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통일을 이루어 냈다.

예거의 눈 앞에는 여덟 부족의 수장들이 무릎을 꿇은 채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거 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예거가 마계 일통의 위업을 이루어 냈음을 알려 주었다.

여덟 부족의 수장들은 고개를 조아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마왕은, 역대급으로 강했다.

또한 잔혹하면서도 파괴적이었다. 그가 지나 온 세상엔 마족의 시체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다 한 줄기 마력이 되어, 저 우악스러운 마왕의 몸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예거는 마족을 먹으며 성장했다.

여덟 수장들이 몸을 또다시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전대 마왕의 세 수하 역시 한 줌 마력으로 변해 예거의 몸으로 스며들어 가 버렸다는 것을!

“.......”

예거는 그런 그들을 싸늘한 눈으로 훑은 뒤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다.

마계 일통의 상징, 맹약의 검!

예거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몸 위로 회색 늑대의 형상이 일렁거렸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발에 바람이 깃들었다. 그는 느리지만, 아주 빠르게 이동했다.

남방 마계.

북방 마계.

그 중앙엔 결계에 뒤덮힌 신전이 있다.

바로 맹약의 신전!

초대 마왕이 봉인해 놓은 이 신전엔, 남북 마계를 완벽하게 일통한 마왕만이 진입할 수 있었다.

예거는 어느새 그 거대한 결계 앞에 섰다. 좌우로 여덟 부족의 부족장들이 나란히 섰다.

그들 여덟이 모이자 결계에서 빛이 일었다. 그 빛은 예거의 몸 위로 쏟아졌다.

파아아앗!

마력의 압박이 시작됐다. 예거는 덤덤한 눈으로 그 마력을 받았다. 전신이 짜부라지는 듯 한 고통이 느껴졌다. 예거는 지긋이 눈을 감고 고통을 참아냈다.

-형!

알 수 없는 환청이 들려왔다.

-형아! 난 커서 형아처럼 될 거야!

아주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인 것 같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예거는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가슴이 아프단 생각을 했다.

허나 곧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전신의 압박이 도를 넘어선 것이다.

고통이 이어진다.

크르르릉-

어느새 예거의 이가 날카롭게 변했다.

송곳니가 비죽 비죽 솟아오르고 두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쏟아지는 마력의 압박은 극에 달했다.

어느 순간.

샤샤샥-!

압박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사방에 만들어져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붓으로 그림이 그려지듯 가려져 있던 지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어?”

그러나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맹약의 신전이!

다만, 맹약의 신전이 있던 그 위치엔 거대한 차원의 균열 하나가 일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덟 부족의 수장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예거는 균열 앞으로 걸어갔다.

“.......”

족히 신전 하나 정돈 집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균열은 거대했다.

.

“철호.”

에코가 그 이야기를 꺼낸 건, 막 장사가 끝난 새벽녘이었다.

“왜.”

철호는 얼마 전 아주 잔뜩 구매한 ‘아이보리 버팔로’ 의 꽃등심을 어떻게 먹어야 할까, 에 대한 고민이 한창이었다.

“너라면 알고 있겠지. 내가 어떤 클래스를 마스터 했는지.”

철호는 에코를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놈을 하도 오래 봐서 외워 버렸지. 그건 왜?”

“나는 다섯 개의 클래스를 마스터했다. 허나 그중 하난, 나 외에는 가질 수 없는 클래스였다.”

에코가 가진 네 개의 능력,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능력. 그 하나는 매우 특별한 클래스였다.

바로 ‘불사(不死)의 의지’!

죽지 않는 에코의 능력은 그 점에 기인했다. 엄밀히 말 하면, 사기적인 클래스. 어떠한 생존 클래스들보다 월등한 성능을 자랑한다.

“나 뿐 아니라, 역대 마왕들은 하나씩 그런 클래스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마족들은 갖지 못 한 클래스, 모든 것을 압도하는 굉장한 클래스. 그것을 가진 이들은 우리 사이에서 ‘퍼스트 클래스’ 라고 불렸다. 일종의 특수계급이었지.”

각성자들은 보통 처음 각성할 때, 랜덤한 종류의 클래스를 각성한다.

그 첫 클래스에서 특수한 클래스를 각성해, 계속해서 효과를 본 것은 철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철호는 짧게 일축했다.

“뭐냐. 너만 알지 말고 이 몸에게도 알려 주면 안 되겠냐.”

철호는 빤히 에코를 쳐다보았다.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에코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어차피 이 괴물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네놈은 인간 치곤 지나치게 빠르게 성장한다. 네놈은 에스판 대륙에 소환된 후 10년만에 5개 클래스를 마스터했으며, 이 몸 과의 전투 도중 6개 클래스의 문을 열었지. 그건 잠재력만으론 가능하지 않다. 네놈의 퍼스트 클래스가 분명히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철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계속 해 봐.”

