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양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집채만 한 덩치의 이 사내는, 김만호. 식신이라고 다섯 도심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사나이였다.

그런 그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철호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은, 방송 프로그램을촬영하기 위한 협의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철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만호는 정말 열심히 사는 남자였다. 예전, 막노동을 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성공한 남자. 하지만, 성공해서도 변하지 않은 남자였다.

철호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아, 프로그램 이름이 뭐라고요?”

철호의 물음에, 김만호가 대답했다.

“예. 대식가 특집, 1vs몇! 입니다.”

말인 즉, 그가 하는 먹방 프로그램에서의 특별편이었는데 가게에 들어가, 손님들전체와 1vs다수 먹방 배틀을 찍는다는 말이었다.

식대는 모두 촬영 측 부담! 손님들은 그야말로 부담없이 도전할 수 있는 신개념 프로그램이었다.

철호는 꽤나 흥미가 돋아 그 촬영지로 밥집을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흐응.”

재미있을 것 같았다.

.

촬영날은 철호의 생각보다 더 붐볐다. 김만호의 명성을 노린, 우리의 다섯 수호자와 기어워크가 모두 모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촬영팀까지 들어오자, 밥집이 금세 꽉꽉 차 버렸다.

철호는 슬쩍 주방을 쳐다보았다.

칸과 에코가 티격태격대고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래도 일손이 모자랄 것 같아, 칸과 에코를 특별 조리사로 지정했다.

그들의 요리실력은 참담한 수준이지만, 다행히도 재료 손질은 빨랐기에 그럭저럭 도움이 될 것이다.

“아, 사장님. 이거 감사합니다. 이건, 저희 성의입니다.”

촬영감독이 사람 좋게 웃으며 은근히 봉투 하나를 찔러 주었다. 장소 섭외비라는 것 같았다. 철호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메뉴는 정하셨나요?”

메뉴는, 철호가 만들고 싶은 것 아무거나! 라는 조건이었다. 철호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은요.”

“김만호 씨 식성이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세 분이서 괜찮으시겠어요?”

그런 우려도 납득할 수준이다. 김만호의 식성은 정말 지상 최강에 가까웠으니까.

“스텐바이!”

점검이 끝났는지, 촬영팀이 촬영 직전을 알렸다. 철호는 주방으로 들어가, 오늘의 첫 메뉴를 살펴보았다.

첫 메뉴는 역시나 라면이다.

라면이란 손이 덜 가면서도 만인의 사랑을 받고, 또 효율적으로 배를 채워 주는 음식이었다.

어디보자.

철호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5인분 5인분 두 솥의 라면을 끓여 내기로 결정했다.

김만호라면 5인분의 라면을 3분이면 먹어 치운다. 과연, 최근 한껏 주가를 올리고 있는 다섯 수호자와 기어워크의 식성이 그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하, 이 몸이 라면이나 끓이는 신세라니.”

에코가 투덜거리며 솥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철호는 슬쩍 테이블 쪽을 바라본다.큐! 사인이 내려오고,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된 모양이다.

문득, 기어워크가 철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이는 것이 보였다.

철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어워크는, 살이 조금 더 쪘다.

* * *

보글보글!

라면이 탐스럽게 끓기 시작했다.

보통 때라면 라면에 이것 저것 추가해서 더 맛있게 만들겠지만, 오늘만큼은 순정으로 해 볼 생각이었다. 순정 라면 10봉지가 2그릇에 나뉘어 담겼다.

철호는 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칸이 한숨을 내쉬며, 라면 두 그릇을 가지고 테이블로 나섰다.

“자, 첫 번째 메뉴는 라면입니다! 한 그릇당 5봉지가 들어갔어요!”

테이블의 한쪽엔 김만호가 앉고, 나머지엔 다섯 수호자와 기어워크가 앉았다. 김만호는 자신의 젓가락을 든 채, 양 손을 모아 꾸벅 인사를 했다.

요즘 방송에서 미는 컨셉인 모양이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기 시작했다.

수호자 팀의 첫 멤버는, 기어워크였다.

