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the Enemy Prince

< Chapter 27. If it were now (2) >

칼리안을 습격한 놈들은 대사막의 전사였다.

지금 에우리아를 찾아온 놈들은 그냥 사람이다.

카이리스인지 세크리티아인지, 혹은 텐실이나 리베른의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사막의 전사들이 아니라면 개개인의 무력은 엇비슷할 테니 그것이면 됐다.

"다섯 명만 잡아 꼬맹이."

"알겠습니다."

"붙어서 싸우지 말고. 너도 죽어."

"······ 네."

그렇게 덧붙인 에우리아의 로브 끝자락이 펄럭였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었건만 어느새 집중된 마력에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르센이 에우리아로부터 조금 떨어져 섰다.

곧 아르센의 손 끝이 살짝 움직였고 그와 거의 동시에 아르센에게 접근하던 기사 한 명의 머리 위로 얼음창이 떨어져 내렸다. 공격이라 하기보다는 놈들이 두르고 있는 실드가 어느 정도의 방어력을 지녔는지를 가늠해보기 위함이었다.

- 카가각!

단단한 무언가에 쇠가 긁히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며 얼음창의 끝이 갈려나갔다. 놈의 실드가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금세 회복되는 것도 보였다.

- 쌔애액!

적당히 놈들이 지닌 힘의 범위를 가늠하고 있던 아르센을 향해 거대한 바람의 창이 날아왔다. 앞에 선 기사가 아니라 멀찍이 숨은 마법사 나부랭이가 쏘아보낸 것이다.

하필이면 바람이라니.

바람 마법에 어울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딱 한 명 밖에 없는데.

문득 든 생각에 피식 웃은 아르센이 손을 휘두르자, 족히 두 뼘 너비는 될 얼음의 장벽이 순식간에 생성되어 아르센의 앞을 막았다.

- 콰강!

이 두께의 얼음 벽을 뚫고 들어 올 바람의 창은 아마 앨런이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르센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람의 창은 얼음 벽을 반 쯤 파고든 뒤 멈췄다. 얼음과 바람의 힘이 맞부딪히는 굉음 때문인지, 혹은 생각 외로 강한 공격력 때문인지 아르센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얼음 방벽을 해제한 아르센이 바람의 창을 보낸 마법사를 향해 마력을 운용했다. 다가오던 기사는 일단 무시한 채였다.

- 쌔애액! 쌔액!

날카롭게 벼려진 두 개의 얼음창이 모두 마법사 쪽으로 날아갔다. 딱 막기 좋을 속도로 다가오는 얼음창을 본 마법사의 실드 앞면이 진하게 빛났다. 실드의 힘을 한 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동시에 아르센의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 쌔액!

마법사의 뒤에서 나타난 얼음창이 내리꽂혔다. 당연하겠지만 이번에는 한낱 마법사가 몸을 움직여 피할 수 있을 속도의 것이 아니었다.

- 콰직!

마법사의 심장이 그대로 꿰뚫렸다.

쿵 하고 시신 한 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잠시 적막을 깼다.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얼음창이 생성되어 조금 전까지 아르센에게 달려들던 기사의 발을 멈추게 했다.

- 카각!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창이 실드에 막혔다. 그것을 본 기사가 비죽이 웃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기사가 코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피하지 않는 마법사라니. 아무리 발칸의 부군단장이라지만 너무 오만한 것이······.

- 우지직!

기사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 바스라지는 소리와 함께 실드에 박힌 얼음창이 순식간에 형태를 바꾼 까닭이다.

화로 위에 놓인 얼음이 녹듯 형태를 바꾼 아르센의 얼음이 마치 거미줄이 뻗어나가는 모양새를 그리며 붉은 실드 위를 빼곡히 둘러쌌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실드 겉면이 이미 푸른 얼음에 뒤덮인 뒤였다.

"반갑다."

기사의 검을 앞에 두고도 덤덤한 마법사의 목소리에 한껏 올라갔던 기사의 입꼬리가 천천히 돌아왔다. 자신의 시야를 방해하는 희뿌연 서리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파악을 하지 못한 채였다.

"나는 카이리스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다."

스승님 가라사대, 사람을 만났으면 일단 인사부터 하라 하셨으니.