“그러니까 이 몸이 네놈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요인을 알고 싶다. 마계로 돌아가 힘을 회복하는 시간 동안 늘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그 궁금증을 해소하게 해 달라.”

-진실

철호는 빙긋 웃었다. 다시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 봐.”

에코가 조심스럽게 철호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댔다. 철호는 속닥속닥 하며 어떤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에코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철호를 노려보았다.

이내 분통이 터진다는 듯 빽 소리쳤다.

“이...... 이이익! 젠장할 사기꾼!”

에코는 어이가 없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리고 밥집 문을 열고 나갔다.

“어딜 가나?”

“속이 타서 바람 쐬러 간다!”

“소리 지르지 마라, 애들 잔다.”

“.......”

에코는 잠시 머뭇거리다 철호에게 물었다.

“어떤 느낌인가?”

“뭐가.”

“그토록 강대한 힘을 갖게 된 소감 말이다.”

철호는 가만히 생각했다.

“흥, 말 해 주기 싫음 말고!”

에코가 나간 뒤, 철호는 조용히 매화주 한 잔을 따랐다. 향긋한 그 술을 홀짝이며 자신의 첫 번째 클래스를 떠올렸다.

세계 파괴자.

철호는 어떤 클래스를 선택하든 클래스가 가진 힘의 200%를 발휘한다. 또한 모든 클래스를 습득했을 때 성취도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간단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클래스. 세계의 모든 균형을 파괴해 버리는 능력.

그것이 이세계로 소환되고 나서 얻은 첫 번째 클래스였다.

그런 사기적인 능력을 얻게 된 소감이 어떻냐고?

“글쎄다......”

매화주를 홀짝이던 철호가 허공을 응시했다.

‘공허함?’

강함을 갈구하는 대한 이유?

더 강해져서 누군가를 이기고자 하는 생각을 버렸다. 그런 건 부질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철호는 강함을 꿈꾼다.

그것은 그저 식욕이나 성욕 같은 생리적 욕구와도 같았다.

팔을 들어 허공을 향해 뻗어 본다.

쿵- 쿵-

이따금씩 이브의 마력을 흡수한 심장이 두근거리곤 한다.

어쩌면.

어쩌면......!

문득, 철호는 빙긋 웃어 버렸다.

* * *

만드라고라가 최근 부쩍 많아졌다.

얼마 전엔 용산 외곽지역의 무인지대에서 발견해 대량으로 캐 낸 적이 있다.

에코는 화색을 띄며 반가워했다.

만드라고라는 음기를 먹고 자라는데, 마계에 그득한 마기와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 당연하게도 마계에 잔뜩 자라는 식물이었다.

다만.

이번 만드라고라들은 완연한 성체였다. 만드라고라는 성체가 되면 배춧잎 같은 잎을 활짝 펼치는데, 그 안에서 만드라고라 포자가 사방으로 퍼진다.

그게 퍼지면 일이년의 잠복기를 거쳐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다.

아무튼 그 전에 발견하긴 해 다행이다만...... 철호는 그 상황이 썩 좋지 못 하단 것 정돈 알고 있었다.

‘마계와의 접점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곧 귀찮은 일이 생길 거라는 징조다.

발견한 성체 만드라고라의 잎은 배추김치를 담갔다.

뿌리 부분은 깍두기를 담갔고, 나머지 채소들을 이용해 파 김치를 비롯한 각종 김치류를 담갔다.

에코가 고맙게도 발견해 준 덕에 올 해 김치는 문제 없을 예정이다. 예전에 만들어 본 만드라고라 깍두기의 반응이 좋아, 이번에도 반응이 기대된다.

“그거, 있잖아. 김치라고 했었지?”

요리를 배우기 위해 미궁에서 올라온 리세가 물었다. 철호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그거 맛있더라. 만드는 법 알려 줄 수 있어?”

“원한다면. 다만, 안 하는 게 좋아.”

철호는 김장을 하다 힘들어 죽으려고 하는 에코를 떠올리며 킥킥킥 웃었다.

-드, 드래곤. 이 몸의 허리를 보아라.

-뭐냐.

-허리가 제대로 붙어 있는가? 끊어진 것 같다!

에코와 칸은 그 날 제대로 일을 했다.

“그거, 엄청 힘들거든.”

“......”

리세가 눈을 깜빡이며 주방 너머 저 편을 쳐다보았다.

오늘의 아침 손님은 두 명이다.

