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Novelist

There are no accidents (3)

“거긴 관광지거든. 다들 풍경을 바라보고 여유롭게 거리를 걸어 다니지. 근데 그 행복한 놈들도 영원히 그곳에서 머물 수는 없거든. 정착하지 못해. 더 오래 있으려면 돈이 들어. 시간이 곧 돈이야. 근데 그걸 내가 훔치면, 그놈들 표정이 아주 볼만 해. 대놓

고 뺏어가도 움직이지를 못한다니까. 반항은 꿈도 못 꾸지. 벙 쩔어서는 멍청이처럼 서 있어.”

“그걸 보는 게 즐거워요?”

“즐거워.”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를 보다가 주호는 말했다.

“설마 당신이 무서워서 반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응?”

“그들은 돌아갈 곳이 있어서 내 준거에요.”

“뭘 내줘?”

“돈이요. 돈보다 중요한 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예를 들면 목숨이 있죠. 살아있어야 행복이든 여유든 부릴 수 있으니까. 여행도 다시 떠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수많은 싸움을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들이거든요. 그 정도 지혜는 몸이 기억하고 있

어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 화를 내지 않았다. 주호는 가만히 그를 관찰했다.

“처음 들었네.”

허무한 음성이 골목에 울렸다.

“나도 뺏겼었는데. 난 또 내가 멍청해서 그런 줄 알았지. 왜 나한테는 아무도 그런 소리를 안 해줬을까.”

주호는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이내 말을 돌렸다.

“그건 코인한테 따져요.”

“코인?”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주호는 쥐를 찾았다. 새끼 쥐는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쓰레기 더미를 헤매고 있었다.

“왜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어요?”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는 수잔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을까. 빌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수잔에게도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 그랬어. 예를 들면 목숨이 있지.”

그가 품을 뒤졌다. 잡히는 것은 없었다.

“버림받는 건 질렸거든. 뺏기는 것도. 그럴까 봐 불안에 떠는 것도 싫어서 먼저 말을 꺼냈어. 그녀는 단번에 내 나약한 구석을 꿰뚫어 보고 떠났지. 나는 내심 이기적인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녀가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어.”

“어떤 식으로 떠났는데요?”

“조금 슬퍼하다가 떠났지.”

“미련스러운 당신과는 다르네요.”

수잔은 빌과 달랐다. 그녀는 빌이 되지 못했던 인간상이다. 강하고 현명하다. 누군가가 떠났음에 슬퍼하지만, 오래 슬퍼하지 않는다.

“수잔은 현명해요.”

“도둑은 멍청하고.”

수잔을 포기했다. 그녀는 그가 되고 싶었던 인물이다. 동경과 비슷하고 사랑에 가깝다. 꿈이라고 표현해도 되고 목표라고 생각해도 된다. 수잔은 빌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는 돈밖에 훔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꿈과 사랑을 빼앗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유토피아. 부자촌. 빈민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다.

“수잔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세요.”

그는 이제 그의 곁에 없는 수잔의 모든 것을 천천히 나열했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주호는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 온전히 빼앗기지 않았다. 당신 안에 남아있다. 늦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러나 자신은 개입할 수 없었다. 이건 코인의 글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전 이제 갈게요.”

“약속은 지키는 거지?”

“물론이죠. 뭘 가지고 싶으세요?”

빌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수잔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그가 물었다. 품을 뒤적이고 있었다. 잡히는 것은 없었다.

“네.”

주호는 그렇게 대답해주었다.

눈을 떴다. 코인의 원서가 보였다. 모니터에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당신을 떠나겠어. 이제는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빌은 빼앗겼다. 그리고 빼앗았다. 모두 그렇다. 모두 무언가를 포기하고 무언가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그 당연하고 슬픈 사실에 그는 담담하지 못했다. 그 사실에 상처받고 말았다.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은 없었다. 적당히 슬퍼하는 법을 그는 알지 못했다.