특별한 매개체도 없이 만들어진 실드를 얼려낸 얼음 마법사가 자기 소개를 마쳤다. 다만 놈을 기억해 둘 생각은 없었으므로 놈이 화답할 시간을 굳이 내어주지는 않았다.

아르센의 손 끝에 다시 한 번 차디찬 마력이 모여들었다.

- 쌔액!

- 콰지직!

얼어버린 실드는 한낱 석영 조각보다도 약하다.

보호 받지 못한 기사의 맨 몸은 그보다도 더 약하다.

- 쿠웅!

내리쳐진 얼음의 날에 실드와 함께 목의 절반을 잃은 기사의 시신이 잠시 기우뚱했다. 그리고 곧 바닥으로 추락했다.

쓰러진 기사의 시신 뒤로 푸른 물줄기가 대지를 가르며 쇄도해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르센이 싸우는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던 에우리아의 것이었다.

어느새 에우리아는 기사들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 쉬이이익!

에우리아의 발 밑에서 일렁이던 푸른 기운이 빛의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것이 마치 땅을 가르며 뻗어나가는 날개 없는 용의 모습처럼 빠르고 날카롭다.

한 줄기에서 시작한 물은 마치 강이 갈라지듯 여섯 개의 줄기로 갈래갈래 나뉘었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향해 달려들던 여섯 명의 기사를 향해 제각각 뻗어져 나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한참 앞에 서 있던 여섯 놈의 발 아래까지 물이 당도했다.

- 쿠콰앙!

목적지에 다다른 물줄기는 일순간도 지체하지 않은 채 회오리치며 용솟음하는 여섯 개의 물기둥이 되었다. 그것이 그대로 놈들을 덮쳤다.

바람이 아닌 물로 만들어진 토네이도와 같이 거꾸로 회전하며 솟구치는 물의 힘은 실로 강력했다. 단지 물이었으나 그 안에 칼날을 담은 듯 물기둥의 한가운데 갇힌 채 간신히 서 있는 이들의 붉고 단단한 실드를 갈가리 찢어냈다.

- 파지직! 파직!

거의 동시에 놈들이 이고 선 하늘에서 보라색 빛의 번개가 떨어졌다. 대지에 도달하기 전 정확히 여섯 개로 나뉜 번개가 물기둥 속에 갇힌 기사들의 위로 내리꽂혔다.

말 그대로 멀쩡한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 콰아아앙!

숲을 쩌렁쩌렁 울려대는 굉음과 함께 놈들을 감싸고 휘몰아치는 물기둥이 번개의 힘을 고스란히 머금었다.

실드를 없애고도 사라지지 않은 물의 힘이 놈들의 온 몸에 상처를 냈다. 깊이 벌어진 상처 사이사이로 번개의 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치유력이 채 발동하기도 전에 피부를 태우고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 파지직!

에우리아의 힘은 아르센의 얼음과 달랐다. 오히려 앨런의 불과 비슷했다.

아르센의 얼음창은 순식간에 상대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러나 앨런의 불은 달랐다. 끊임없이 뇌를 깨워내어 심장이 멎을 때까지 고통을 느낀다.

에우리아가 다루는 전기의 힘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정신을 잃게 하질 않는 것이다.

온 몸의 감각 세포를 일깨우는 지독한 느낌에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났던 놈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물에 젖은 몸에 스민 번개의 기운은 절대로 흩어지지 않았다.

- 콰아앙! 콰앙! 콰앙!

한 번 두 번 세 번.

지치지 않고 떨어져내리는 번개의 공격이 놈들의 몸에 모조리 적중했다. 그 심장이 모두 타버리도록 그 어떤 치유력으로도 재생되지 않도록.

순식간에 여섯 명의 기사가 여섯 구의 시신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열 둘."

놈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계속하여 공격을 해왔다.

그러니 에우리아와 아르센 역시 멈추지 않았다.

에우리아의 앞으로 달려드는 기사의 발목을 아르센이 얼리고 에우리아가 내리쳤다. 아르센에게 휘둘려지는 기사의 검붉은 검이 오러를 머금은 그대로 산산히 조각나 부서졌다. 그 위로 여지 없이 얼음창이 내리떨어진다.

"열."

아르센의 말과 동시에 에우리아의 손이 하늘을 향해 치켜올라갔다.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 쩌저저적!

이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청보랏빛의 하늘이 불안한 비명소리를 낸다. 말 그대로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새하얀 스파크가 하늘을 뒤덮었다.

