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013 You are a nobleman

참 잘난 남자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귀티가 흘렀다. 뼛속부터 좋은 혈통을 타고 난 것 같다. 비단 힐러라서 그렇게 보이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원래 좋은 집안에서 좋게 태어난 사람이 힐러가 된다면 딱 저런 느낌일까?

키도 크고 잘생겼다. 우아하다. 기품도 있다. 언뜻 건방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게 오히려 잘 어울린다. 그냥 걸어 다니는 장식품이다.

“저 녀석이 오늘 사냥감인가요?”

“네. 그래요.”

“감정가가 제법 되겠군요. 그런데 10명이서 잡을 수 있을까요? 딜이 조금 모자라지 않을까 싶네요.”

“괜찮아요. 딜은 걱정하지 마세요!”

최현주가 화사하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화기애애한 모습에 유지웅은 왠지 배알이 뒤틀렸다. 생각 같아서는 최현주한테 김서웅과 너무 다정하게 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건 너무 옹졸해 보이잖아.’

그런 마음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자, 다들 준비 되셨나요? 장비 확인 다 하셨고요?”

“준비 완료입니다!”

“좋아요. 그럼 시작하죠.”

최현주 10인 공격대의 메인 탱커이자 유일한 탱커인 박현수가 끄덕이고는 돌격 자세를 취했다. 덩달아 딜러들의 긴장감도 올라갔다. 모두의 눈이 날카로워진 채 전방을 향했다.

오늘의 사냥감은 하얀 매의 형태를 한 괴수. 정식 이름은 화이트 윙. 매처럼 생겼다지만 몸집은 코뿔소 세 놈을 합친 것 이상으로 거대하다. 날개를 펴면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닌 녀석이다. 적어도 15명 이상은 동원되어야 잡을 수 있는 녀석이기에, 막공에서는 좀처럼 잡을 일이 없는 녀석이다.

지금까지 사냥했던 괴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녀석이기에 공격대원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몇 몇은 식은땀이 흐르는 손을 닦기도 했다.

“…….”

그 와중에도 유지웅의 정신은 김서웅에게 팔려 있었다. 정확히는 김서웅과 이야기하는데 한창 열을 올리는 최현주한테 신경이 쏠려 있었다.

공격대장이 임시로 참가한 힐러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임시가 고정이 되고, 고정이 정규가 되는 법이니. 하나라도 많은 힐러를 확보하는 게 좋지 않은가?

애써 그렇게 좋게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지웅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처음 자신이 이 정공에 참가했을 때 내민 조건이 마음이 걸렸다. 자신은 섹스를 원했고, 최현주는 처녀이면서 기꺼이 응했다. 둘은 그렇게 사귀게 되었다. 그렇게 사귀게 된 연애배경이 그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메인 탱커 박현수가 포효를 내지르며 돌격했다. 비로소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화이트 윙이 거대한 고개를 들었다.

번쩍!

하얀 빛이 터졌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그때 김서웅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공격대원들을 일깨웠다.

“레이드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그가 검지손가락 하나를 허공에 세우고 있었다. 그 모습마저도 우아해 보였다. 손가락이 웅웅거리며 하얀 빛을 뿜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박현수의 몸도 하얀 빛에 감겨 있었다. 힐이다.

“아, 죄송해요!”

최현주의 둘째 언니인 최성주가 급히 사과하고는 팔을 뻗었다. 그녀가 내뿜은 힐이 박현수에게 들어갔다.

콰앙! 쾅! 파직! 퍽!

쉴 새 없이 격투음이 울렸다. 딜러들이 쏟아 붓는 공격이 화이트 윙을 거듭해서 덮쳤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최현주였다. 그녀는 혼자서 2명 몫의 딜을 해내고 있었다. 그녀가 쏟아 붓는 화염 공격이 거칠고 강력하게 화이트 윙을 습격했다.

― 카오오오오!

화이트 윙이 날개를 퍼덕이며 크게 울부짖었다. 거대한 날개가 세차게 움직이자 강한 풍압이 일어났다. 수십 미터는 족히 떨어진 그들까지 휘청거렸다.

그때 김서웅이 급히 경고했다.

“공대장님. 딜 멈추세요.”

한창 신나서 딜을 하던 최현주가 의아해서 돌아봤다.

“예?”

“어서 멈추세요.”

“왜 그러시는지…….”

“이런!”

김서웅이 놀라서 자세를 낮췄다. 유지웅도 힐을 하다 말고 의아해서 돌아봤다.

“어그로가 돌아갔어요! 뛰어요!”

그 말에 순간 최현주가 경직되었다. 유지웅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지체했다.

―카오오오오!

화이트 윙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화이트 윙은 이미 박현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동자는 나머지 공격대원이 집결한 이곳을 노리고 있었다.

박현수가 당황해서 강하게 찔렀다. 어떻게든 어그로를 자신에게 돌릴 셈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화이트 윙은 공중에서 수십 미터 부유한 상태였고, 박현수의 공격은 더 이상 그것에게 닿지 않았다.

“안 돼!”

“뛰어요! 어서 뛰어요!”

