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004 I am a citizen of heaven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유지웅은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다. 특별한 사회적 특기가 없는 자신으로서는 딜러 일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먹고 살아야 하고 농사짓는 부모님도 부양해야 한다. 딜러가 아무리 사냥 가기가 힘들어도 한 번 사냥을 가면 최하 몇 천은 번다.

그런데 딜러 일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넋이 나간 채로 유지웅은 며칠을 보냈다. 매일 같이 정효주가 찾아와서 그를 간호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도 걱정이 떠날 줄을 몰랐다.

“아파! 좀 제대로 치료해달라고!”

“보조 힐러의 힐은 한계가 있어요.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좀 더 치료해 줘!”

“그러려면 비용을 더 지불하셔야 해요.”

“으이구, 그 놈의 돈!”

의료센터는 레이드 중에 입은 부상으로 온 이들이 가득했다. 이들은 대부분 힐러 없이 레이드에 참가한 자들이었다.

통상 약한 괴수는 10인, 강한 괴수는 25인으로 레이드 공격대가 구성된다. 이것이 보편화된 공식이었다. 구성 인원이 많을수록 전투가 편하기는 하지만 두 당 돌아가는 몫이 줄어든다.

반대로 구성 인원이 너무 적으면 두 당 돌아가는 몫은 많아도, 사망자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최적화된 수치가 약한 괴수는 10인, 강한 괴수는 25인이었다.

그러나 딜러는 많고 힐러는 너무 적다. 탱커 수도 힐러와 비슷하긴 하지만, 하나의 공격대에는 탱커보다 힐러가 더 많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힐러의 희소성이 두드러진다.

그렇다 보니 힐러를 구하지 못해 레이드를 못 가는 탱커들도 적지 않게 있다. (딜러가 레이드를 못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새삼 언급할 가치도 없다.) 아무튼 그런 탱커들은 힐러 없이 레이드를 가기 위해서 공격대를 꾸린다.

힐러 없이 가면 사망자가 나오지 않느냐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엄청나게 많은 딜러를 데려가면 된다. 말 그대로 탱커가 죽기 전에 딜로 녹여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 보통 딜러를 몇 백명 이상씩 데려간다. 그럼 힐러가 없어도 레이드가 가능하긴 하다. 물론 사망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기에 어지간히 자신 있는 능력자들이 아니고서는 힐러 없이 가는 일은 많지 않다.

아무튼 그렇게 힐러 없이 레이드를 마친 탱커는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의료 센터에 온다. 의료 센터에는 보조 힐러라 불리는 자들이 있다.

보조 힐러.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들은 귀족(힐러)의 사생아라고 할 수 있다. 귀족은 아니지만 평민보다는 좀 높은, 어중간한 위치다. 이들은 힐량이 적기에 실제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보조 힐러 셋이 모여야 보통 힐러 한 명 몫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조 힐러는 치유 효과가 발동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급박한 전투 중에 힐을 하기에는 알맞지 않다.

그래서 보조 힐러들은 의료 센터에서 돈을 받으며 치유하는 일을 한다. 당연히 수입은 적다. 하지만 일거리가 많기에 벌어들이는 수입은 웬만한 딜러만큼은 된다. 워낙 힐러 수가 워낙 적다 보니 힐러 없이 무더기로 레이드를 가는 공격대도 심심치 않게 있고, 전투 후 그들을 치유하면서 받는 돈이 쏠쏠하다.

“지웅아. 몸은 좀 어때?”

“많이 나아졌어.”

오늘도 정효주가 문병을 왔다. 그런데 그녀의 몸이 어딘가 안 좋아 보였다.

“효주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치유 좀 받으려고 왔어.”

“치유? 왜?”

정효주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센터 직원(보조 힐러)이 들어와서 정효주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상의를 위로 걷어 올렸다. 유지웅은 그제야 정효주의 배에 길게 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하얗고 매끈한 복부에 보기 흉한 상처가 나 있었다.

유지웅은 놀라서 물었다.

“이거 왜 이래?”

“응……. 힐러들이 안 와서.”

힐러 없이 대규모 레이드를 갔다는 소리다. 그러니 치유를 받으려면 의료 센터를 와야 했겠지.

“아니, 왜?”

“있어. 좀 바쁜가 봐.”

