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Tennis

< Player Agreement # 3 >

한우진은 사실 그 뒤의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NK물산 총회장이라는 인물과 대면해서 그의 일장연설을 듣고, 듣도보도 못한 조건의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한우진의 머리는 이미 포화상태였다. 젊어서 그런지 패기가 넘친다는둥 이러쿵 저러쿵 덕담을 건네오는 회장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선수들의 상태를 눈치챈 전상식 감독은 넋이 나가있는 두 사람을 먼저 내려보내기로 했다.

“둘 먼저 주차장까지 가있어라. 난 좀 더 회장님하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네…”

“알았습니다…”

두 사람은 혼이 빠진 좀비처럼 흐느적흐느적 일어나 한 번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회장은 드물게 즐거운 얼굴로 그들이 나간 문짝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족스러우십니까?”

“음, 괜찮아. 아주 괜찮군.”

전 감독의 질문에 회장은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칭찬에 인색한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매우 호평가였다. 그리고 전상식이 기대하는 건 그런 대답뿐만이 아니었다.

“회장님에게 저 둘은 어떻게 보이십니까?”

“흠…”

회장의 흰 눈썹 아래에서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NK물산이란 엄청난 규모의 회사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그의 안목은 전상식 감독과 좀 다른 부분을 볼 수 있었다. 전상식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은 것도, 회장이 그의 뛰어난 안목을 파악하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회장의 눈에 저 둘은 어떻게 보였을까? 전상식 감독은 자신조차 제대로 재지 못한 두 사람의 재능을 궁금해했다.

“최연혁. 그 젊은이는 분명 천재야. 아마 타고났을 테고, 저 큰 키에 강인한 팔다리를 갖췄으니 신체조건도 좋지. 서구권 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피지컬에, 벌써 국내 프로수준을 능가하는 테크닉. 제대로 키우기만 하면 세계랭킹 100

위권은 우습게 뚫겠지.”

NK물산의 회장으로서가 아닌, 테니스에 미쳐있는 한 명의 팬으로서 바라본 그의 시선은 정확했다. 여기까지는 전상식 감독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럼 한우진이는요?”

“한우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회장의 입가가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진정으로 흥미로운 것을 볼 때 만들어지는 표정이었다.

“그 아이는 기묘하더군. 재능이 있어도 높은 수준은 아니야. 누구든지 닿을 수 있는 지점에 빠르게 올라선 것뿐이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그 특이하다는 서브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랬죠. 어디까지나 노력하는 범재, 정도로 봤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에 쏘아진 서브는 어땠는가. 무시무시한 속도, 엄청나게 걸려 방향마저 뒤틀어놓는 스핀. 저 범재가 그런 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의자마저 걷어차지 않았던가.

“참 재밌어. 강하게 태어난 것도 아닌데, 살아가는 방식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 보통은 저렇게 살다가 꺾이기 마련인데, 저 아이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

한우진. 한우진이라.

이름을 한 번 읊어보던 회장은 노구에 어울리지 않는 강인한 악력으로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흥분이 몸 속의 피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정말 잘해줬네, 전 감독. 나가봐도 좋아.”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 * *

전상식 감독은 그들을 근처의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줬다. 일일이 집 앞까지 태워주려 했던 그였으나, 한우진과 최연혁 둘 모두가 그렇게 하겠다고 한 탓이었다.

멍한 상태 그대로 최연혁과 헤어진 한우진은 무심코 ‘전’에 살던 원룸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자신의 주머니에 원룸 열쇠가 없다는 걸 알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이 때는 아직 집에서 살았던가?’

그가 제대로 집을 나와서 독립한 건 입단시험 이후 3년 가까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프로 테니스 선수로 이름을 알리고 먹고 살 생각에 얼마나 들떴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씁쓸한 추억이었다.

집은 원룸에서 그닥 멀지는 않았다. 버스를 타면 10분, 걸어도 대충 2, 30분 정도일까.

하늘을 보았다. 해는 진 지 오래고 어느새 밤하늘만 맑게 개어선 달이 밝았다. 한우진은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발길을 돌려서 집으로 향한다. 입단한 뒤로는 거의 1달에 1번 찾아뵐까 말까했던 부모님의 얼굴. 그것도 3년 정도 지난 후에는 찾아뵐 면목이 없어서 찾아가지 않았다. 이따금 생활비를 부쳐주실 때마다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져서 애꿎

은 라켓만 휘둘렀다.

이제는 다르다.

어느덧 집 앞에 도착한 한우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강북구 수유리에 위치한 성운아파트. 그를 테니스 선수로 키우기 위해서 가족들이 몇 번이나 이사를 했던가.

‘이제는 제가 호강시켜드릴게요.’

젊어진 몸, 정체불명의 힘, 특별계약. 허무한 노력으로 제 살을 깎던 과거와는 틀리다는 걸 보여주리라. 한우진은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8층. 집앞에 도착한 한우진은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 하나를 더 떠올렸다.

‘비밀번호가 뭐였지?’

독립한 이후로 7년이다. 드문드문 찾아뵌 걸로 떠올리기엔 그의 기억력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몇 번 숫자를 조합해보던 한우진은 결국 벨을 누르기로 했다.

띵동

기본 벨소리. 옛날에나 쓰던 초인종하고 똑같은벨 소리에 질려 좀 바꾸면 안되냐고 했던 게 언제였던가? 유독 집 앞에 서자 먹먹해지려는 가슴을 누르던 한우진의 앞에서 뻑뻑한 철문이 덜컹 열렸다.

“아니, 왜 비밀번호를 안 누르고 벨을 누르니?”