천둥을, 그리고 번개를 모아갔다.

고양이의 그르렁거림이 하늘에 메아리친다. 그것은 어느새 냉혹한 범의 으르렁거림과 같은 소리로 바뀌었다.

- 쩌저적, 쩌적!

하늘이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는 듯. 거대한 손아귀로 하늘 조각을 찢어내는 듯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하늘의 울음은, 천둥은, 모든 생명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대상이다. 그런 하늘을 올려다 본 놈들의 발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움직였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놈들의 발을 묶었다.

- 우르릉······!

번쩍이는 빛이 하늘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찾아 온 폭풍전야.

조용하기 짝이 없는 제 숨결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대지 위를 장악했다. 사위가 적막함에 잠겨들었다.

"모두······."

그 침묵을 이기지 못한 기사 한 명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호가 되었다.

- 콰앙! 쾅! 콰아앙!

- 쿠콰과광! 콰앙!

모두 공격하라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모두 도망치라는 말이었을까.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소리가 터져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짙은 보랏빛의 번개가 줄기줄기 내리꽂힌다.

끊임 없이, 끊임 없이.

에우리아의 양 팔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였다. 계속하여 그렇게 하늘의 분노를 갈구했다.

그와 동시에 대지에서는 사방을 파헤치고 뿜어져 올라오는 푸른 물이 놈들의 온 몸을 적시고 시야를 방해했다.

- 파지지직!

에우리아의 말이 맞았다.

실드 따위 기사와 마법사의 구분 따위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입을 열었던 기사에게 내리꽂힌 번개는 바닥을 타고 물을 타고 그 옆에 서 있던 마법사에게로, 그 뒤의 기사에게로 계속하여 옮겨갔다. 마치 보라색의 스파크로 만들어진 감옥에 갇힌 듯 놈들은 제자리에 발이 묶인 채 고스란히 그 공격을 모두 맞았다.

- 콰과광! 쿠궁!

한 번 불러낸 번개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놈들의 재생력이 이미 다했음에도, 생명이 모두 꺼졌음에도 끊임없이 바닥을 내리치고 짓이겼다.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에우리아의 팔이 비로소 아래로 내려왔다. 손에 머금던 스파크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바닥에서 솟아오르던 물도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여기 저기 패이고 짓뭉개진 대지와 그 위에 놓인 마흔 개의 시신. 새카맣게 타버려 형체조차 찾기 힘든 그 시신들만이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듯 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아르센이 고개를 돌려 에우리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칼 잡는 폼은 엉성하기 그지 없는데 오러를 쓰고, 눈 앞의 것만 좇는 멍청한 마법사가 제 얼음을 뚫어낼 힘을 쓰고. 심지어 마법사와 기사가 치유력을 지녔습니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

"왕자님을 공격한 것, 저놈들입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소비한 탓에 아주 조금 창백해진 에우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맞아."

그래서.

그래서 발칸의 인원을 늘리라 하셨던 것일까.

아르센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직접적인 이유는 달랐지만 칼리안이 준비를 요청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맞았다. 정확히 알지 못할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고자 함이었으니까.

"꼬맹이. 잡 생각 그만하고 이리 와. 닭 먹자."

어느새 태평해진 목소리에 아르센이 질렸다는 듯 말했다.

"바로 옆에 시체가 마흔 구 있습니다, 협회장님."

"그래서, 뭐. 나눠먹어?"

소싯적 투입되었던 야만족과의 전투에 꽤나 이골이 났다던 마법사협회 협회장이 그렇게 대꾸했다. 스승님과 함께 대사막을 누비고 다녔던 발칸의 부군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그 옆에 앉았다.

어쨌거나 둘 모두 친숙한 것이다. 적의 죽음이라는 것에.

"아, 너무 익었다."

다섯 놈 잡으랬더니 세 놈 잡았지.

퍽퍽살 너 먹어. 힘들어서 못 씹겠다.

* * *

살려달라는 말.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르메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말이었다.

'칼리안이 살기 위해 찾은 것이 일면식도 없는 마법사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마땅하다'고 앨런이 그리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 지금 내밀어진 저 손을 르메인이 대체 무슨 말로 거절하겠으며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결국 르메인은 고개를 끄덕여 줄 수 밖에 없었다. 칼리안이 바라는대로 다가오는 생일에 맞추어 특별한 선물을 해주겠노라고.