“자, 시작!”

시작 소리와 함께 김만호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거대한 젓가락으로 면을 크게 집어, 후-! 하고 뛰어난 폐활량을 자랑한다. 한 번의 바람으로 면이 식으면, 그대로후루룩! 먹어 버리는 것이다.

후루루루룩!

반면, 기어워크는 날파리파였다. 작게 많이 먹자는 모토인 것 같았다.

후룩! 후룩! 후룩! 후룩!

기어워크가 금세 3인분을 먹어 치웠다. 그리고 바톤 터치를 했다. 두 번째 주자는, 마창사였다. 마창사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크게 함성을 외쳤다.

“우아압!”

그리고 라면을 대접째 들더니, 그야말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오오오!”

수호자 팀이 환호했다. 마창사는 그대로 국물까지 싹 다 비운 뒤에 접시를 호탕하게 내려놓았다.

쾅!

김만호와 수호자 팀의 라면 비우는 속도는 똑같았다.

철호는 예리한 눈으로 프라이 팬 위를 바라보았다. 볶음밥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덜 볶아진 밥들이었다. 아무리 봐도 시간 안에 맞추긴 힘들어 보인다.

철호가 에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코가 팟! 하고 사라지더니,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를 데려왔다.

철호는 다급히 그에게 프라이 팬을 가리켰다.

[......]

이그니스는 이런 대우에 익숙해져서, 사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화르륵!

불의 정령왕이 직접 볶음밥을 볶기 시작했다. 프라이 팬이 춤을 추며, 사방에서 골고루 열이 가해지자 밥이 매우 빠르게 볶아졌다.

“와다다다다다!”

한쪽에선 칸이 벌써 다음 메뉴 손질에 들어갔다. 칸의 손에 들려 있는 식칼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움직여 재료를 썰어 내고 있었다.

에코는 칸이 열심히 일 하는 것을 보자 씩 웃었다. 그리고 농땡이를 피우려다가, 철호에게 뒤통수를 맞고 다시 프라이 팬을 쥐었다.

“씨이......”

아무튼.

철호가 고기를 꺼내 손질과 밑간을 할 무렵, 에코는 거대한 볶음밥을 두 그릇에 나눴다.

5인분 치 볶음밥 두 그릇!

“다음 메뉴는 볶음밥입니다!”

수호자 팀에서는 젠틀맨을 내보냈다. 젠틀맨은 탄수화물 중독자로서, 볶음밥 킬러로 서초에선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턱에 접힌 살은, 순전히 탄수화물로 이루어진 전리품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었다.

젠틀맨은 품 속에서 자신의 숟가락을 꺼냈다. 다른 숟가락보다 볼이 넓고, 큰 수제 숟가락이었다.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만드는 건지.

철호는 젠틀맨이 김만호와 호각세로 먹어 치우는 것을 보며 다음 요리를 프라이 팬 위에 올렸다.

이번엔 스테이크다. 거대한 스테이크로서, 두터운 헬 카우의 등심살을 쓴다. 그냥 익히기엔 시간이 모자랄 듯 하니, 프라이 팬 채로 이그니스의 몸 속에 푹! 찔러 넣었다.

[......]

이그니스는 최선을 다 해 고기를 익혔다.

치이이이이익!

과연 정령왕이었다.

삽시간에 표면이 익고, 휴지 상태에 들어갔다.

“다음 메뉴는 스테이크!”

“제가 나서죠!”

꽃순이가 보무도 당당하게 등판했다. 그녀는 볼이 통통해졌는데, 마수에 빠져 살이 찐 덕분이었다.

* * *

“철호. 케잌을 가져왔다.”

에코가 엘리스에게 케잌을 받아 왔다.

보통 케잌의 크기가 아니라, 다섯 배 크기의 특대왕 초콜릿 케잌이었다.

철호는 살짝 테이블 쪽을 살폈다. 이미 젠틀맨과 기어워크, 마창사, 꽃순이는 빈사상태였다. 그들은 글렀다.

남은 것은 얼음마녀 채연, 칼날여왕 뿐!

