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니 당황한 눈치의 마리엘이 서 있었다.

"이 새끼."

언제나처럼 하얀색 치파오 비슷한 도복을 입고 있는 상태다. 터질듯한 말벅지가 인상적인 좆밥 하급 사범, 우연찮은 만남이다.

"일 안 하고 대체 어딜 싸돌아댕기는 거여?"

근데 가만 보면 밖에 돌아다니다가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데, 무투가 길드 사범이라는 직업은 의외로 한가한 직종인 것 같았다.

이딴 식으로 수련을 게을리하니까 나한테도 털리는 것이다.

길드장인 리즈티나는 카린과 삐까뜰 정도의 절대적인 강자지만, 솔직히 명색이 상급 사범인 리제트도 나랑 아슬아슬하게 비비는 마당에 마리엘 같은 하급 사범이 수련도 팽개친 채 이렇게 놀러 다니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네 녀석에게 들은 말은 아니다! 단지 심부름을 나왔을 뿐이니까!"

내 말에 마리엘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딴건 아무래도 좋아."

악수라도 하려고 한 발자국 걸어가니까 돌연 한쪽 다리를 뺀 그녀가 뭔가 자세를 잡았다. 뭐 싸우자고?

이런 호전적인 새끼.

"뭐야? 나한테 왜 이래? 싸우자고?"

"그, 그런게 아니다. 단지 기습을 대비했을 뿐이다."

"내가 왜 기습을 해."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해라, 천마. 네 녀석 때문에 이런 버릇이 생겨버렸다."

"싱거운 새끼. 기습 안 할 테니까 안심해. 우리의 원한 관계는 이미 반쯤 청산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무투가 길드에 대한 원한은 거의 다 잊었다.

"...그렇군. 알겠다."

설령 지금 내 눈앞에 세르카가 나타난다고 해도 별다른 손찌검을 할 생각이 없으니까.

뭐, 납치를 했던 것도 주범인 리즈티나씨가 자신의 음부를 보여줌으로서 그 앙금을 해소 시켜 줬고, 다른 사범들도 죄다 줘패줬으니 괜찮다.

문제는 리제트인데 그 새끼도 이제 딱히 상관없다.

전우니까.

"아, 맞다. 근데 리제트는 뭐하고 있냐?"

"리제트 사범 말인가? 아마 길드에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럼 리제트 좀 부르러 가자."

불현듯 생각났는데, 저번에 나비족이 되어 구호수도원에 자빠져 있을 때 리제트와 빈민가에 위자료를 받으러 가자고 약속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마리엘을 본 김에 불러달라고 하자.

"리제트 사범에게 볼 일이 있나?"

"어."

"그럼... 아, 아니! 내가 왜 불러줘야 하는가! 나는 현재 길드장님의 심부름을 하는 중이다! 그럴 시간은 없다!"

"아, 시발 만남 김에 가서 좀 불러 줘. 내가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 혼자 무투가 길드에 가봤자 좋지 못한 소리만 들을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친분이 있는 마리엘을 대동하고 가서 리제트를 불러달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

어차피 오늘 할 일도 없는데 리제트랑 빈민가에 가서 복수 겸 소일거리라도 하고 오면 괜찮을 것 같다.

이미 장비도 완벽하니까 일에 차질은 없을 것이다.

"거절하겠다!"

그러나 마리엘은 나랑 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이 마리엘 새끼가."

감히 내 부탁을 거절해?

나는 즉시 살인적인 실장권법의 초식을 펼쳤다.

ㅡ파파팟!

대화라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설득이라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물론, 부탁과 호의를 요구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ㅡ붕쯔붕쯔!

단지 극한으로 단련된 권(拳)과 살인적인 일격이 담긴 각(脚)만 있다면 별다른 노력 없이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

"실장권법 맛을 보고 싶은 것인가?"

"히익!"

실장권법을 시연하는 모습을 본 마리엘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경악했다.

"아, 알겠다! 같이 가도록 할 테니 당장 그만둬라! 내가 잘못했다! 공격하지 마라!"

"흐흐흐, 친구끼리 때리긴 뭘 때려 임마. 장난이니까 안심해. 나도 너희 길드장은 무섭다고."

자세를 푼 나는 너스레를 떨면서 마리엘의 어깨를 두들겼다. 잠시 움찔하며 눈을 질끈 감은 마리엘이 천천히 눈을 뜨면서 말했다.

"친구... 말인가?"

"그래. 우리는 이미 친구 비슷한 것이지. 아무튼 안내해."

