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삼천.

제삼천의 세계 역시 한번 봐 둔 바 있다. 대륙의 드래곤 마운틴과 매우 흡사한 세계. 그 세계에 싸늘한 기운이 깔려 있었다.

놈들은 제일천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 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착-

사방엔 골드 드래곤들이 한가득이었다. 철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드래곤들과는 안 좋은 인연도, 좋은 인연도 두루 두루 있다. 이 쪽의 골드 드래곤들이 그다지 좋은 인연이 못 된다는 건, 확실했다.

철호는 칼 람페이지를 아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섀도우 스페이드를 사용한 뒤 천천히 그들 사이에 스며들었다.

샥-

천천히 사방을 탐지해 나간다.

‘수리야.’

제 5천의 사도가 벨리드였다면, 제6천의 사도는 수리야란 말인가?

제7천의 마지막 사도. 최상층의 괴물의 이름은 브라마. 모두 다 이름들 뿐, 제대로 된 단서는 없다.

또한, 벨리드 전에서 다시금 확실히 느꼈다.

놈들은 각자의 층에서 움직이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

설사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봉인결계와 이어져 있는 자신의 마력을 끊은 뒤에야 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웬만해서는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다는 것.

이유는?

칼 람페이지를 구출해 온 것처럼, 마력을 끊는다면 지나치게 허술해질 테니까.

그렇다면.

최상층의 괴물 역시 이런 현상을 겪고 있단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기묘하다.

이것은, 누가 봐도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사도가 사도를 잠재우는 데 그토록 대단한 패널티가 필요하단 말인가?

최상층의 괴물은, 혼자서 하층의 네 사도를 해치울 정도의 무력을 지녔다.

철호가 제일천에서 난장판을 벌였는데도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단 하나의 이유만이 존재할 것이다.

‘놈은 칠천세계를 뛰어넘을 힘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방해 받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의 과정에 있다.’

문득, 과거에 꾸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칠천세계의 하늘이 열리고, 지상으로 강림하는 천상계의 존재들이.

철호는 눈을 부릅뜬 채 제삼천 깊숙이 들어갔다. 군데 군데에서는 아직도 이종족들이 채굴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저것들은 금혼석이다.

철호는 그들을 따라 은밀하게 움직였다.

이종족들이 개미떼처럼 줄이어, 한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편.

굽이진 협곡 너머, 거대한 산 하나가 서 있었다. 그 곳은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설산이었다.

싸아아아아-!

굉장한 한기가 밀려왔다.

캉-

카앙-!

마치 메아리처럼,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철호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줄을 따라, 설산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설산에 가까워 지면서 대기에 기묘한 것들이 포착되었다. 그것은, 마치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 같기도 했다. 온 허공에 둥실 둥실 떠올라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

파짓!

그것 중 하나가, 팟! 하고 터져 나갔다.

팟! 파파파파팟!

동시에, 온 사방의 민들레 홀씨 같은 형체가 터졌다. 수레를 옮기던 이종족들이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한가득이었다.

쿠구구궁-!

하늘이 울고 있다. 철호는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사도 벨리드의 죽음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온 대지가 요동쳤다.

문득.

철호는 전신이 꿰뚫리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도 섬뜩해, 마치 번개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서서히 고개를 내려, 정면을 본다.

거대한 설산이 움직이는 듯 싶더니, 이내 거대한 두 개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

두 개의 눈동자는 철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쐐애애액!

사방의 대기가 보이지 않는 칼날처럼 움직여, 철호의 전신을 베어 왔다.

철호는 땅을 차며 뒤로 물러섰다.

팟, 파파팟!

들켰다.

놈은 은신을 감지하는 것이다. 철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아예 놈을 향해 달려갔다.

파파팟!

땅을 차며 달려가던 철호는, 거대한 설산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설산인 줄 알았던 것은, 그 자체가 한 거대한 존재의 몸이었을 뿐이다.

쿠구궁!

몸을 일으키자, 마치 순백처럼 새하얀 은룡(銀龍)의 모습이 나타났다. 태산처럼 거대한 적이라는 말이 딱 맞는 상대였다.

놈은 양 날개를 좌우로 쭉 펼쳤다. 어찌나 거대한지, 그림자에 가려 온 세상이 시커매졌을 지경이다.

“......”

철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놈의 수준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방인의 소식을 듣긴 했다만.]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작고, 하찮은 인간이로구나.]

온 사방은 정말이지 소름끼칠 정도로 한기가 가득해졌다. 어느새 하늘에서 눈송이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픽 픽, 수레를 옮기던 이종족들이 꽁꽁 얼어붙어 쓰러져 갔다.

일순간.

파파파파팟!

사방에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철호에게 몰아쳤다. 그냥 눈송이가 아니라, 하나 하나가 강력한 탄환 같이 오거의 표면을 강타했다.

“큭......!”

쩍- 쩌저저적-!

오거의 표면은 매우 빠르게 얼어 붙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솔직히 예상하지 못 했다. 오거의 표면을 이루는 금속들은 대부분의 속성 공격에 내성을 갖추고 있고, 특히 독에 강했다.

얼어 붙는다.

쩍- 쩌저저적-!

점점 더.

파파파파팟!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눈송이의 탄환은, 기어코 오거의 표면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판단을 내려야 한다.

더 이상 옴짝달싹 할 수 없어지기 전에.

까각, 까각

오거의 몸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철호는 다급히 몸을 날려, 날아오는 수천수만의 눈송이들을 피하는 동시에 아공간을 열었다.