그녀들은 살짝 부담스러운 얼굴로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쳇.”

주방에선 에코가 혀를 차고 있었다. 반면, 칸은 싱글벙글이다.

“봐라, 멍청아. 저 식신은 누구도 이길 수 없다니까?”

“시끄럽다고 했다.”

으르렁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내기를 건 듯 했다.

그나저나.

결과는 이미 나온 것 같다. 김만호는 아직 세 배는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수호자 팀은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다음 메뉴는 거대 초콜릿 케잌입니다!”

칸이 신명나게 소리치며 두 판의 케잌을 내려놓았다.

“으아아!”

“끝장이야!”

채연과 칼날 여왕이 동시에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다행히 다음 메뉴까지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은 생각을 할 무렵.

드륵-!

밥집 문이 열렸다.

“......?”

등장한 것은, 가녀리고 아리따운 미녀 섀도우 캣이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긴 생머리를 했고, 휴가 중이었는지 평상복 차림이었다.

가만히 침묵하던 기어워크가 벌떡 일어섰다.

“감독님! 이거, 손님이 왔으니까 우리 팀이죠?”

카메라를 잡고 있던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애초에 컨셉 자체가 식당에 오는 손님들 전체와 1vs다수 많이 먹기인지라 룰 위반이 아니었다.

“어...... 이게 대체......?”

아직 사태 파악을 하지 못 한 섀도우 캣이 어버버 거리자, 기어워크가 냉큼 그녀를 끌고 테이블에 앉혔다.

“시끄러워요 아줌마. 빨리 이거 먹어요.”

“뭐, 뭐?”

그녀는 다급히 철호를 바라보았다. 철호는 그녀를 보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라고 입모양으로 말한 뒤,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섀도우 캣은 어쩐지 시무룩해져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눈 앞의 초콜릿 케잌은, 그야말로 엄청난 물건이었다.

한 눈에 봐도 80%는 초콜릿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초콜릿 향과 보기만 해도 아찔한 초콜릿 크림은 그야말로 그녀의 인생 중 최고의 음식임을 알려 준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스푼을 들었다.

“나, 딱 한 입만 먹을 거야.”

* * *

-와아아아아!

수호자 팀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보니 섀도우 캣이 김만호보다 훨씬 빨리 초콜릿 케잌을 모두 먹어 치웠다.

그녀는 신들린 듯 먹어 치우더니 스푼을 내려놓고,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리고 양 머리를 쥔 채 절규했다.

“이, 이건 꿈일거야아아아!”

그녀가 후다닥 밥집을 나가 도망쳤다.

다음 메뉴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우리 차례야!”

“응!”

채연과 칼날여왕이 합심해 산더미처럼 거대한 파르페를 공략해 나갔다.

김만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마이페이스로 먹어 치울 뿐이다. 저 우직함과 충실함이 놀랍고도 대단했다.

그렇게 메뉴가 두 번을 오고갔다.

불고기 정식, 튀김 덮밥.

근근히 버티던 수호자 팀에게도 한계가 온 듯 하다. 김만호는 여전히 우걱우걱 먹어 치우지만, 수호자 팀은 튀김 덮밥에서 딱 멈춘 상태였다.

모두 다 뱃속이 가득 찬 느낌!

“에이 씨.”

전전 긍긍하던 에코가, 결국 조커 카드를 뽑아 들었다.

“이 몸, 어디좀 다녀온다!”

팟!

* * *

“......끝장이야.”

꽃순이가 중얼거렸다.

“오늘이야 말로 저 괴물 아저씨를 이겨 보나 했더니.”

기어워크도 낙심한 얼굴로 읊조렸다.

우걱 우걱

김만호의 페이스는 오히려 올라간 느낌이었다. 세상에, 저런 아저씨가 있다니.

모두가 승리에 대한 의욕을 상실할 그 무렵.

드륵-!

밥집 문이 열렸다.

“......!”

그리고 들어선 것은, 비쩍 마른 여성이었다. 철호는 그녀를 보자 마자 입을 쩍 벌렸다.