집을 잃고 어미를 잃은 새끼 쥐처럼 골목에서 방황하기만 했다.

그에게는 악취가 났다. 그 속에 미미한 알코올의 향이 섞여 있었다. 습관처럼 품을 뒤적이던 빌이었다. 빌이 원하던 것을 떠올렸다. 수잔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코인은 빌을 사랑했구나.”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확실히 알았다. 코인은 빌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가 원하던 것을 쥐여준 것이다. 그와 수잔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마지막을 그렸다. 허세가 강하고 야망이 있다. 그런 주제에 소심하고 미련스럽다.

주호는 원서를 보았다. 알파벳이 나열되어 있었다. 누구의 것인가. 그 행복, 그 돈, 그 사랑. 모두 누구의 것이었을까. 주호는 최대한 원작에 가깝게, 자신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주의하며 글을 옮겼다.

“피곤해.”

주호는 책상에 고개를 박으며 중얼거렸다. 힘 빠진 음성에 봄은 고개를 돌렸다.

“자?”

“아직.”

“이제 잘 거라는 말이구나.”

주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늦게까지 번역에 매달렸다. 익숙하지 않은 번역은 생각 이상으로 체력을 빼앗았다. 마치 빌에게 도둑맞는 기분이었다. 그를 상대할수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핍을 의식하게 된다. 코인은 대단한 작가였다. 그가 한 선택들은 전부

옳았다. 책을 번역하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동시에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하게 된다. 자신이라면 빌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다뤘을까.

아마 어떤 글이든 코인과는 많이 다를 거다. 자신이 번역하고 있는 글은 코인만 쓸 수 있는 글이었고 코인의 눈에만 보이는 빌이었으니까. 눈꺼풀이 무거웠다. 최근에는 온통 빌과 코인 생각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머리가 가득해지는 건 오랜만

이었다.

“이놈 뻗어있는 거 오랜만에 보네.”

어느새 다가온 서광은 주호를 손으로 찌르며 말했다. 봄이 그를 말렸지만 서광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왜.”

살짝 잠긴 목소리가 책상에서 들려왔다. 서광이 물었다.

“무슨 글 쓰느라 늦게 잤어?”

손길과는 달리 퍽 상냥한 말투였다. 주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안 썼어.”

“거짓말한다. 저는 이제 알거든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를 흉내 내는 건지는 몰라도 그다지 좋은 연기는 아니었다.

“어서 말씀해 주세요. 우연히 마주친 그날부터 저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랍니다.”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서광 덕분에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야. 난 안 써.”

“그럼 뭐하느라 늦게 잤는데.”

주호는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누구를 좀 생각하느라.”

봄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서광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누구야. 빨리 털어놔 봐. 내가 아는 사람?”

“너는 알지도 모르겠다.”

서광은 더욱 흥분했다. 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물었다.

“이름이 뭔데?”

“빌.”

“······외국인이야?”

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주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빌은 외국인이었다. 서광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켈리 코인? 누구의 것인가의 그 빌?”

“어. 그 빌.”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서광의 설명을 들은 봄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김빠지게 하는데 뭐 있네. 너 요즘 켈리 코인에 빠졌구나? 안 그래도 최근에 한국에 왔다 갔다고 난린데.”

“응. 만났거든.”

두 사람은 이번에도 흥분했다.

“뭣이라!”

“만났어.”

다시 말해주자 봄과 서광이 벌떡 일어났다. 눈높이가 높아졌다. 빌과도 이런 구도로 대화를 나눴었다. 빌은 이렇게 자신을 올려다봤겠구나 싶었다. 멍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두 사람은 한쪽씩 팔을 잡았다.

“왜?”

두 사람은 말도 없이 자신을 끌고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것은 구석에 위치한, 부원 이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문예부의 부실이었다. 서광은 문을 닫고는 외쳤다.

“우연이 켈리 코인을 만났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만났어? 왜 만났어? 서로 원래 아는 사이야?”

