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은 유치원 숙제를 하기 위해,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이 책상은 세 살 때 아빠가 사 준 책상인데, 네 살인 지금도 딱 맞아서 아주 좋았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공책을 펼친 귤은 연필을 들었다.

귤은, 글자를 아주 잘 쓰는 편이다. 왜냐면 아빠에게 반성문을 내기 위해 글씨연습을 부지런히 했기 때문이다.

아빠의 반성문은 굉장한 요령이 필요했다.

우선.

공책 한 장을 빽빽이 채워야 하니까, 처음부터 ‘제가 그걸 잘못했습니다’ 하고 시작하면 답이 없다.

그래서 귤은 반성문을 시작할 땐 그날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작성하기 시작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저녁 쯤에 브로콜리가 나왔는데 그걸 먹지 않고 몰래 버리려다 걸려서 반성문을 쓴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놀고 TV도 보고 한 과정을 모조리 쓰는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반성문 2장을 쓸 수 있다. 사실 처음엔 어려워 보이지만, 막상 해 보면 쉽게 익숙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로.

귤은 의자에서 내려와 아장 아장 걸어, 오빠의 방 문을 열어 보았다.

오빠는.

반성문 20장을 써야 했다.

무슨 잘못을 했냐면, 오빠는 어제 상사를 때렸다고 했다. 상사는 이름이 분명하다.

아마도, 김씨일 것이다. 이름은 김상사 정도일까?

왜냐면 귤의 주변엔 김씨 성을 가진 친구들이 아주 많았다. 강씨는 아주 드물고, 김, 박, 이 씨가 제일 많다.

아무튼 친구를 때리는 건 나쁜 일이고, 오빠는 반성문20장을 써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번엔 에코의 방을 슬쩍 들여다 보았다.

에코도, 20장을 써야 한다. 귤이 밥을 먹으며 주워 들은 이야긴데, 에코는 옆에서상사를 때리는 오빠를 부추겼다고 했다. 아무튼......

귤은 혀를 찼다.

“못 댓 져.”

귤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책상에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연필을 든 채 눈을 깜빡였다.

오늘의 숙제는 가족의 직업 알아오기다.

직업!

귤의 직업은 어린이였다. 귤은, 아주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편이다.

우선 요즘은 안 그래도 바쁜 계획에 유치원까지 가야 해서,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유치원에 다녀와서 영물들과 놀아야 하고, 또 가끔은 초코방에 가기도 해야한다.

귤은 브로콜리가 아주 싫다. 브로콜리를 안 줬으면 하지만, 아빠는 가끔씩 꼭 브로콜리를 준다. 그것도 잘게 썰어서 소스에 볶으면 모를 줄 알지만, 귤은 다 간파하고 있었다.

브로콜리는 브로콜리 특유의 맛이 난다. 그 이상한 맛은, 한 입만 먹어도 알 수 있다.

아니!

귤은 눈을 부릅떴다.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다. 아마 이 도시에 귤 만큼 대단한 브로콜리 감별사는 또 없을 것이다.

자자.

브로콜리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

직업이 문제인데......

[나의 가족 구성원은 총 몇 명인가요?]

시작부터 난제다.

“......”

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밥집으로 나가, 아빠에게 물었다.

“빠빠.”

“응.”

“이 고 어 캐 써 야 해?”

철호는 문제를 보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귤이는 가족이 아주 많은데, 일단은 우리 집에 사는 사람들만 쓰는 걸로 할까? 너무 많으면 귤이 힘드니까?”

“웅.”

세상에!

귤은 깜짝 놀라 버렸다. 역시 아빠는 똑똑했다. 귤은, 아마 아빠가 이 세상에서 모르는 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브로콜리 음식이 나왔을 때, 냄새를 귀신처럼 맡고 밥을 안 먹겠다고 하는 귤의 말은 몰랐을 거다. 귤은 괜히 으쓱해져 웃었다. 그건 모두에게 비밀이고, 진실을 아는 것은 겨리 뿐이었다.

귤은 아빠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다음 문제를 보았다.

[나의 가족을 소개해 보아요.]

귤은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먼저 아빠를 써 볼까 한다.

귤이 볼 때, 아빠는 세상에서 최고로 대단했다. 아빠는 못 하는 게 없고, 모르는 것도 없다. 그리고 돈은 조금 없는 것 같지만, 집도 있고 충분히 성공한 사람이었다.