그녀는 동해바다의 해룡, 아라민이었다. 아라민은 가을철이 되면 급격히 마른다.겨울을 대비해 가을철에 음식을 비축해 두어야 하는데, 올해는 바빠서 여의치 않아 아직도 빼빼 마른 상태 그대로였다.

기어워크가 벌떡 일어섰다.

“나 이 아줌마 알아! 아줌마! 식신 아줌마다!”

“오오오!”

“오오!”

수호자 팀이 환호했다. 기어워크가 냉큼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아라민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철호를 보더니 생긋 웃었다.

철호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팟!

곧, 주방에 에코가 도착했다. 에코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 똥씹은 얼굴인 칸을 바라보았다.

“이, 이거 반칙이야!”

“뭐가! 멍청아! 죽고 싶냐!”

철호는 두 이종족의 정수리를 내리찍으며 말했다.

“시끄러워. 빨리 다음 재료나 손질해.”

그 뒤로, 지옥의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튀김덮밥, 짜장면, 탕수육, 치킨, 비빔밥, 떡볶이를 비롯한 다양한 메뉴들이 나타났고 아라민과 김만호는 약속했다는 듯 그것들을 먹어 치웠다.

.

“허억, 허억......”

김만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식신이란 클래스의 능력을 이용해 전신으로 음식을 소화시켜 보냈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였다.

눈 앞의 여자는, 예전의 그 여자가 확실했다.

그녀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 그녀는, 작년 가을이 끝날 무렵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니까.

오랜만에 돌아온 그녀는 더욱 무시무시하게 먹어 치우고, 또 아름다웠다.

식신은 결국,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졌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수호자 팀이 들썩였다. 아라민 역시 숟가락을 놓고, 빙긋 웃으며 김만호에게 손을내밀었다.

“다음에, 제대로 된 승부를 하죠.”

“예.”

두 남녀가 악수를 나누자, 촬영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방송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고, 밥집에는 거대한 설거지 거리만 남은 셈이다.

철호가 흐뭇한 얼굴을 하며 슬쩍 주방을 돌아보니, 칸이 에코에게 굴욕을 당하고 있었다.

-멍청아, 이제부터 귤 당번 2주일 치는 네 몫이다.

-크윽.

-그리고, 이 몸은 오늘부터 귤에게 뽀뽀를 10번씩 받을 거다.

-크으윽!

-마지막으로, 앞으로 2주일 간 이 몸은 네 형이다. 형이 시키는 일은 군말 없이 따라야 해. 아니면 성을 갈아야 한다. 여성이 되고 싶나, 도마뱀?

-으으윽!

칸이 비통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는 게 보였다.

* * *

그나저나.

1vs몇! 이라는 대식가 특집편이 다시 촬영되는 일은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밥값이 싸기로 유명한 철호네 밥집에서조차 음식값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출연료에 촬영료, 섭외료, 식대를 모두 포함하자 사상 최고의 적자가 났다는 얘기였다.

아무튼, 1vs몇! 이라는 특집편은 비운의 프로그램으로서 1회 상영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다.

< 1vs몇! > 끝

ⓒ 고두열

진짜가 확실해. >

아이가 있다는 건, 참 신비로운 일이다.

아이는 생각보다 금세 배우며 자라난다. 어제 본 아이와, 오늘의 아이는 항상 달라져 내일이 기대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세상의 행복을 다 느끼는 것 같다. 밥을 잘 먹어 주거나, 방긋 방긋 웃어 주거나, 가끔은 행복하다는 말을 해 줄 때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으니까.

물론, 그 중에서 가장 예쁠 때는 자고 있을 때다.

“아가?”

철호는 신문을 보다가, 톡- 톡- 소리가 나서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귤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꾸벅 꾸벅 졸며, 테이블에 숟가락 손잡이 부분을 부딪히고 있었다. 철호는 신문을 내려놓고, 천천히 걸어 귤의 입에서 숟가락을 빼냈다.