비스트는 늘 입던 가죽 자캣을 걸친 채, 한 여자를 데려왔다. 철호의 눈에도 익숙한 그녀는 바로 이브였다.

그녀는 눈에 띄게 건강해졌다.

“우와, 세상에 이런 가게가 있다니.”

이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철호를 보았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문득 이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철호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서 뵌 적 있던가요?”

“글쎄요. 언젠가, 어디에선가 뵌 적이 있을 지도요.”

철호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비스트는 그런 이브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브가 비스트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저번엔 와서 뭐 먹었어?”

“이것 저것.”

비스트는 퉁명스러운 듯 대답했다. 이브는 그게 익숙한 듯 머리를 살짝 비스트의 어깨에 기댔다.

“뭐 먹지?”

그들이 메뉴를 고민할 무렵. 드륵- 문을 열고 도착한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데, 바로 신촌의 수호자 얼음 마녀 채연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청바지 멜빵을 입었다. 대체적으로 밝은 분위기가 매력적인, 아주 얌전한 소녀였다.

채연은 들어오자 마자 비스트와 이브를 보았다.

“......언니!”

“아? 우리 애기 이리 와.”

이브가 반갑다는 듯 채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채연은 헤헤헤, 웃으며 이브의 옆자리에 앉았다.

“연우 오빠도 안녕?”

비스트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까닥일 뿐이다. 채연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듯 했다. 문득, 주방에 있던 리세가 철호의 옆으로 걸어왔다. 마침 리세는 숙주나물을 익히고 있었다.

“저거 다 익은 것 같아.”

“아, 그래.”

“......!”

채연은 리세를 보며 깜짝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 혹시...... 전설의 밥집 사모님이신가요?”

“음......”

철호는 이마를 짚었다. 근거 없는 소문이 대체 어디까지 퍼져 나간 건지. 리세는 입을 가리고 숨죽여 웃었다.

“동생입니다.”

“동생이요?”

채연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꼴깍 삼키며 애써 시선을 내려깐 채연이 섀도우 캣의 말을 떠올렸다.

-엄청 크다!

-얼마나 크길래요?

-언니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제일 크더라!

-......

-게다가 엄청 예쁘고 몸매는 또 얼마나 좋은지......

채연은 어쩐지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무엇인가, 나이를 헛먹은 건가, 왜 저런 건 클래스에 포함 돼 있지 않은 걸까를 고민하던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리세는 밥집의 뒷문으로 나가 화덕에 불을 붙였다. 세계수로 만든 숯은 내구도가 매우 뛰어나, 거의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듯 했다.

리세가 아이보리 버팔로의 꽃등심을 굽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우리 애기는 어쩐 일이야?”

“아, 협회에 보고 차 들렸어요. 만드라고라가 또 잔뜩 생겼거든요.”

채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만드라고라와 얽힌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아주 예전, 증발해 버린 신촌 외곽의 만드라고라 무리. 그것 덕분에 그녀는 한동안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만드라고라라고?”

“예. 요즘 부쩍 여기저기서 만드라고라가 생기더라구요. 무슨 일이 생기려나.......”

“음.......”

그녀는 문득 창 밖을 보았다.

화사하고 밝은 날이었지만, 이브는 문득 예전에 보았던 그 미래가 떠올랐다.

보랏빛 안개가 가득하던 그 시점.

그 첫 번째 강자가 이 세계로 내려서던 날.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존재는 그 다음 장면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으니까. 존재의 얼굴이나 모습은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뭉뚱그려져 보였을 뿐이다.

왜 하필이면 설거지일까?

그런 존재를 압도할 정도로 강한 어떤 이가, 그를 설거지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걸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하지만, 그녀는 영 알 수 없었다.

그 때.

방문을 열고 나온 에코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에코는 머리에 하얀 조리모자를 썼다.

얼마 전 철호가 심심풀이로 사 온 모자가 마음에 드는지, 낮 시간엔 늘 저걸 쓰고 설거지를 하곤 했다.

에코가 손님들을 보더니 본체 만체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리세가 요리 연습을 하며 만들어 낸 설거지를 보며 투덜거렸다.

쏴아아-

이제 설거지를 시작한다. 에코는 아주 솜씨 좋게 접시들을 닦았고, 빠르게 일을 해치워 나갔다.

이브는 주방으로 들어서는 에코를 보며 방긋 웃었다.

“직원이신가 봐요?”

“아, 조캅니다.”

“그렇구나.”

열심히 일 하는 사람은 늘 아름답다!

문득.

솔솔솔 아주 맛 좋은 냄새가 났다.

세 남녀는 에코의 존재 따윈 잊어버리고, 어떤 요리가 나올 지에 대한 기대를 시작했다.

< 회색의 밤 > 끝

ⓒ 고두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