귤은 가끔 또래 친구들의 아빠가 올 때 본 적이 있는데, 귤의 아빠는 다른 아저씨들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어리다는 건 좋은 걸까?

사실, 좋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저히압바는 요리사임니다.]

귤은 글을 적어 내려갔다.

아빠는 굉장하고, 최고로 대단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자.

다음은, 칸이다.

오빠는......

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귤은 아빠에게 물었다.

“빠빠.”

“그래.”

“오 빠 는 잘 하 는 개 모 야?”

“......”

철호는 솔직히 당황했다.

칸은 솔직하고 착한 녀석이었다. 되도록, 귤에게는 칸이 아주 훌륭한 녀석으로 생각되었으면 싶다.

“음...... 오빠는 잘하는게 아주 많단다? 힘도 세고, 그림도 아주 잘 그리고, 목소리도 아주 좋고......”

그리고 또......

철호는 최대한 칸의 장점을 떠올렸다.

“잘생겼고...... 그리고...... 힘도 세고...... 멍청하-아니, 아주 똑똑하고, 착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렇지?”

“글 쿠 나.”

귤은 오빠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오빠는 검술을 쓰는데 그게 아주 기가 막혔다. 언젠가 귤의 아지트 천장을 싹둑 잘라내서 새 아지트를 찾는데 고생했던 것도 떠올랐다.

[저히옵바는 칼을 아주 잘씀니다. 마구 히두룹니다.]

생각해 보니, 오빠는 운동을 아주 잘 하는 것 같다.

[규리내 아지트도 옵바가 잘랏슴니다.]

글자로만 쓰면 선생님이 이해를 못 하실까 봐, 귤은 오빠의 그림을 그리고 칼도 쥐어 주었다. 오빠가 아지트를 잘라낼 때의 그림을 그려 본다.

그 때 오빠는 어찌나 대단하던지, 귤은 정말이지 놀라 버렸던 것이다.

또, 오빠는 귤을 누가 괴롭히거나 하면 가서 혼쭐을 내 주고 했다.

[싸움두 최고로 잘함니다.]

역시 오빠는 대단하다. 귤은 방긋 웃었다. 귤은, 아빠 다음으로 오빠와 에코가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것은 총 네 명으로, 아빠와 오빠 에코 그리고 겨리다.

그 다음으로 신뢰하는 건 섀도우 캣, 리세, 파타 아저씨 등이 있다.

됐다.

오빠는 이 정도면 됐고.

다음엔 에코를 볼까.

에코는 무엇을 잘 할까?

아!

[애코 는 과자를 잘죠서 좃습니다. 맨날 쵸코랫 줌니다.]

그리고......

귤은 얼마 전, 예거가 와서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에코는 욕을 기가막히게 잘했다. 에코가 하는 욕은 정말 멋져서, 귤도 가끔 따라하곤 했다.

그 때마다 에코는 귤의 입을 틀어 막으며, 아빠에게 말 하지 말라고 했다. 귤이 고개를 끄덕이면, 초콜릿을 하나씩 준다.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욕을 지존잘함니다.]

에코는 최근 ‘지존’ 이라는 말을 잘한다. 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아무튼좋은 뜻이라는 것은 알겠다.

또, 에코는 사람이 아주 착해서 귤 또래의 친구들과 굉장히 잘 놀아주었다. 귤은 그것을 보며 많이 배우는 편이다.

[규리는 애코애개 만이 배움니다.]

-에, 에코. 에코는...... 마왕.

문득 예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왕이 뭐지?

모르겠지만, 일단 에코의 별명 같은 건가 보다.

[마왕임니다.]

귤은 썩 만족했다.

겨리는 귤이 제일 쉽게 쓸 수 있었다.

[겨리는 차카고 규리가 해달라는고 다해줌니다.]

철호가 흘끗 귤이 뭘 쓰는지 보려는 순간.

드륵-

밥집 문을 열고 파타가 들어왔다.

“철호야. 잠깐 좀 볼까?”

“아, 예.”

“우리 아가, 이리 와 봐.”

파타는 귤을 보더니 번쩍 들어 올려 비행기 놀이를 해 주었다. 그리고 내려 놓은 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빠 다녀오마. 귤이, 배고프면 에코한테 뭐 해 달라고 하렴. 알았지?”