하루 온종일 뛰어다니다가 탈진해 쓰러져 잠들어 버린 귤을 품에 안고 조심히 걸어와,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귤은 침대의 느낌이 좋은지 꼼지락거리다가, 양 팔을 바둥거렸다.

항상 아빠가 누워 있는 자리를 더듬거리던 귤은, 아빠가 없는 것을 깨달았는지 눈을 게슴츠리하게 떴다. 졸려 죽겠지만,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아빠를 찾는다.

철호는, 그 앞에 서 있다가 빙긋 웃으며 귤의 옆에 누웠다. 그제야 귤은 아빠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색색-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색- 색-

숨소리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철호는 한참 동안이나 옆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내일의 메뉴에 대한 생각.

다가올 적에 대한 생각.

여덟 번째 클래스에 대한 생각.

옛날 생각.

행복했던 순간, 슬펐던 순간, 기대되는 순간.

고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러 감상이 오고가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다. 귤은 이제 완전히 곯아떨어졌으니,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오늘은 무엇을 해볼까 하면-

특제 발모제를 발라 볼 생각이다.

.

발모제를 왜 발라 보는가.

그것은, 파타의 주문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쌍둥이 드래곤이 만들어 낸 이 기적의 연고를 활용하는 법에 대해 연구 중인 것 같았다.

파타는 대단한 남자였다.

철호는, 그를 다시 만난 것을 정말 천운이라고 여겼다. 그는 강인하고 탐구적이며, 또한 열정적인 블랙 드래곤이었다.

그의 장비가 없었다면, 아마 철호는 벨리드에게 진작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거 그냥 바르면 되는건가.”

철호는 자신의 팔 다리에 슥슥 발모제를 발랐다. 이마나 코 부분에도, 턱 주변에도.

닿는 느낌은 퍽 부드럽고도 평범한 로션 같다. 골고루 바르면, 금세 기화되어 바른 느낌조차 남지 않는다.

-바르고 나서, 얼마만에 효과가 나오는 지 알려줘.

가만히 있어 볼까.

30분, 1시간, 2시간.

그리고 3시간 째.

철호는 문득, 팔다리에 검은색 털들이 자라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세 시간.”

세 시간이 딱 지나자 마자, 털은 무수히 자라났다. 철호는 금세 털복숭이처럼 변해 버렸다.

드륵-!

마침 문을 열고 들어선 섀도우 캣이 그 모습을 보더니 딱딱하게 굳었다.

철호 역시 그녀를 보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철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뻐끔거렸다.

* * *

“세상에. 그 발모제를 발랐단 말이에요?”

그녀가 놀랍다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철호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았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는 귓가에 노랫소리처럼 들려왔으니까.

“네. 파타 씨가 쓸 데가 있다는군요.”

철호의 길어진 머리에, 섀도우 캣이 빗질을 시작했다. 철호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허리까지 길어졌다. 팔과 다리 그리고 여기저기 난 털들은 진작 다 밀어 버렸지만, 머리카락이 길어진 건 실로 오랜만이라 잠깐 놔두었다.

“머리카락이 긴 것도 나쁘지 않아 보여요.”

그녀의 소감이었다.

철호는 피식 웃어 버렸다.

머리 뿐만 아니라 수염도 아주 오랜만에 덥수룩하게 났다. 거울을 보니, 철호의 수염은 양 뺨에서부터 코 그리고 턱까지 빼곡하게 이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을 잘라야겠다- 라고 생각할 그 무렵.

드륵-

안방 문을 열고 잠에 잔뜩 취한 귤이 아장 아장 걸어 나왔다. 아무래도 소변을 보려는 모양이었다. 귤은 걸어가다가 아코! 하고 넘어진 다음, 제법 아픈지 훌쩍 훌쩍울려다가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그리고, 철호를 바라보았다.

“......”

일순간, 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귤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두 눈에 잔뜩 경계의 빛이 서렸다.

“터, 털 보 개 물!”

철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돼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본 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털보 괴물이라기엔 털이 너무 없었다. 그저 수염이 길고, 머리카락이 길 뿐이었다.

“빠빠 랑 똑 가 치 글 그 내?”