정효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유지웅은 바로 눈치를 챘다. 자신 때문이다. 자신이 그때 어그로가 튄 것 때문에 힐러들이 아마도 공격대에 참가하지 않은 거겠지. 단순한 시위일 수도 있고, 영구적인 이탈일 수도 있다. 아무튼 지금 정효주가 속한 막공이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 때문이지? 그 김혁수라는 공격대장은 뭐래?”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정효주는 애써 얼버무렸다.

센터 직원이 눈을 감고 힐을 시전했다. 그녀의 손에서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효주는 편안히 누워서 힐을 받았다. 유지웅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힐을 한다는 것은 뭔가 대단히 신비하고 성스러워 보인다. 전투 때에는 너무 긴장해서 잘 몰랐는데, 보조 힐러가 힐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근데 일반 힐러 앞에서는 보조 힐러도 발톱의 때 같은 존재라고 하던데.

“금방 회복되지는 않으니까 편안히 누워서 기다리세요.”

“네. 감사합니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뭘.”

센터 직원은 몸을 돌리려다 말고 유지웅을 살폈다. 그리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어머? 벌써 다 나으셨어요?”

“예?”

“이거 다 회복되려면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새 회복되셨네요? 신기하다.”

“저, 다 회복된 건가요?”

돈이 없는 관계로 유지웅은 가장 싸구려 힐을 받았다. 그마저도 정효주가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댔다. 그래서 더욱 면목이 없었다.

“네. 다 회복되셨어요. 퇴원하셔도 되겠네요.”

직원은 사뿐히 웃으며 나갔다. 유지웅은 자신의 몸을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욱신거리던 통증이 사라졌다. 정말로 다 나은 모양이었다.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직원의 모습을 유지웅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래 보여도 직원은 돈을 많이 벌 것이다. 웬만한 딜러들 버는 만큼은 벌 것이다.

“효주야.”

“응?”

“나 치료비 내는데 돈 많이 썼지?”

“얼마 안 썼어.”

“꼭 갚을게. 내가 꼭 갚을게.”

“괜찮아. 빌린 것도 아니고 친구 살리는데 쓴 돈인데 뭐 어때?”

정효주가 하얗게 웃었다. 그녀의 배에 난 상처에서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다.

보조 힐러는 특성상 치유가 늦게 된다.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 걸린다. 치유 기간은 당연히 비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돈을 많이 내면 빨리 치유되고, 적게 내면 늦게 치유된다.

능력자들의 능력은 일종의 체력과 같다. 사람이 일정 이상 운동을 하면 지쳐서 움직일 수 없듯이, 능력자들도 일정 이상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어느 정도 쉬어줘야 능력이 다시 회복된다. 안 그래도 힐러 수도 적은데 회복 기간까지 가져야 하니, 더더욱 딜러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유지웅은 정효주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그녀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진짜 죽을 뻔했다. 공격대가 전멸하는 줄 알았다. 아오, 내가 살다 살다 눈깔 공격하는 딜러는 처음 봤다. 기본 주의 사항도 숙지 안 하고 레이드 오는 초보도 있나?」

「와, 그거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요. 어그로가 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부탱이 그나마 잡아줘서 살았지, 다른 탱커였으면 그거 어그로 못 잡았어요. 눈깔 맞아서 꼭지 돈 몹 어그로를 3분 만에 돌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에요?」

「그 부탱이 정말 쩔어주나 보네요. 근데 왜 부탱 따위를 하고 있어요? 그 정도면 자기 막공 만들어도 될 텐데. 아니면 정규 공격대에서 스카우트 제의 엄청 올 텐데.」

보통 탱커는 딜러가 받는 것의 1.2배를 받는다. 하지만 공격대장은 거기에 추가로 더 분배받는다. 그래서 메인 탱커와 부탱은 수입이 다르다. 당연히 모든 부탱은 경험과 인맥을 쌓아 자기만의 공격대를 창설하는 게 꿈이다. 그게 정규 공격대든 막 모은 공격대든.