“웅!”

귤은 손을 흔들었다.

.

조은영 씨는, 서대문 유치원의 보육교사다. 그녀는 착하고 순한 성품으로, 아이들을 사랑했다.

오늘 그녀는 아이들의 어제 숙제인 ‘나의 가족을 말해보아요’를 하나 하나 읽어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로 순수하다. 아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른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 표현이나 묘사도 아주 순수한 것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윤찬이 거 다 봤고, 어디......”

[강 귤]

공책에 크게 적혀 있는 이름이 눈에 띈다.

“이번엔 우리 귤이 걸 볼까!”

조은영은 귤의 공책을 들어, 무엇을 적었는지에 대해 꼼꼼히 살펴 보았다.

“어머.”

그녀는 귤이 편부가정인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못 느낄 정도로 티없이 자란 것. 그것 만으로도 철호를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귤은 아빠에 대한 신뢰도가 굉장히 높은 것 같았다. 가정에서 아주 사랑받는다는 증거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글을 보던 그 무렵.

“......응?”

[저히옵바는 칼을 아주 잘씀니다. 마구 히두룹니다.]

칼......?

그녀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좌우로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그림이 보였다.

한 남자가(칸으로 보이는) 한 손에 검을 쥔 채 뭔가를 베어내는 그림이었다. 꼬맹이(귤로 보이는) 는 그 아래 납죽 엎드려 있었다.

“......”

게다가?

[욕을 지존잘함니다.]

요, 요, 욕을?

[규리는 애코애개 만이 배움니다.]

그걸 배운다고?

그녀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니다.

애들은 작은 것만 볼 때도 있기에, 어쩌면 굉장히 과장됐을 수도 있었다.

얼마 전 인규 때가 그랬다. 인규라는 아이는 아빠가 칼을 쥔 채 무섭게 웃는 그림을 그려 두어, 화들짝 놀라 가정방문을 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인규의 아버지는 협회의 대장간에서 일을 하고 계셨고 그 그림은 사실틀린 그림이 아니었다. 그저 어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오해를 했을 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방문을 해야겠다.

.

“아...... 음...... 이런......”

철호는 난감한 듯 얼굴을 감싸쥐었다.

“제, 제, 제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아뇨, 아뇨, 아닙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그러니까 이게...... 칼은...... 저 녀석이 검을 쓸 줄 압니다. 에스판 대륙 쪽에서 넘어왔거든요.”

칸은 에스판 대륙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며, 시민권에 한 줄이 추가된 바 있었다.

-에스판 대륙에서 차원의 균열을 통해 지구에 불시착함(차원 불시착자)최근엔 저런 경우가 제법 있어, 협회에서도 전문 용어를 만들어 둔 상태였다.

“아...... 혹시, 각성자이신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닌 걸로 하는 게 낫다.

“그냥, 그쪽 세계는 누구나 검술을 배운다고 하더군요. 제 조카로 삼은 지 4년 쯤됐습니다.”

“아하...... 그러셨구나.”

조은영이 그제야 이해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에코의 글을 가리켰다.

“그, 그럼 이 분도......?”

“아, 그 녀석은......”

-야이 머저리같은 도마뱀 자식아! 일꾼 더 붙여! 아니! 이 멍청아! 차라리 죽어! 죽어 버려! 질럿 막아야지! 야아아아아!

방 저 안에서 칸과 에코가 스타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코가 욕을 내뱉는 소리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

철호는 코를 훔쳤다.

“제가 저 녀석은 책임지고 교육시키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 *

덜컥!

에코는 방 문을 열고 들어온 철호에게 물었다.

“왜?”

철호는 가만히 에코의 침대에 앉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싹!

에코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싸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왜?”

“네게 몇 장을 쓰게 해야 할지 고민중이다.”

“......가, 가, 갑자기?”

“그래. 집에서 욕을 하지 않겠다는 주제로...... 40장.”

“억!”

에코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철호는, A4용지 40장을 내려놓곤 천천히 방을 나섰다. 방문 앞에서 문득 돌아보며 덧붙였다.

“앞으로 집에서 욕 한 마디 할 때 마다...... 10장씩 늘어난다.”

“자, 자, 잠깐만! 철호!”

에코의 구슬픈 목소리를 뒤로 하고, 철호는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