귤은 그 옆의 섀도우 캣도 바라보았다.

“맘 마?”

귤은 천천히 철호와 섀도우 캣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얼굴로, 철호를 바라보았다.

귤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는 양, 후다닥 제 방으로 달려가서 동화책 한 권을 가지고 달려 나왔다.

[아빠는 외계인]

우주에서 아빠랑 똑같이 생긴 외계인이 와, 하루 동안 지내다가 돌아간다는 내용의 동화책이었다.

귤은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철호의 근처로 와 킁킁 냄새를 맡아 보고 이마도 만져 보았다.

아빠랑 똑같았다. 하지만, 아빠는 이렇게 털보가 아니었다. 귤은 고심하다가,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외 개 인 이 다.”

“......”

철호는 빤히 귤을 보다가, 문득 장난기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래, 난 외계인이다.”

풉!

섀도우 캣이 웃음을 참았다.

“울 빠빠 는 오 디 갓 져?”

귤은 말을 한 뒤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큰 일 하 로 갓 구 나?”

“......음.”

“글 쿠 나...... 낼 와?”

귤은 어쩐지 시무룩해져, 철호의 무릎에 턱 걸터앉았다. 그 느낌이 아주 익숙해 고개를 뒤로 젖혀 철호를 올려다 보았다.

“외 개 인 갱 장 하 다. 울 빠빠 랑 똑 가 태.”

귤은 철호의 수염을 만지작 거려 보기도 하고, 긴 머리카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확인했다. 모두 진짜였다.

“데 단 하 다~! 빠빠 가 불 럿 져?”

“음...... 비슷하지.”

철호가 대답하자 귤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글 쿠 나. 외 개 인 아 조 시 도 밥 잘 해?”

“응?”

“울 빠빠 는 요 리 잘 하 는 대. 아 침 애 몰 머 글 라 나......”

귤은 그것을 고민하더니, 다시 꾸벅 꾸벅 졸았다. 섀도우 캣이 키득대며 웃더니, 귤의 뺨을 쓰다듬었다.

“먼저 가 볼게요.”

“또 와요.”

그녀가 떠나고, 철호는 귤을 다시 침대에 눕혀 준 다음 주방으로 들어갔다.

.

날이 밝자마자 귤은 벌떡 일어서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외계인을 발견했다.

“아 직 잇 구 나!”

“응, 뭐. 그렇지.”

철호는 귤을 보며 키득대며 웃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살칫살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았다.

일등으로 일어난 귤이기에, 특별히 더 두툼한 고기를 줄 생각이었다. 철호가 스테이크 접시를 테이블에 놓고, 귤을 번쩍 들어 궁둥이를 토닥인 다음 의자에 앉혔다.

귤은 스테이크를 썰어서 먹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의 맛과 똑같은 모양이다. 귤은 연신 새상애,를 중얼거리더니 밥을 다 먹곤 제 가방에서 색칠놀이를 꺼내 놀기 시작했다.

“오늘은 안 나가서 노니?”

철호가 묻자, 귤은 고개를 끄덕였다.

“웅.”

“왜?”

“웅, 빠빠 가 올 태 니 간?”

“......”

철호는 귤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칠천세계로 갔을 때, 귤은 항상 집에 있던 모양이다. 아마, 아기는 아빠가 돌아오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철호는 가만히 귤을 내려다 보다가, 말했다.

“아빠는 어차피 돌아올 텐데?”

“웅......”

귤은 어쩐지 시무룩해졌다.

“근 대, 빠빠 는 큰 일 하 구 오 면 항 상 아 파.”

“......”

“글 애 서 규 리 가 잇 어 야 대.”

가슴이 뭉클했다.

철호는 쪼그려 앉아 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구나. 귤이가 있어야 하는구나?”

“웅!”

철호는 빙긋 웃었다.

아이가 없을 땐, 아이는 사실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애들은 작고, 힘 없으며 손이 많이 가는 존재들이었다. 철호가 살아가던 치열한 투쟁의 삶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생기니, 이제는 오직 아이가 삶의 기준이 되어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봄비처럼 잔잔히 내려, 어느 순간 가슴에 파고들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지.”