"아, 알겠다."

나는 마리엘과 나란히 서서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무투가 길드 쪽으로 향했다.

"세르카는 요즘 잘 지내냐?"

"적당히 잘 지내는 것 같다. 이미 교육은 마쳤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뭐, 그렇다니 다행이네. 근데 길드장님은 잘 지내시나?"

"평범하게 잘 지내신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그리 걷다 보니 무투가 길드에 도착했다.

"그럼 부탁한다."

"...알겠다. 곧 불러오도록 하지."

들어갈 일은 없으니 그냥 밖에 서서 기다렸다.

근데 입구에 서 있으니까 드나드는 도복쟁이들이 나를 알아보고 피하는듯 움직였는데,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서서 기다리도록 했다.

이제 슬슬 점심시간인가.

잠시 그러고 있으니 마리엘이 나왔다. 혼자 나와서는 나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마리엘? 뭐 리제트는?"

"아... 그곳에 있었군."

"리제트 없대?"

"아니, 리제트 사범은 안쪽에 있다. 단지..."

"뭐, 왜? 나보고 들어오래?"

"그것이... 리제트 사범에게 말을 전하려 하니, 길드장님이 있어서..."

마리엘이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꺼냈다.

뭐, 길드장이 어쨌는데.

"길드장님이 천마 네 녀석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뭐? 왜!"

"모른다. 리제트 사범에게 이야기를 하려 하니까 길드장님이 그것을 듣고 내게 말한 것이다. 자, 어서 들어가라. 안내해주겠다."

"아니 씨발! 내가 거길 왜 들어가!"

설마 뒤지게 패려고 부르는 것인가?

리제트는 어케 비빌 수 있으니 편하게 만날 수 있다 쳐도 리즈티나 그 여자는 절대로 아니다. 그런 흉악한 깡패 두목 같은 여자에게 불려 갔다간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뭐, 돌이켜보면 그때 딱히 직접 나한테 위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그냥 길드 명예를 위해 나를 린치 할 것을 지시했었지.

나름대로 상식은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위험한 일에는 얼굴을 들이밀지 않는 편이 더 좋다. 카린과 그런 일이 있었던 마당에 위해를 끼칠 확률도 낮기는 해도 말이다.

긁어부스럼이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몰라! 잘 있어! 나 안 갈래!"

"아, 안된다! 길드장님이 내게 화를 낼 것이다!"

"몰라 새끼야! 알아서 해!"

"그런 무책임한! 애초에 네 녀석 때문에 심부름도 마다하고 여기까지 같이 와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심부름도 길드장님의 심부름이었다! 그것 때문에 방금 혼나고 왔는데 이러면 내 입장이 뭐가 되겠나!"

이런 배배꼬인 새끼 같으니라고.

하지만 들어갈 생각은 없다.

"모르는레후. 잘 있어. 뭐, 다음에 볼 기회가 있겠지. 리제트한테 담에 보자고 전해 줘."

"가지 마라!"

"야, 설마 고작 이런 일 때문에 혼내겠냐? 안심해."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리제트와 함께 빈민가의 거지떼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다음에 해도 될 것이다. 잠시 모험가 길드에 가서 의뢰 목록 좀 살펴보다가 리샤님 좀 만나고 돌아가면 될 것이다.

어차피 위니아도 일이 있다며 마탑에 가 있는 상태다.

클라우디도 잠시 나갔다 온다고 했고 말이다.

아마 저녁까지는 시간이 빈다.

ㅡ파츳!

마리엘을 뿌리치고 모험가 길드로 향하려 하던 그때였다.

뭔가 맹렬한 기운이 느껴져서 그곳을 보니까, 무투가 길드 정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 기운...!

무엇보다 저 하늘색 긴 생머리에 가슴이 패인 차피오랑 목에 둘러져 있는 하얀색 털목도리 같은 것!

무투가 길드장 리즈티나다!

ㅡ까딱, 까딱.

뭔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말없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뭐, 뭐야! 대체 언제 온 것이지! 마리엘을 보내놓고 직접 나오다니 그렇게 마리엘이 못 미더운 것인가! 길드장으로서 기본이 안 되어 있다!

직접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야, 야! 마리엘 저거...!"

"안 속는... 허억? 기, 길드장님!"

"재빠른 도주!"

당황한 나는 즉시 보법을 행하여 전력으로 현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뒤쪽에서 마리엘이 뭔가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솔직히 좋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도망치는 것이 낫다.

ㅡ멈추세요!

"어억!"

