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누가 그래?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좋았어, 얼마 안 남았다!'

아르벤은 속으로 그런 기쁨의 기색을 감추면서 마력을 한층 더 강하게 뿜어내기 시작했다. 다크 엘프의 대장으로 보이는 적은 확실히 실력에 어울리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호위병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아르벤이 먼저 기습을 걸어 싸움을 시작하자 그럭저럭 비등비등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아르벤이 강해도 보스급인 크림슨을 혼자서 상대할수 있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루시아의 백업으로 인해서 어느정도 그 차이를 좁히는데 성공했고 무엇보다도 아르벤이 들고 있는 검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할수 있었다.

서걱!

품에서 꺼낸 단검이 순식간에 두동강 나는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크림슨은 이를 갈면서 이어지는 아르벤의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인간과 엘프가 침입한것인지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그래서 일단 목숨은 붙여두기 위해서 지금까지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네 놈을 죽이고 내가 직접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구나."

"그럴만한 실력이 있는것 같지는 않은데?"

"크흐흐흐흐, 내가 지금까지 너를 진심으로 상대한것같으냐?"

크림슨은 실소를 터트리며 부러진 단검을 아르벤에게 던지고 뒤로 물러났다. 팔을 옆으로 뻗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검은색 기운이 감돌고 있는 장궁이 생겨났다. 그 이상현상에 놀랄법도 했지만 아르벤은 냉정하게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장기전으로 끌고가면 안된다.'

예외는 없다.

종족을 가리지 않고, 보스나 잡졸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유저들이나 아르벤 자신마저도 적과 상대할때는 상대방의 실력을 미리 알고 있는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다. 딱히 방심하기 때문인게 아니라 처음부터 강하게 나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단 적당히 싸워보면서 상대방의 실력에 대해 어느정도 감을 잡고 적당히 대응할 방법을 결정하지 미리내라고 적들을 한명한명을 죽일때마다 온 정신을 쏟은 필살의 검으로 처리하는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 당연한 행동에 빈틈이 있다.

'모든 종류의 보스 몬스터는 전투가 일정이상 경과하거나 체력이 일정수준 이상 깎이면 훨씬 더 강해진다.'

그래서 보스몬스터를 잡는것은 그만큼 힘들고 위험하다. 미리 충분한 사전조사가 필요하고 여러명의 완벽한 합격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말을 잘 분석하면 바로 적을 끝내기위한 최적의 타이밍을 알아낼수 있다.

바로 적이 본심을 내기 바로전, 그때 가지고 있는 힘을 모두 쏟아넣어서 최대한 데미지를 넣거나 일격필살을 성공시키는게 좋다. 적이 오우거나 리치같은 괴물들이라면 그 타이밍을 가늠하는것이 어려울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간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쉽게 감을 잡을수 있다. 자기 스스로 친히 말해주지 않고 있는가?

"과연 몇발까지 견딜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시위를 당기자 활에 검은색의 화살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익숙해보이는 화살. 만약 이 자리에 성훈이 있었더라면 당장 크림슨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훈은 지금 이곳과는 동떨어진 장소에 있었고 크림슨을 상대하는건 다른 사람이었다.

'간다.'

"소울 번(soul burn)!"

근력이 1000을 돌파합니다.

합력(合力) 스킬이 생성됩니다.

민첩이 1000을 돌파합니다.

사고가속 스킬이 생성됩니다.

체력이 1000을 돌파합니다.

강체(强體) 스킬이 생성됩니다.

화르르륵!

순간 주변에 있던 모든 자들은 아르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푸른빛의 불길을 확인할수 있었다. 루시아의 버프를 받고 한차례 빨라졌던 움직임이 한층 더 가속했다.

"이이이 노오오오오옴."

티잉!

세상이 느려졌다.

느려진 세상속에서 정상적인 속도로, 아니 그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는건 크림슨과 아르벤밖에 없었다. 시위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자유로워지는순간 화살이 쏘아졌다. 이 느려진 세상속에서 빛살처럼 날아오는 화살은 정확하게 아르벤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맞아도 죽지는 않는다.'