철호는 귤의 뺨을 쓰다듬은 뒤 일어섰다.

다음 사도와의 싸움도, 최상층의 괴물과의 싸움도.

그들과의 싸움은 항상 두렵지만, 철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절대로 죽지 않고, 기왕이면 승리를 따 내 돌아올 것이다.

놈들이 이 평화를 망치려 든다면, 철호는 그들을 가만히 놔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철호는, 이런 평화로운 삶을 위해 지난 세월을 살아 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자.

외계인 놀이는 여기서 끝이다.

.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수염까지 깔끔하게 민 철호는 다시 밥집으로 돌아왔다.

귤은 테이블에서 동화책을 읽다가, 밥집으로 돌아온 철호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빠빠!”

“응.”

귤이 후다닥 달려와 철호의 배에 몸통박치기를 날렸다. 철호는 그런 귤을 번쩍 들어 올렸다.

“외 개 인 은 갓 져?”

“응, 외계인 갔지.”

“글 쿠 나.”

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칫, 놀랐다. 그리고 쭈뼛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빠빠.”

“응?”

“이 상 하 내?”

“응......?”

귤이 실눈을 뜬 채 물었다.

“왤 캐 빨 리 왓 져?”

“......”

귤이 착! 하고 땅에 내려앉은 다음, 꼬마 탐정이 된 듯 뒷짐을 진 채 말을 이었다.

“빠빠 큰 일 하 면 밤 애 와 야 하 는 대?”

“......”

“시 걔 작 은 바 늘 이 두 바 키 돌 아 야 오 는 대? 왜 한 바 키 돌 앗 는 대 왓 져?”

예리했다.

철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곰곰이 생각했다.

“어...... 사실 외계인은 거짓말이었어. 아빠는 발모제라는 걸 발라서, 머리카락이랑 수염이 길어진 거야.”

귤은 실눈을 떴다.

“아 닌 대?”

“......?”

“빠빠 는 규 리 한 태 거 짓 말 안 하 는 대?”

철호는 결심했다.

다시는, 장난이라도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귤은 뒷짐을 진 채 다시 밥집을 아장 아장 신중한 얼굴로 걸어다니다가, 입을 열었다.

“그 럼 문 재.”

“그, 그래.”

“규 리 가 가 장 조 아 하 는 장 난 감 은?”

“블록이지. 아빠가 사 준거. 다섯 개나.”

철호의 말에 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 앗 져. 하 지 만 이 곤 너 무 시 운 거 야.”

의외로 철저한걸.

“빠빠 가 규 리 화 나 면 주 는 거 슨?”

철호는 천천히 자신의 서랍으로 가, 두 번째 서랍 칸을 열었다. 그리고 조개 모양 부드럽고 달콤한 초콜릿을 하나 꺼내 귤에게 주었다.

“핫! 징 쟈 다!”

귤은 그것을 낼름 받아 먹었다. 그리고 철호의 눈치를 보더니, 또 뒷짐을 지었다.

“하 나 뿌 니 야?”

철호는, 하나를 더 주었다.

귤은 황송하다는 듯 그것을 또 받았다. 그리고 낼름 먹어 치웠다.

“이 재 반 쯤 확 실 해 졋 져."

마지막 관문은, 철호의 침대였다.

철호는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귤이 침대를 기어 올라와, 아빠의 옆구리에 고개를콕 박은 채 눈을 감아 보았다.

"웅......"

조금 비비적 부비적 거리더니, 아주 익숙한 폼을 잡았다. 귤은 그제야 밝게 웃었다.

"징 쟈 야! 징 쟈 빠빠 가 확 실 해!"

그리고 그것이 꽤나 편한지, 살짝 눈을 감더니 이내 콜콜 잠들어 버렸다.

"......"

철호는 피식 웃으며 그대로 누워 천장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마침 겨울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방 바닥에 내리쬐었다.

한가로운 아침이었다.

< 진짜가 확실해. > 끝

ⓒ 고두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