「반쪽짜리 탱커에요. 사실 탱커라고도 할 수 없어요. 이건 뭐 탱커인지 딜러인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탱커보다는 딜 좋은데 대신 맷집이 약해요. 그래서 탱킹을 오래 못해요. 대신에 딜이 좋아서 어글은 잘 먹어요. 물론 딜러보다는 딜 낮아요.」

「완전히 딜러와 탱커를 반반 섞어놓은 변종이네요. 그런 사람을 어디다가 쓴데요?」

「어글 잘 먹으니까 부탱으로는 좋더라고요. 어글 튈 때 대비해서 보험 들어둔 거죠. 이번에 보험이 제대로 먹혔죠.」

「나쁘진 않네요. 하지만 실력자들 모인 공격대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겠네요.」

「글쵸. 평생 막공만 돌 팔자죠. 그것도 부탱만 하면서.」

레이드 사이트의 어느 게시판을 보면서 유지웅은 눈물이 날 뻔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 때문에 공격대가 전멸할 뻔 했으니까. 사람이 죽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친구인 정효주가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혁수 공격대장이라면 꽤 유명하지 않아요? 그 사람 정규 공격대 창설해도 될 만한 실력자라던데. 그럼 굳이 부탱 보험을 들어둘 필요도 없지 않아요? 차라리 다른 실력 있는 탱커를 부탱으로 쓰는 게 낫지 않아요?」

「모르죠. 다리라도 벌려주는지. 얼굴은 꽤 반반하더라고요.」

「아주 없는 경우는 아니죠.」

유지웅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확실하지도 않은 일 가지고 그렇게 사람 매도해도 돼요?」

「뭐야? 너 누구야?」

「어? 너 그때 그 초보 딜러지?」

유지웅은 순간 뜨끔했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무슨 소리야? 난 그냥 니들이 말하는 게 너무 심해서 나선 건데?」

「웃기지 마. 너 그때 초보 딜러지? 부탱이랑 친한 사이였어. 그러니까 지금 부탱 이야기 나오니까 화난 거 아니야?」

「아오, 씨발. 너 때문에 사람 여럿 죽을 뻔했어. 근데 왜 찾아와서 사과 한 마디 안 해? 응? 이 허접 새끼야.」

「이게 게임인 줄 알아? 이건 실전이야, 실전!」

「내가 너 평생 레이드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딜러 연합에도 니 이름 쫙 올려놨어. 너 이제 어디 가서 레이드 끼워 달라 소리도 못할 거다.」

초반에 정효주를 은근히 까던 힐러들은 뒤로 쏙 빠지고, 딜러로 추정되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물어뜯기 시작했다. 유지웅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자신이 욕을 먹는 건 상관없었다. 잘못을 했으니까. 하지만 정효주가 창녀 취급을 받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수가 너무 딸렸다. 결국 유지웅은 도망치듯이 사이트에서 빠져 나왔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들이 깔깔대고 웃으면서 씹어댈 것을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정효주를 싸잡아내릴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지웅아.”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정효주가 조용히 불렀다. 유지웅은 흠칫 놀라서 바라보았다. 정효주가 가만히 미소 짓고 있었다.

“괜찮아. 너무 상심하지 마.”

“효주야…….”

“차라리 잘 된 거야. 딜러로 산다는 건 너무 힘들거든.”

유지웅은 정효주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작고 보드라운 손은 무척 따뜻했다.

“돈이 없으면 내가 돌봐줄게. 나 이래뵈도 벌이 꽤 좋다?”

“장비 사느라 다 깨져나가잖아. 별로 여유도 없으면서 이번에 나 치료비 내고 다른 사람들 보상금도 해주고 출혈 컸잖아.”

“괜찮아. 그만큼 네가 책임지면 되지.”

“응?”

분위기가 묘해졌다. 정효주는 실수했다고 느꼈는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유지웅도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인지 그녀가 여자로 보였다. 아니, 그녀는 물론 아주 예쁜 여자이기는 하지만, 여자이기 이전에 친구란 말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유지웅이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근데 힐러들은 보통 어때?”

“……다 그렇지, 뭐.”

“많이 거만하다며?”

“그렇진 않아.”

“사이트 말로는 그렇다던데? 저번에 걔들도 그랬구.”

“사실 힐러들은 얘기 잘 안 해. 딜러들하고 그다지 어울리는 편도 아니고.”

“와, 진짜 그들만의 세상이 있나 보다.”

“그렇다고 하더라. 우리들이랑은 사는 세상이 달라. 돈도 잘 버니까 레이드도 그렇게 많이 안 해. 한 달에 서너 번 하고 마는 게 보통이래.”

“안 그래도 힐러가 적은데 레이드 참가도 안 하면 탱딜들은 정말 죽을 맛이겠네.”

“그렇지 뭐.”

“이번에 나 때문에 공격대 와해돼서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