슝- 슈슈슝-

기다리고 있던 칼 람페이지가 자신의 회복과 버프 마법들을 쏘아 주었다.

까각, 까가가각!

움직임은 빨라졌지만, 오거에서 들려오는 굉음 역시 커졌다.

‘보통 빙결이 아니야.’

입술을 꼭 깨문 채 수리야에게 달려 들어갔다. 놈은 육중한 덩치를 가졌기에, 민첩하게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란 판단이 있었다.

싸아아아아-!

하지만,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놈의 공격수단은 어처구니없었다.

놈에게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보라가 불었던 것이다. 철호는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일순간.

쿠구구궁-!

놈이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그리고, 감지할 사이도 없이 철호의 오거가 뭔가에 직격타를 맞았다.

푹!

아릿한 고통이 밀려온다. 고개를 내려 본다.

“......!”

철호의 심장부를 꿰뚫은 것은, 얼음 송곳이었다. 일 미터 길이의 섬뜩하게 가늘고예리한 송곳들이 철호의 전신에 꽂혀 갔다.

푸푸푸푸푹!

오거의 표면이 깨어져 나가고, 전신에 송곳이 꽂혀 버렸다.

“크헉.”

철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온 몸에 피가 흘러 내리고,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고통이 왔다.

즉사.

그렇다. 즉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철호는 죽지 않는다.

이럴 때를 대비해, 에코의 불사의 의지를 가져온 것이다.

전신의 얼음 송곳을 뽑아 내고,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어진 오거를 소환 해제한다. 그리고 아공간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헉, 헉, 헉......”

칼 람페이지가 치료를 시작했다. 전신이 매우 빠르게 회복되고, 다시 버프류 마법을 받은 뒤에 다시 나타난 철호는 판단을 번복했다.

이거.

이대로는 답이 없다.

철호는 환영분신술을 사용했다. 삽시간에 여섯의 분신체가 나타났다. 그 분신체들이, 사방에 널리고 꽁꽁 얼어 붙은 금혼석 수레를 모조리 아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아공간......?]

귓가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도 아공간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철호는 놈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사방에서 강타해 오는 눈보라를 몸으로 들이받으며, 남은 금혼석 수레 하나까지 모두 챙겼다.

고통은 도를 넘어,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죽지 않는다는 점.

그 점 하나만이 위안거리일 뿐이다.

그 다음.

팟!

공간 이동으로, 제일천에 돌아갔다.

“크아아아.”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건, 매우 오랜만이었다. 상처는, 그냥 상처가 아니었다. 온몸에 틀어박혀, 지속적으로 큰 대미지를 주고 있었다.

팟!

다시 공간 이동.

이번엔 칠천세계로 통하는 입구까지 이동했다. 철호는 다급히 문을 열고, 하얀 방. 화이트 홀까지 떨어져 내렸다.

.

귤은 기분 좋게 일어나서 에코와 밥을 먹었다. 오늘 에코는 밥을 꽤 잘 해, 맛있었다.

아빠는 아주 큰 일을 하러 갔다. 한 달에 한 번은, 아빠가 큰 일을 하는 날이었다.

귤은 아마, 큰 일이란 아기스포츠단에서 하는 행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귤이 아는 가장 큰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혹은, 웨스턴 시티에서 본 농사 짓는 것 같은 걸 지도 모르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그 때.

드륵-!

밥집 문이 열리고, 아빠가 들어왔다.

귤이 숟가락을 내팽겨친 채 벌떡 일어나 아빠에게 달려갔다.

“빠빠!”

귤이 아빠의 몸에 몸통박치기를 했다.

휘청!

그 때.

아빠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빠는 아주 튼튼하고 힘이 세서, 절대 이럴 리가 없는데?

“우리 아가.”

철호는 휘청이던 몸을 바로잡고 귤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귤은 이상함을 느꼈다.

“빠빠?”

“응?”

“왤 캐 차 갑 지?”

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철호는 쓰게 웃었다. 귤은 다급히 아빠의 뺨에 손을 대어 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갑다!

귤은 너무 놀라서 전전긍긍하더니, 다급히 밥집을 나가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철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터덜 터덜 걸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다급히 정령계로 달려간 칸이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를 데려오고, 에코가 철호의 옆에서 전전 긍긍했다.

[가, 강철호 님. 이게 대체......!]

이그니스는 다급히 철호를 꼭 끌어안았다. 전신이 얼음 덩어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차가웠다. 이그니스의 열기가 철호의 몸으로 스며들자, 점점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도 위험 수준이었다.

“대, 대체......”

에코가 말문을 잃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철호는 그런 에코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에코.”

“그, 그래.”

“덕분에 살았다.”

“......응?”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칸은 그제야 한시름 놨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내쉬었다. 문득, 밥집의 문 앞에 서 있는 대머리 남자에게 시선이 갔다.

“누구?”

“......치료를 해 보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아니, 미안한 것 보단. 누구?”

“칼 람페이지다.”

철호가 말하자, 그제야 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 람페이지?”

“그래. 몸을 되찾아 왔어.”

“와...... 대머리네.”

칸이 낮게 중얼거렸다. 칼 람페이지는 자신의 머리를 만지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다 들린다.”

그 때.

드륵-!

문이 열리고, 귤이 다급히 돌아왔다. 귤은 여름 요정 로랑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로 랑 대 려 왓 져! 빨 따 스 하 개 해 죠!”

로랑이 철호의 몸 속으로 따스한 기운을 불어 넣었다. 귤은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다가, 얼어 붙었다.

“대, 대, 대, 대 머 리 다.”

“......”

< 대머리다. > 끝

ⓒ 고두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