“아,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어설픈 변명이었다. 한우진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다가 돌연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생기가 넘치시는 얼굴, 자식 걱정에 밤을 새시던 얼굴, 모든 과거 아닌 과거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한우진의 시야가 흐려졌다.

“어머, 얘!”

정신을 차리고보니 한우진은 어머니를 와락 부둥켜안은 뒤였다. 자신이 고생만 시킨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북받쳐오른 것이다. 하지만 기억도 못하는 ‘전’의 이야기를 꺼내봐야 납득하실 리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왕 이렇게 된 거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기로 했다.

“엄마, 나 NK물산 선수단 합격했어.”

“뭐? 얘, 지금 한 말 정말이니?!”

모친이 놀라서 지른 소리에 덩달아 뛰어나온 아버지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그에게 눈을 흘겨 물었다. 입보다는 몸짓으로 말씀하시는 그분답다고 생각하며, 어머니를 놓고 물러난 한우진이 다시 한 번 말했다.

“NK물산 선수단, 합격했어요.”

“저, 정말이냐?”

지금만큼은 ‘전’과 비슷했다. 기쁨에 벅차서 뛰어들어온 자신이 합격 소식을 전하고, 아버지 어머니 두분께서 환호하시며 자신을 부둥켜안으셨더랬지. 데자뷰 아닌 데자뷰에 실소하며 한우진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게 대답이 된 건지, 두분은 서로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시기 시작했다.

“어이구, 우리 아들이 진짜 프로 선수가 되다니!”

“내가 그랬잖아. 어릴 때부터 싹수가 있었다니까!”

“싹수는 개뿔. 당신 닮아서 영 둔하더만~”

농담까지 섞어가시며 좋아하시던 한우진의 부모님 너머로, 잠이 덜 깬 눈으로 걸어나오는 한 소녀가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

한유라,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테니스에 별 관심이 없던 한우진의 여동생.

어릴 적에 가족들이 테니스장에 데려갔던 그녀는 테니스공을 깨물었다가 괜히 유치만 하나 빠져서 앙앙 울었다. 그게 트라우마가 된 건지 그녀는 부모님들이 테니스 경기만 틀었다 하면 곧장 방으로 들어가버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우진에게 있어 그녀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에 실적 없는 선수로 살아가던 그에게,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 번듯한 직장에 취직한 한유라는 일종의 콤플렉스 같은 존재였다.

무심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한우진을 본 한유라의 머리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오빠,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아, 지금 유라는 아직 고 3이었지.’

테니스에 열광하는 부모님, 테니스에 미쳐서 인생을 낭비하던 오빠.

거기에 질려버린 어린 여동생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가버렸다. 자신들 때문이라며 자책하던 부모님들 앞에서 그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게 다 헛된 기대만 하게 만든 자신의 탓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한 마디에 모든 노력

이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 묵묵히 듣기만 했었다.

분홍색 체크무늬의 잠옷, 잠이 덜 깨서 반쯤 감긴 눈. 예쁘장한 얼굴인데도 곳곳으로 뻗친 머리. 웃기기까지 한 동생의 몰골을 보고 나서야 한우진은 간신히 웃을 수 있었다.

“니 스타일이 좀 깨서 정색 좀 한거야. 거울 좀 봐봐. 진짜 장난 아닌데?”

“? 자다 깬 건데 당연하지…”

털털한 성격의 한유라는 한우진의 말 돌리기에 넘어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아마 다시 방에 들어가서 자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심각하게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한유라의 뒷덜미를 어머니의 손이 냉큼 낚아챘다. 토끼의 목덜미를 물어채는 독수리 같은 속도였다.

“어? 왜 그래?”

“왜는 무슨, 네 오빠 오늘 취직했댄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옷 입어. 회라도 한 접시 먹으려 가자.”

“이 밤에 무슨 회야?!”

놀라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딸을 본체만체하며 부모님들은 재빨리 옷을 챙겨입었다. 이럴 줄 알고 있었기에 현관에 서서 신발도 벗지 않고 있었던 한우진이 한유라와 눈을 마주쳤다.

‘포기하면 편해.’

시선에 담긴 뜻을 이해한 한유라가 몸을 축 늘어트렸다. 항복의 몸짓이었다.

불과 10분만에 채비를 마친 한우진 가족이 밤공기를 맞으면서 아파트를 나왔다. 그때는 뭘 먹었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회는 아닌 것 같았는데. 뭐 아무렴 어떤가. 뭘 먹든 맛만 있으면 그만이지.

한우진은 가볍게 생각을 정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걷던 도중 문득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의 옆에서 자꾸 말을 걸어오는 어머니, 묵묵히 휴대폰으로 아들 소식을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아버지. 툴툴대면서도 쫄랑쫄랑 잘도 따라오는 여동생.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전에는 이게 마지막이었지.’

선수단 내에서 밑바닥으로 깔린 실력, 저조한 대회 성적 등이 계속됐다. 악착같이 국내 대회의 4강까지 올라갔던 게 한우진이라는 선수의 보잘것없는 최고 기록.

테이블에 둘러앉아 광어 대 자를 시켰다. 본요리에 앞서 나오는 꽁치구이를 젓가락으로 뜯으며, 한우진이 말했다.

“다음엔 장어나 한 번 먹으러가요. 아버지 좋아하시잖아요.”

언제나 술 안주는 장어가 최고라고 하시던 분이다. 회를 먹기도 전에 다음에 뭘 먹을지 말하는 한우진의 모습에 나머지 가족들이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그는 마냥 웃었다. 테이블 밑으로 늘어진 한우진의 손아귀가 있지도 않은 라켓을

쥐었다. 굳세게 단련된 팔뚝에 선명한 핏줄이 섰다.

그 때의 장어 값은 자신이 낸다.

그렇게 결심했다.

< 선수 계약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