한 10미터쯤 달려 나갔을까, 폭발적인 사자후가 내 귀를 후려쳤다. 이 높고 앙칼진 목소리...! 무투가 길드장의 목소리다!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

뒤를 돌아보자 팔짱을 낀 리즈티나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를 따라잡은 마리엘이 씩씩거리면 나를 연행했다.

"자. 가자, 천마. 별일 없을 것이다. 네 녀석의 말마따나 우리들의 원한 관계는 이미 청산이 되지 않았는가."

"시발."

결국 무투가 길드 정문까지 끌려오게 되었다.

시팔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앞에 서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모습을 쭉 살핀 리즈티니가 말했다.

"제가 오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도망을 치는 거죠?"

그럼 당연히 도망치지, 이년아.

"아, 그것이... 제가 잠시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요. 가게에 지갑을 흘리고 온 것 같아서 누가 훔쳐 가기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뵙게 되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허, 말은 정말 잘하시네요. 아무튼 따라 오세요.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일단 구라를 치면서 적당히 말을 하니까 그 말을 들은 리즈티나씨가 지 할 말만 전하고는 몸을 돌려 버렸다.

아니, 지갑이 잃어버렸다니까.

"아니, 그게 제 지갑이..."

ㅡ찌릿.

다시 강조하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

젠장, 지갑 찾아야 된다고 씨팔!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나는 포기하고 리즈티나의 뒤를 따랐다. 마리엘 역시 내 옆에 서서 걷는 중이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무투가들이 내게 묘한 시선을 보내왔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 저기 길드장님... 저번 일은 그 뭐라고 할까."

그렇게 말하자 리즈티나씨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멈춘 채로 조용히 말했다.

"...그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지요."

대체 어디를 들어간다는 말인가.

결국 제법 커다란 무투가 길드 건물로 들어가게 되었다. 보니까 체육관 건물은 보수를 완료한 것 같았다.

ㅡ또각또각.

우리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직 붉은 하이힐을 신고 있는 리즈티나의 발걸음소리 뿐이었다.

그렇게 올라가기를 2층. 그리고 3층.

마침내 4층.

4층에는 방문이 여러 개 있었는데, 리즈티나는 그중 하나의 문고리를 잡으면서 말했다.

"...마리엘."

"네, 넷! 길드장님!"

"조용히 말하세요, 좀."

"네.. 알겠습니다."

"이제 내려가 보세요. 아니, 가서 시킨 일이나 마저 하시고요."

리즈티나가 지시하자 마리엘이 다시 올라왔던 계간을 내려갔다. 나도 따라서 내려가려 하니까, 그녀가 말했다.

"자꾸 어디로 가시려는 거죠?"

"마리엘 도와줄라고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따라 들어오기나 하세요."

ㅡ끼익.

나를 노려본 리즈티나가 문을 열었다.

"이런."

하는 수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의 안쪽은... 차분한 느낌의 접견실 같은 곳이었다. 전용 좌석인지 창문 앞에 나름 고풍스러운 책상이 하나 있고, 방 안에는 옷장이나 책장 같은 것이 있었다.

ㅡ철컥.

내가 들어가자 문을 닫은 리즈티나가 문을 잠갔다.

이, 이 씨발... 대체 이게 무슨.

"뭐 하세요? 어서 앉으세요. 멀뚱히 서 있을 생각인가요?"

"기, 길드장님. 다 좋은데 문은 대체 왜 잠그시는?"

"남들이 듣기 곤란한 이야기니까요... 앉으세요."

"길드장님.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고의가 아니었어요."

일단 나는 뭔지 모를 사과를 하면서 싹싹 빌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문까지 잠근 것을 보면 저번의 일로 나를 심문할 생각인 것 같다.

존나 억울하네, 씨발.

"잘못했습니다! 진짜 정말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아예 무릎까지 꿇으면서 비니까 더없이 차가운 눈빛이 된 그녀가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앉아."

"넹."

이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겠군.

의자를 끌어와서 앉으니까, 책상 쪽으로 간 그녀가 커튼을 닫았다. 그러자 방안이 살짝 어두워졌고, 리즈티나는 그러한 어둠 속에서 의자를 빼서 앉았다.

저런 좌석에 앉은 모습을 보니까 무슨 사장님 같은 느낌이 들었다.

ㅡ꿀꺽.

긴장 속에 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일로...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네? 네? 아,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활짝 웃으면서 내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사적으로 잘 지냈다고 대답을 했다.

"음, 저번에는 저희들 사이에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