방어구가 있고 보호 마법과 방어 스킬이 있다. 그리고 공격도 급소를 노리는게 아니니 충분히 버틸수 있다. 하지만 저 공격을 막아내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벌려질수밖에 없을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크림슨은 화살을 쏘아대는 보스몹이다. 그런 적에게 가까이 다가갈수 있는 기회는 지금처럼 방심했을때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검을 휘두를때 필요한것은….'

아르벤은 이 미션을 시작하기전까지만 하더라도 검이라는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큰 의미를 싣지 않고 검을 휘둘러도 그 누구도 그를 상대할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리내라는 생각지도 못한 명백한 강자를 만나면서 크게 바뀌게 되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재능과 열정, 집착, 그리고 자기보다 월등히 앞선 자와 겨루는 것으로 인해서 아르벤은 요 근래 몇개의 벽을 돌파하는 압도적인 성장을 할수 있었다. 아르벤은 화살을 피하지 않았다. 눈은 한치의 미동도 없이 크림슨을 응시하고 있었고 전신의 힘을 남김없이 쏟아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다.

'내가 휘두르는 검에 대한 믿음, 그리고 집념!'

그 집념이 기적을 이끌어낸다. 크림슨은 당연히 아르벤이 자신의 공격을 피하거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방어를 할거라고 생각했다. 그 틈을 노려서 뒤로 물러나면서 한 놈씩 차례차례 쏘아죽이면 이 곳에 있는 놈들을 전부 죽일수 있다. 그러나 아르벤은 물러나지 않았다.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 정확하기 말하자면 크림슨이 시위를 놓기 전부터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고 있었고 그대로 아르벤에게 명중할것만 같았던 화살은 프라가라흐의 궤적에 걸려 깔끔하게 반으로 쪼개져버렸다. 그리고 검은 그 너머에 있는 크림슨마저도 완벽하게 갈라버렸다.

툭.

시위가 끊어진 활을 멍하니 바라보던 크림슨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런 애송이에게…."

쩌억!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깔끔하게 절단되어 그대로 바닥으로 나뒹구는 크림슨은 아르벤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살수 없었다. 지금 아르벤의 정신은 온통 방금전 자신이 휘두른 검에 쏠려있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유령과 미리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방금 이 공격을 성공시킬수 있었을까?'

장담할수 있다.

어떠한 고난도 없이 여기까지 성장해온 자신이었다면 분명히 방금전 이 생명을 건 일격을 성공할수 없었을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검을 휘두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력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강해질수 있었던것이다.

소울 번 스킬이 해제됩니다.

"큭!"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아. 그냥 잠깐 긴장이 풀린것 뿐이니까. 후우우우우."

일정시간동안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주는 소울 번은 강력한 스킬이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서 문자 그대로 영혼이 불타는듯한 고통을 감내해야한다. 사실 얻은것은 한참전이었지만 그 끔찍한 고통 때문에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필요한 상황에서는 망설임없이 쓸 정도로 생각도 달라졌다.

"대단합니다!"

"아르벤님! 괜찮으십니까?!"

"다, 다크엘프들의 대전사장을 단신으로…."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던 엘프들이 호들갑을 떨며 다가와 아르벤을 부축하기 시작했다. 하긴 수십만 다크 엘프들중 최고위 전사라고 알려진 크림슨을 단신으로 처리했으니 놀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아르벤은 자만하지 않았다.

"이건 상대방이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얻어낼수 있었던 승리입니다. 만약 이 자가 조금만 더 진지하게 상대했거나 조심스러워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모든 사람들, 몬스터들이 가지고 있는 방심을 이용해 넣은 필살의 일격이 떄맞춰 들어간것뿐이다. 아르벤은 대단치 않다는듯이 넘겼지만 사실 그것만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은 도달할수 없는 굉장한 경지다. 루시아의 회복을 받아 완벽에 가깝게 몸을 회복한 아르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오빠, 아직 어디 회복되지 않은곳이라도 있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조금 불안해서."

"불안하다니요! 저희들의 완전한 승리입니다! 지금은 기뻐해야할때지요!"

"맞습니다, 물론 남은 적들이 조금 골칫거리기는 하지만 곧 있으면 합류할 루 교단의 지원병력까지 합하면 충분히…."

