아와는 다르게 클라우디의 태도는 여유 그 자체였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캇트. 이야기 좀 하고 올테니까 먼저 숙소로 돌아가 있어."

"...저번엔 셋이서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으음.. 그랬지? 그래도 일단 돌아가 있어. 여자끼리 해결할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 깜둥이 어디 가는..."

몸을 돌리니, 위니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줬다. 클라우디가 이야기를 한다고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고 올 것이다.

그 길로 곧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불안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쏟아졌지만, 내 머리를 식히진 못했다. 그리 공허하게 씻고 나와서 침대에 대자로 뻗어서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눈 앞이 깜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