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에 찬란한 보름달이 떴다.

보름달은 기묘한 안광을 비추어 대지를 밝혔지만, 밝은 만큼의 어두움 역시 공존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뜰 때 마다 이어진 의식을 행할 시간이다.

또각 또각 또각

나이트메어는 늘씬한 다리를 움직여 걸었다.

높은 하이힐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기계적인 소리를 냈다. 그녀가 걸어서 도착한 곳은 거대한 석실의 한복판이었다.

한복판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곳의 석실은 기본적으로 콜로세움의 구조와 비슷했는데, 천장은 뻥 뚫려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석실의 하늘엔 아직 달이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지긋이 기다렸다.

달이 천천히 움직여, 석실의 하늘과 딱 마주쳤을 때.

화아악!

달빛이 석실 정 중앙을 비추었다. 동시에 쿠구궁- 하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싸 아 아 아 악!

사방에 새카만 기운이 몰려들더니, 그 달빛을 거부하듯 뭉쳐 기괴한 형태를 이루었다.

구구궁!

마침내 땅에서 솟아오르듯 문 하나가 생성됐다.

타원형의 흑암석 문에는 기괴한 음각이 새겨져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새카만 기운이 일렁였다.

그녀는 그 앞에 섰다.

이번에 공수한 마정석은 1급으로 분류된 것이 32개, 2급 미만이 도합 백여 개다.

‘대체 마정석을 얼마나 더 소모해야 하는 거지?’

유진우는 지금 이 안에 잠들어 있었다. 마정석을 내려놓자, 문은 그것을 싸악 흡수해 갔다.

‘5년.’

그가 잠든 지 벌써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10년 전의 대립으로 포리너와 협회가 갈라졌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유진수와 유진우.

두 걸출한 인물의 이념 대립은 아주 예전부터 지속돼 왔다. 30년 전 처음으로 그들이 각성자들을 모으고 키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쭈욱.

20년 전 나이트메어가 ‘비밀 연구’ 에 투입될 때부터 유진우는 자신의 형인 유진수와는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체적인 맥락은 ‘인공 각성자 양성’.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유진우는 차원의 틈에 매진했다. 이 것의 정체와 원리를 알아내고자, 무수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연구결과는 5년 전 성공으로 이어졌다.

곧.

이 문이 열릴 것이다.

문이 열리고, 유진우는 5년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무력을 손에 넣은 채 돌아올 것이다.

계획은 차근 차근 진행돼 가고 있었다.

나이트메어는 가만히 그 문을 지켜볼 뿐이었다.

달은 움직여, 석실의 천장에서 사라져 갔다.

구구궁!

달빛이 사라지자 마자 문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나이트메어는 그대로 몸을 돌린 채 또각 또각 걸어 나갔다.

.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이 시대의 눈이란 낭만과 동시에 골칫덩이였다.

장마철에 켈피들이 출몰하는 것처럼, 폭설 시기엔 스노우볼들이 출몰하니까.

스노우볼은 하늘에서 쿵! 하고 추락한다. 그러니까 대충 엄청 큰 눈덩어리 몬스터라고 보면 된다.

쿵!

잠에서 깨어난 것은 육중한 소리 때문이었다.

철호는 밥집 문을 열곤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새카만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가 철호를 반겼다.

“끄응.”

밥집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스노우볼.

놈들은 기본적으로 9급의 몬스터인데, 어딘가를 틀어 막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괴짜들이었다. 녀석들은 자체적으로 굴러다니진 못 하지만, 그 자체로 매우 귀찮았다.

에스판 대륙에선 널따란 평야에 폭설이 내릴 때면 온 사방에 쿵쿵 떨어져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스노우볼들이 제법 흔했다.

“으흠........”

철호는 그 녀석들을 보다가 문득 생각나, 아공간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강철호 님!”

언제나 쾌활한 카심이 쓱 나타났다.

“카심. 아공간에 아마 프로즌이 있었지?”

“프로즌이요?”

카심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겨울이 왔나 보군요.”

“그래.”

철호는 스노우 볼 위로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많이 오는구나.”

“잠시만요.”

잠시 후 나타난 카심은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프로즌이 다섯 개 있는데, 개중 네 개는 꽉 찼어요. 기억하시죠? 아공간에 빙하지대를 만드시겠다고, 동쪽 끝 빙하지대에서 한기를 죄다 빨아 오셨잖아요. 세상에, 프로즌 다섯 개에 한기를 꽉 채워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아.”

“아공간에 빙하지대 만드는 덴 거의 한기 소모가 안 돼서, 한 개 덜 찬 프로즌도 사실은 거의 찬 상태고요.”

“알겠다.”

철호는 반지를 받아 들곤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 끼웠다.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은반지라고 보일 법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런 특징이 없었으니까.

허나 이 반지의 진가는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에 발휘된다.

철호는 반지를 낀 손으로 스노우볼을 만졌다.

샥!

삽시간에 스노우볼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티끌 하나 남지 않고 반지로 빨려 들어갔다.

프로즌은 한기를 빨아들인다. 특효는 이런 스노우 볼 같은 녀석들인데, 대체적으로 빙결계를 다루는 모든 힘 앞에 유효하다.

본래 이것은 장로급 드래곤인 아라미르 란테로에게 받았다. 그녀는 철호에게 여러 가지 보물들을 물려주었다. 자신은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철호는 문득 그녀가 생각나 씁쓸하게 웃었다.

“수고했다 카심, 들어가 봐.”

“예!”

한기를 빨아들이는 것.

그게 끝이냐?

