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은 시장을 보러 나섰다.

빨간 머리카락은 제법 자라, 뒤로 질끈 묶었다. 본래 빨간색의 긴 머리카락은 남자에게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칸에겐 매우 잘 어울렸다.

‘머리를 잘라야 하나.’

아무래도 긴 머리카락은 귀찮다. 왜냐하면 매일 아침 머리를 감아야 하고, 머릿결에도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예전처럼 활기가 넘치진 않았다.

다만 세상은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칸은 쓰게 웃으며 철호가 적어 준 메모를 쳐다보았다.

[살칫살 5근]

[앨롭스 뿌리 2개]

등을 비롯해 각종 재료들이 적혀 있었다. 칸은 바짓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시장을 휘적 휘적 걸었다.

샥-

문득 저 뒤편에서 누군가의 미행이 느껴진다. 칸은 가만히 걷다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

저어기 과일가게의 나무상자 뒤에 웬 꼬마가 샥, 하고 숨어 있었다. 빤히 눈에 보여, 칸은 게슴츠리한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다시 몸을 돌려 시장으로 들어갔다. 철호가 주문한 재료들을 구매한 뒤, 다시 슬쩍 돌아 보았다. 샥! 하고 숨는 꼬마가 보였다.

“.......으이씨.”

칸은 귀찮아 죽겠다는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내, 아주 빠르게 시장 끝으로 달려갔다. 저 뒤에서 부리나케 달려오는 꼬마가 보였다.

칸은 시장 끝자락의 큼직한 플라타너스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타타타타탁!

허름한 옷차림의 꼬마아이가 달려와 좌우를 살피다가, 울상을 지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우는 그 아이를 보고 있기가 퍽 안쓰러워 칸은 머리를 긁적였다.

.

“응?”

철호가 칸을 빤히 쳐다보았다.

“웬 아이야?”

“어...... 그게 말이지.”

칸이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철호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칸을 쳐다보았다. 뭔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칸이 투덜거렸다.

“바, 바, 밥 먹여 줄 거야.”

“그래?”

“그래!”

“그렇군.”

철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대답했다.

-성향 : 선(善)

-클래스 : 인내의 시간

-클래스 달성도 : 상

-습득 능력 : 최상

꼬마아이는 이능력을 일찌감치 각성해 버린 모양이다. 인내의 시간이라....... 철호는 그 이능력이 뭐였더라? 라고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적어준 건 다 사 왔어?”

“어.”

칸은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냉장고에 넣어 둬.”

철호가 칸의 어깨를 두드리며 테이블로 나가, 꼬마에게 물었다.

“아가야.”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이는 대략 열 살이 채 안 돼 보였다. 사이퍼 스쿨에 입학할 나이는 아직 아닌 듯 하고, 입고 있는 옷가지나 행색은 영락없는 거지였다.

‘거지굴에서 온 건가?’

“집이 어디니?”

철호가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이는 철호를 빤히 보다가, 싫지 않은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집 없어요.]

그리고 연필로 또박 또박 글자를 썼다.

“집이 없어?”

철호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빙긋 웃었다.

“그럼,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아이는 다시 또박 또박 써 내려갔다.

[없어요.]

“.......”

철호는 아이에게서 흑마법의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아이의 몸에 남아 있는 흑마법의 기운이었다. 가만히 아이의 눈을 가리고, 아이의 몸에 손을 뻗었다.

샤아아악-!

흑마법의 기운이 빨려 나왔다.

“.......”

그리고 깨달았다.

‘스팀로이드 실험체로 사용됐던 아이군.’

포리너의 인간개조 프로젝트는 성공한 모양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가 가지고 있는 클래스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인내의 시간.’

인내의 시간이란, 최상급의 방어 클래스다.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의 대부분을 흡수하며, 흡수한 고통의 일부는 클래스 성취에 사용된다.

또한 흡수된 고통의 대부분은 한 곳에 모여, 방출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공격을 맞고, 그것을 흡수해, 그 힘을 역으로 이용해 공격이 가능한 공방을 겸한 클래스다.

이건 정말 보기 드문 클래스다. 퍼스트 클래스 까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에 준하는 클래스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어라?”