봄은 맹렬한 기세로 질문을 퍼부었다. 어떤 질문에 먼저 대답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봄과 서광이 뒤를 돌자 바론과 선화가 서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찾았다.”

“역시 여기 있었네.”

바론이 걸어와서는 주호의 어깨를 잡았다.

“켈리 코인하고 만났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봄과 서광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주호가 묻기도 전에 선화가 입을 열었다.

“지금 기사 뜨고 난리 났어. 코인이 행사 인터뷰에서 우연을 언급했다고. 한국에는 우연을 만나러 간 거고, 만났고, 번역을 맡기고 왔다고.”

요점만을 정리한 아주 깔끔한 요약이었다. 듣는 사람이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문예부에서 수행한 결과다. 주호는 출판사나 이사벨라와의 상의 없이 번역 소식을 폭로한 켈리 코인을 떠올렸다. 그 누가 켈리 코인을 말릴 수 있으랴.

“번역?”

“응. 번역. 우연이 번역할 거래. 켈리 코인의 책을.”

봄이 입을 벌렸다.

“그래서 빌.”

“빌?”

선화가 물었지만 봄은 놀라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호는 서광을 보았다. 서광도 주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이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세상에, 우연을 만나러 그 켈리 코인이. 너 코 괜찮냐? 어디 안 맞았어?”

“다행히도.”

주호는 조용히 서광의 말에 대답했다. 선화는 켈리 코인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냐고 봄에게 물었다. 봄은 선화가 잘 아는 만화작가에 비유하며 설명해주었고 그제야 선화는 선망의 눈길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사인은.”

“네?”

“사인은 어디 있어.”

주호는 빈손을 들어 올렸다.

“없는데요.”

바론과 서광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주호는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솔직히 까먹고 있었다.”

“어떤 기회인데.”

“다음에 또 만날 날이 오겠지.”

“그래. 우연 작가님. 그때는 우리 몫도 부탁한다.”

“친구가 우연이니까 이렇게 좋구나.”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다섯 쌍의 눈이 문을 향했다. 그곳에는 보석이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도래했다.

“우연이요?”

이런. 부원들은 눈치를 살폈다. 못 얼버무릴 건 없었지만 주호는 보석이 입이 가벼운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닌들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주호는 굳어있는 세 명의 동급생과 한 명의 선배를 보았다. 왜 후배에게는 이렇게 빨리 알려주느냐고 따질 속 좁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우연이야.”

주호가 말했다. 숨을 들이켜는 기척이 났다.

“내가 우연이야.”

주호는 웃었다. 보석의 눈이 제멋대로 빛났다. 그녀의 시선이 서광에게로 향했다. 우연의 책을 추천해주던 서광이 떠올랐다.

“그래서 우연.”

그녀는 그때의 의미를 이제야 알아들었다. 보석은 차분하게 복도를 살피고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선배가 우연이에요? 영원이고요? 켈리 코인이 만나러 온 그 우연? 이제는 번역까지 하려고 하는 그 우연이요?”

“응.”

짧지만 강렬한 긍정에 보석은 입을 벌렸다.

“대단해요!”

그녀는 감동하고 있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네요. 와. 저 이제 우연하고 아는 사이 된 거예요? 와.”

“그래. 네 기분은 충분히 이해한다. 진정해.”

선화가 보석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말에 확인 사실이라도 받은 듯 보석은 더욱 날뛰었다. 그리고는 뜬금없는 질문을 내뱉었다.

“선배 유학 다녀오셨어요?”

“유학?”

“네. 지금 댓글이 난리라고요. 우연 외국인설, 혼혈설, 유학설, 코인 가족설, 멘사 회원설 등등. 18살이 무슨 번역이냐는 말부터 우연이 사실은 18살이 아니라는 말까지!”

보석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우연에게 그런 질문을 다 할 수 있어요!”

주호는 이제 더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을 강하게 느끼며 조금 더 늦게 밝혀도 됐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잠깐 했다.

우연은 없다 (3) 끝

ⓒ 임한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