"이미 본거지를 잃은 이상…."

"시간만 끌고 있어도 어차피…."

엘프들은 웃는 얼굴로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아르벤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져갈뿐이었다. 그리고 루시아도 그제서야 아르벤이 걱정하고 있는게 무엇인지 깨달을수 있었다.

"유령!"

"맞아. 그 녀석이 보이지 않아."

적의 수장을 베었어도 유령이 없다는것만으로도 아르벤은 안심할수 없었다.

"분명히 그 녀석을 볼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걱정이 많으신것 아닙니까? 이 자리에 없다면 지금 방어진지를 부수기 위해서 전방에 나가있겠지요. 걱정할것 없습니다."

"아뇨. 그럴리가 없습니다. 유령이 이렇게 허망하게 당할리가 없습니다."

웃긴일이지만 아르벤은 유령을 완벽하게 이겼다고 확신했으면서도 마음속 한 구석에서는 어떤식으로든 유령이 반격을 가할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크 엘프들의 요충지, 식량 창고, 거점 마을, 그리고 본거지까지 전부 쓸어버리는동안 정말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너무나 수월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 점을 이해할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시간을 끌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르벤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부상자는 남아서 후방에서 천천히 따라오도록 합니다. 싸우는데 지장이 없는 자들을 주축으로 서서히 전진해나가면서 다크 엘프들의 거점지에 남겨두었던 동료들과 차례차례 합류하면서 다크 엘프들을 후방에서 기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숫자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후방을 기습한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숫자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 교단에서 보내온 지원군이 시간을 맞춰서 다크 엘프들의 옆을 칠겁니다. 그와 동시에 방어선에서도 역공을 가하겠죠."

전방, 후방, 측면에서 가하는 예상치 못한 합공!

게다가 어찌어찌 그 합공에서 빠져나온다하더라도 이미 다크 엘프들의 본거지는 전부 불타 사라져버린 이후다. 이것이 바로 아르벤이 생각한 계략의 마지막 단계. 설령 다크 엘프들이 상당수 빠져나가도 더 이상 엘프들에게 큰 위협은 될수 없으리라.

"중요한것은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최대한 천천히…."

마지막 주의를 주던 아르벤은 순간 말을 멈추고 어딘가로 시선을 집중할수밖에 없었다.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어둠에 휩싸였다고 한들 전쟁이 벌어지고 이 상황에서 불빛이야 흔하게 볼수 있는것이다. 당장 아르벤의 시력으로는 현재 저 먼곳에서 엘프와 다크 엘프들이 싸우고 있는 전장의 불빛마저도 희미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아르벤이 갑작스레 나타난 그 불길에 시선을 집중시킬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방어선보다 뒤쪽, 훨씬 뒤쪽에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도 어슴푸레 보이는 불이 아니다.

크다. 아니, 크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압도적이다. 마치 갑자기 태양이 떠오른것만 이 숲 전체를 비추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언가의 발광 계열 마법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것은 곧 쉽게 알아차릴수 있었다.

"저, 저건…."

불길은 그저 허공에 떠있는게 아니었다. 점점 더 그 크기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한 엘프가 저 불길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했는지 입을 가리면서 눈을 부릅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자들이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낼수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절대로 일어날수 없는 일이다. 마치 태양이 사라지거나 중력이 사라진다는것과 하등 다를바 없는 일이다.

"꺗?!"

루시아는 갑자기 자신의 허리를 잡아채는 아르벤의 행동에 주위가 떠내려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르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루시아를 품에 안더니 전력으로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무섭도록 굳어진 아르벤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유령이다!'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저 불길을 보는순간 직감적으로 그가 한 일이라는것을 깨달았다. 설령 유령이 직접 한 일은 아니더라도 어떤식으로든 그가 관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망설여서는 안됐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한다. 그 곳에 있는것은 전투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력한 자들이 전부, 설마 아무리 유령이 악당이라 하더라도 그런 자들을 향해 칼을 겨눌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나….

'최대한 빨리!'

세계수에 불을 질러버린다는 믿을수 없는 발상 앞에서 아르벤뿐만 아니라 이 숲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경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