그때, 밥집으로 들어온 에코가 꼬마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꼬마가 왜 여기 있지?”

“알아?”

철호의 반문에 에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번에, 포리너의 간부들 다 끌고 빈 게이트로 갔거든. 거기서 싸우려고.”

“그런데?”

“그 게이트에 저 꼬마가 있었다. 싸움 끝나고 풀어 줬는데,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렇군.”

대강의 상황이 파악되었다.

이 꼬마는 포리너의 실험체 중 하나였으리라.

그 실험은, 엄밀히 따지면 실패일 것이다. 이 꼬마는 고유의 클래스 덕분에 오히려 클래스 달성도 ‘상’ 이라는 성과를 거두며 살아 남았을 것이다.

아마.

생존자는 이 꼬마 하나일 것이다.

철호는 꼬마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이름은?”

[실험체 705호에요.]

그 말을 보는 가슴이 쓰라렸다.

이 작은 아이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대체 어떤 욕심이 그들을 이 광기로 몰아넣은 걸까?

“몇 살인데?”

[모르겠어요.]

아이의 맑고 투명한 두 눈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 * *

아이는 태어나서 이런 음식은 처음 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칫살을 참기름과 소금, 후추에 재운 뒤 간장으로 만든 양념을 살짝 발라 구운 요리였다.

[이게 뭐에요?]

아이가 물었다.

“음식이란다.”

음식이란 개념을 모를 정도로 어릴 때부터 실험체로 쓰인 모양이다. 다행히 글은 알고 있었는데, 실험실의 한 남자와 친해져 배웠다고 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실험실에 있었다고 천진난만하게 적어 내려가는 아이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스팀로이드의 부작용이 확실했다. 모든 고통을 흡수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철호는 손수 고기를 잘라, 아이에게 먹여 주었다. 아이는 고기를 한 입 먹더니 한동안 멍하니 앉아서 이 말도 안 되게 맛있는 음식에 대해 고민했다.

[고맙습니다.]

아이가 부리나케 수첩에 글자를 적었다. 철호는 쓰게 웃으며 계속해서 고기를 먹여 주었다. 아이는 한 접시를 다 먹고선, 입맛을 다셨다.

“조금 더 줄까?”

[정말요?]

아이는 그렇게 한 접시, 두 접시, 세 접시를 더 먹었다. 이내 갑자기 일어나, 구토를 했다. 우웩, 우웩, 하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맛있는 것을 먹어 본 것은 처음이라, 많이 먹어 두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이가 허둥지둥 수첩에 글자를 썼다.

[죄소하니다. 때리지마라주새요.]

비뚤빼뚤하고 맞춤법이 틀린 글자가 급한 마음을 알려주었다.

철호는 그런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두 눈 가득히 울먹이고 있었다. 아이는 불안해 하고 있었고, 두려움에 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얻어 맞았던 것이 분명하다.

철호는 아이를 꼭 끌어 안아 주었다.

“괜찮아.”

그리고 아주 차분하고도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기선 아무도 너를 때리지 않는단다.”

부들부들 떠는 몸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안심하렴. 아이들은 원래 그러면서 자라는 거야.”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 * *

칸은 책을 펼쳐 놓고 고민했다.

-아마 너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왜 나를? 싸우는 건 저 마왕 놈이 다 했는데?

-손이 따뜻했대.

-뭐어?

칸은 게이트의 싸움에서, 에코가 객기를 부리는 걸 보며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기다렸다. 아마, 그 때였을까?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데리고 있는 게 어떨까?

-뭐어? 정말?

-나이를 보니, 곧 사이퍼 스쿨에 입학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 때 까지만.

칸은 철호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려고 한다.

뭐라고 지어야 할까?

칸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보류했다. 그나저나, 요즘 귤은 미궁에 푹 빠져서 통 올라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누군가의 이름을 짓는다는 건, 꽤 중요한 일이다. 칸은 귤의 이름을 지을 땐, 그냥 귤은 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침이 없었다.

어쩐지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허나 이 꼬마는 도저히 모르겠다.

샥-

미궁으로 들어서자, 저 편에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헬카우들이 보였다. 또한 저 쪽에 귤의 모습이 보였다. 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서 달려가 저 아기의 통통한 뺨에 사정없이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칸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귤의 옆에는 아까 그 꼬마가 쪼그려 앉아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칸은 어쩐지 그 뒷모습이 꽤 좋아 보여,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살금 살금 다가가 보자.