'부디 조심하거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심은 할 테니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방문 잠금장치 두 명을 좀 거둬가 주실 수는 없을지 물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도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르메인과의 만남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미 저무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야 저무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네."

그것을 알 수 없어서 칼리안이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참 짧고도 길었던 탓이다.

멀리 보이는 빌헬름 관의 불이 꺼져 있었다.

헤이시아 궁을 지키기로 한 몇몇의 발칸 대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돌아갔을 터였다. 물론 아무도 다가가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시간의 축의 존재를 감추기는 해야 했으니까.

히나와 얀은 이미 체르밀에 돌아갔을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빌헬름을 향해 발을 옮겼다.

체르밀의 수련장에는 키리에가 있을테니 키리에를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조금쯤 혼자 있고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랬는데.

- 타앗!

불도 켜지지 않은 빌헬름 관의 실내 훈련장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 부우웅!

무거운 쇳덩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대충 짐작한 칼리안이 피식 웃는 얼굴로 훈련장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다.

창문 틀에 조각난 달빛이 비추는 훈련장 안에 어둠을 품은 검이 저 혼자 춤을 춘다. 검은 밝게 비춰지는 달빛을 하나도 반사하지 않았으나 칼리안이 그 움직임을 좇는 것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검을 든 손의 주인은 어둠 속에 잠겨든 칼리안을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조용히 선 채로 놈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보고 있는 것을 알 때의 검과 그렇지 않을 때의 검은 또 다르므로.

- 부웅!

둥글게 가로새겨지는 검의 끝을 따라 예리한 기운이 물씬 흘러나온다. 쏘아내듯 찌르는 첨예한 날붙이에는 어느새 흔들림이 사라져 있었다. 휘둘러지고 내리치는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많이 늘었다.

잠시 제 자리에 멈춰 서 있던 놈이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조금 다른 자세를 취하며 검을 움직였다. 확연히 다른 속도와 확연히 다른 가벼움이 검 끝에 매달린다.

- 쉬익!

브리센의 검은, 좋게 말하면 적당하고 나쁘게 말하면 애매하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겁지만 그렇기에 속공을 하기도 어렵고 타격에 따른 피해도 덜 입힌다.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검을 모두 받아낼 수는 있지만 치명타를 주는 것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저 검으로 칼리안의 것을 만들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조금 더 빠른 공격을 하고자 하여. 아마 드미레아로부터도 분명 무언가를 배워냈을 터였다.

플란츠니까.

끝이 나뉘어지듯 뻗어나오는 플란츠의 검을 보며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깨 망가집니다."

플란츠의 검은 모두 확인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을 모두 펼쳐낸 뒤 칼리안의 가벼운 검술을 시도하려는 것을 막았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플란츠의 움직임이 조용히 멈췄다.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훈련장의 입구를 쳐다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 뭐야."

칼리안의 것을 시도하려다 들켰음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었다. 애초에 그것이 부끄러울 놈이었으면 칼리안의 앞에서 태연히 고양이를 쓰다듬지도 못했을 것이다.

숨어서 쳐다보고 있던 것에 대한 불쾌감이겠지.

"지금 시도하실 수 있을 속도 아닙니다. 몇 번은 괜찮아도 오래 쓰실 수는 없습니다."

불쾌하건 말건 상관 없다는 듯 이어진 말.

잠시 가만히 서 있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쓸 데 없는 부끄러움도 없지만 쓸데없는 고집도 없는 성격이니까.

곧 플란츠가 검을 집어넣고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그대로 체르밀에 돌아가려는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이 됐다. 쓰지 못할 기술을 버렸으니 쓸 만한 기술을 배우려 들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였다.

때문에 칼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련 한 번 하시겠습니까."

"됐어."

단박에 거절이 돌아온다.

"당장 주무셔야 할 상태같은데."

전날 앨런과 대련을 마치고 들어왔던 칼리안의 상태를 아직 신경쓰는 말.

베른으로, 그리고 옛 칼리안으로.

많은 과거의 모습으로 하루를 보낸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그럼 식사나 하시죠. 형님."

"귀찮아."

저래놓고 또 풀이나 뜯겠지. 삶은 완두콩.

"그러다 키 안 큽니다."

"짖지 좀 말라고."

칼리안이 씩 웃었다.

오늘도 하루 한 번 짖기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