재미있는 점은 빨아들인 한기를 내뿜을 수도 있다는 점이겠지.

아무튼 이 다섯 번 째 프로즌은 한기를 조금 사용하긴 했지만, 적어도 이 땅의 스노우볼들을 처리하는 덴 아무런 이상이 없을 거다.

“흐흠.”

뭐, 간만에 좋은 일 좀 해 볼까. 이건 상부상조하는 거라고 봐도 될 테니까.

철호는 가볍게 몸을 풀며 밥집을 나섰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한기가 몰아쳤지만 철호에게 있어선 기분 좋은 바람에 불과했다.

탓-

땅을 가볍게 차자, 철호의 몸은 바람처럼 움직였다.

골목길을 벗어나 도심으로 나서자 인기척은 단 하나도 없었다. 철호는 그대로 눈에 보이는 스노우볼들을 하나 하나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 * *

어제 폭설이 내리고, 쿵 쿵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으이구 지겨워.”

템플 용병단의 첫 기상은 류신의 몫이었다. 류신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아직 덜 밝은 바깥 세상을 쳐다보았다. 슬슬 걸어다니며 용병단원들을 깨우는 게 류신의 임무다.

이럴 때 특효약은 역시 꽹과리 만 한 것이 없다. 류신은 침대 밑에 감춰 놓았던 꽹과리를 꺼내, 나무막대기를 이용해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꽤애앵! 꽤애앵! 꽤애애앵!

“형님들! 기상입니다!”

류신은 씨익 웃으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곤히 잠들었던 템플 용병단원들이 괴성을 지르며 깨어났다.

“저 새끼 저거 뺏어!”

오늘 아침도 기운차게 시작해 보실까.

막 추위를 대비한 뒤 건물을 나선 류신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 밖에 없었다. 강 혁에게 얻어 맞아 쿡쿡 쑤시는 정수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어라?”

보통 요맘 때면 길 한복판을 쾅 쾅 틀어막은 스노우볼들이 한가득인데, 오늘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라라?”

류신이 달려가며 여기 저기를 살펴 보았으나 지독한 눈덩어리들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정은 아마 서울 전역이 그러할 것이다.

스노우볼들은 귀신같이 사라졌다.

“허 참....... 알 수가 없네.”

류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저 편을 쳐다보았다. 겨울 치곤 꽤나 포근한 오늘, 길거리엔 꼬마들이 잔뜩 나와 눈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문득 그런 류신의 눈에 한 여성이 보였다.

“우와.”

류신은 눈 덮힌 거리를 걸어가는 그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전체적으로 새파란 색감이 아주 이질적이면서도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뭐 해? 빨랑 움직여.”

그 뒤에서 하품을 하며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 강 혁이 걸어왔다.

“아, 형님. 방금 엄청 예쁜 여자 봤거든요.”

“음?”

“어, 가 버렸다.”

류신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 * *

반지는 끝없는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서울 전역의 스노우볼을 빨아 들였지만 당연하게도 역부족일 것이다. 아주 약간의 한기만 더 빨아 들이면 될 듯 하다.

철호는 반지를 매만지며 테이블에 앉았다.

문득 밥집 문 앞에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늘씬한 키가 매력적인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드륵-

“아.”

오늘 아침의 첫 손님은, 아주 귀한 사람이었다.

“어서오세요.”

철호는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푸른 머리카락이 매우 인상적인 그녀는, 바로 동해바다의 해룡이었다.

해룡은 철호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엔 제가 손님이로군요.”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음식을 파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그녀는 밥집 내부를 살펴보다가, 방 쪽을 쳐다보았다. 방 안에서 슬쩍 고개를 내민 물의 정령왕, 겨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해룡은 흠칫 놀라더니 겨리를 빤히 보았다.

“놀랍군요.”

“.......”

[적인가요?]

“아니요.”

철호는 가볍게 대답하며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친구입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일 투성이에요. 요즘은 특히 말이에요, 더 이상 놀랄 일이 남아 있을까요?”

해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깍지를 낀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아무 말 없이 철호를 빤히 보았다.

한없이 투명한 푸른색의 눈동자는 철호를 그렇게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용이고 드래곤이고.

그 두 눈은 정말 티 없이 맑고 아름답다. 그런 눈을 보면 거짓을 고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이런 시선은 부담스럽단 말이지.

철호가 헛기침을 하자, 비로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를 본 적이 있겠죠.”

“예.”

“만년설산에서 저를 구해 주시고, 동해바다에서도 저를 구해 주셨죠.”

철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운명입니다.”

“당신은,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는 것을 한 건가요?”

반로환동. 노인이 젊어지는 것.

동방대륙의 무사들이 무의 극에 달했을 때, 전성기의 젊은 시절 신체구조가 변하는 기현상을 말한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당신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강철호입니다.”

“아라민이에요.”

이제야 그녀의 이름을 들었다. 동해바다의 해룡, 아라민의 양 어깨에는 문신처럼 새겨진 동그란 구체가 있었다. 구체는 은은하게 반짝였는데, 두 개의 여의주를 의미했다.

그녀는 고대하던 네 개 클래스 마스터에 성공한 것 같았다.

아마 동방대륙의 역사에서 두 개의 여의주를 문 용은 다섯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용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 그것을 이루게 해 준 눈 앞의 인간에게 갖는 감사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해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을 준비했다.

아무래도 자신보단, 철호에게 도움이 될 듯 하여 감사 인사를 겸할 겸 밥집을 찾은 것이다.

“우선 식사라도 좀 하시죠.”

철호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마침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들이 있었다.

< 프로즌 > 끝

ⓒ 고두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