“웅, 얘 는 병 사 미.”

귤이 병아리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꼬마가 수첩에 글자를 적었다.

[병삼이가 이름이야?]

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차근 차근 글자를 읽었다.

“병......사......미......가.....이......루......미야?”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웅, 이 름. 병 사 미.”

귤은 제 입술을 꼬옥 깨문 채 귀여워 죽겠다는 듯 한 병아리의 등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꼬마에게 자랑하듯, 들어 올렸다.

“얘 는 병 시 파 리.”

움찔!

칸이 움찔 놀랐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대체 저 아기에게 누가 욕을 가르쳐 주었단 말인가? 아마, 그럴 놈은 단 한놈 밖에 없다.

바로 그 망할 마왕 놈이다!

[병십팔이야?]

“웅, 병 시 파 리 가 이 르 미 야. 시 팔 번 재 애 기 야.”

귤은 뀰뀰뀰 웃으며 병아리의 뺨에 제 뺨을 가져다 댔다. 병십팔이 라는 이름을 곱씹던 칸은, 그제야 이해했다. 그 단어가 그다지 좋지 못 한 단어임을, 아직 귤은 알지 못 하리라.

“긍 대 너 는 말 몬 해?”

[응, 나는 말을 할 수 없어.]

“구 래?”

귤은 제법 놀란 것 같았다.

“오 디 아 파? 배 거 파? 밥 머 글 래? 울 빠빠 밥 잘 하 눈 대?”

두 녀석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퍽 보기 좋았다. 칸은 코를 훔치며 녀석들의 뒤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득, 꼬마가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칸을 보더니 화색을 하며 달려와, 칸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귤 역시 칸을 보며 소리쳤다.

“오빠!”

귤이 달려와 와락 칸에게 안겼다.

꼬마가 우물쭈물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길래, 칸은 꼬마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꼬마는 조심스럽게 칸의 손을 잡았다.

뭔가 황송하다는 느낌이었다.

꼬마는 그렇게 칸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이 티 없이 맑다.

칸의 마음 속에, 뭔가 끓는 것이 생겨났다.

그래서 아이에게 손짓을 했다. 가까이 오자, 귤과 함께 꼭 끌어 안아 주었다.

귤은 재미있다는 듯 마구 웃으며 칸의 품에 머리를 마구 집어 넣었다.

“오 빠!”

“그래.”

“이 쨔 나, 오 느 른 병 이 시 파 리 가 아 파. 그 래 서 리 새 한 태 고 쳐 달 라 햇 져.”

이시팔이라니.

칸은 지긋이 눈을 감은 채, 귤에게 숫자와 욕설의 관계에 대해 언젠가는 꼭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쪽 세상은 언제나 맑음이나, 현실은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 저녁이다.

“저녁 먹으러 가자.”

“웅. 고 기 머 거?”

“고기 먹을까?”

칸이 일어서자 귤이 아장 아장 따라왔다. 꼬마는, 우두커니 서서 칸을 쳐다볼 뿐이었다.

칸은 조금 더 걸어가다가, 꼬마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너도 밥 먹으러 가자.”

꼬마는 배시시 웃으며, 부리나케 달려왔다.

칸은 두 아이를 안아서 번쩍 들어 올렸다.

“자 가자!”

“.......”

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리세는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완전히 애 같던 저 드래곤이, 어쩐지 조금은 성장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요즘 미궁에 새로운 일원들이 점점 늘어 가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철호에게 새로운 둥지를 찾아 보자고 해야 할까 보다.

아무래도 이쪽에 힘이 온전히 돌아온 정령왕이 있다 보니, 저것 봐라.

쏴아아-!

정령들이 벌써 태어나고 있잖아.

저 편, 시냇물에서 몸을 일으키는 물의 하급 정령이 보였다. 저 멀리 귤의 뒤를 따라 가는 물의 정령왕 덕분에, 물의 정령들이 이따금씩 태어나고 있었다.

< 너도 밥 먹으러 가자 > 끝

ⓒ 고두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