김서웅이 날카롭게 지시했다. 잠시 질려 있던 최현주는 재빨리 집결지에서 이탈해서 내달렸다. 어그로가 돌아간 이상 최대한 나머지 대원들과 멀리 떨어져야 한다. 그리고 탱커와 합류해야 한다. 그것이 안정적인 진형 재배치를 위한 기본 공략이다.

“탱커한테 바로 뛰면 안 돼요! 최대한 원을 그리면서 달려요! 화이트 윙과 거리를 벌리면서, 동시에 탱커와 거리를 좁혀요!”

김서웅이 다시 지시했다. 정확하고 빠른 판단이었다. 그는 급히 최성주를 돌아봤다.

“힐 있는 대로 끌어 모아서 준비해요. 한 대라도 맞으면 즉시 쏟아 부어야 합니다!”

“하, 하지만 탱커도 아닌 딜러가 한 대 맞으면 즉사잖아요?”

“거의 동시에 넣으면 즉사 직전에 살릴 수도 있어요!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요!”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말이 즉사지, 공격을 받아 사망하기까지 아주 약간의 딜레이가 존재한다. 그 틈을 노려 힐을 쏟아 붓는다면 살릴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목숨을 건진 딜러나 힐러도 존재하고 있다. 당장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던 막공에서 살아난 금발의 힐러, 안혜진도 그런 케이스였다.

“어그로! 빨리 어그로 잡아요!”

최성주가 울듯이 외쳤다. 최현주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유지웅은 저도 모르게 뛰쳐나갈 뻔했다. 그런 그를 김서웅이 얼른 붙잡았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현주가! 현주가!”

“침착해요! 지금은 힐 퍼부을 생각만 해요!”

메인 탱커 박현수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질주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화이트 윙을 추격했다.

“우오오오!”

그러나 탱커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비행하는 괴수를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다. 마찬가지로 육체적 능력은 평범한 딜러가 비행하는 괴수로부터 거리를 벌리는 것도 무리였다.

순식간에 화이트 윙은 최현주를 따라 잡았다. 날개가 일으킨 풍압에 최현주는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거대한 부리가 날카롭게 최현주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안 돼!”

최성주가 비명을 지르며 힐을 시전했다. 김서웅이 가볍게 이를 갈았다.

“너무 빨랐어요!”

최성주의 힐은 화이트 윙의 공격이 맞기 전에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서 김서웅과 유지웅의 힐이 들어갔다. 화이트 윙의 부리가 최현주의 복부를 파고든 순간이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날 치란 말이야! 날 치라고!”

뒤늦게 도착한 박현수가 힘차게 뛰어올랐다. 단숨에 화이트 윙의 등에 뛰어오른 그는 머리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칼을 왼쪽 눈에 찔러 넣었다.

푸욱!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파란색 피보라가 튀었다. 괴수의 피에 흠뻑 젖은 채 최현주는 쓰러져 있었다. 가볍게 경련을 하고 있지만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크크크크.

눈을 공격당한 화이트 윙이 비로소 박현수를 돌아보았다. 딜을 중지하고 있던 딜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김서웅을 돌아봤다. 공격대장이 지휘 능력을 상실한 지금 그들에게는 누군가 대신 오더를 내려줄 사람이 필요 했다.

“메인 탱커 어그로 확보. 딜 재개하세요.”

딜러들이 일제히 장비를 들었다.

“현주야! 현주야! 으앙! 현주야!”

화이트 윙이 쓰러지자마자 최성주가 대성통곡을 하며 달려갔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어그로가 다시 메인 탱커에게 집중된 뒤부터는 힐을 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메인 탱커가 죽게 되니까.

공격대원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정통으로 공격을 받았다. 딜러나 힐러라면 당연히 즉사다.

이론상 공격을 받는 것과 동시에 힐을 넣으면 낮은 확률로 즉사를 방지할 수 있다지만, 그것은 복권 당첨 확률에 가깝다. 힐러의 정확한 판단능력과 힐 센스, 그리고 행운이 맞물려야 비로소 실현되는 기적인 것이다. 몇 백 명 중에 한 명 그런 행운아가 나올까 말까인 수준이다.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최현주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복잡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히 괴롭다. 그리고 최현주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기업으로 치면 회사의 전부나 다름없는 최고 경영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업은 사장이 죽으면 신임 사장이 등극하지만, 공격대는 공격대장이 죽으면 해체된다.

정규 공격대는 딜러에게는 굉장히 좋은 일자리다. 그런 일자리를 잃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도 존재하는 것이다.

“사, 살아 있어요!”

그 순간 최성주가 기쁨에 젖어 외쳤다. 김서웅이 급히 달려와서 힐을 시전했다. 최성주도 아차 하고는 얼른 힐을 퍼부었다. 유지웅도 가세했다.

셋이서 힐을 퍼붓자 최현주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상처가 회복되었을 뿐 기력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힘없이 눈을 깜박였다.

“레이드는요?”

“무사히 끝났어요. 사망자도 없고요.”

“다, 다행이에요.”

“공격대장 답지 않은 실수를 했네요. 어그로가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딜을 하시다니.”

“전혀 몰랐어요. 그런 조짐을 못 느꼈거든요.”

“화이트 윙은 어그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괴수예요. 공격대장님처럼 딜이 높은 분은 좀 더 유의하셔야 해요.”

“충고 고마워요.”

김서웅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힘없이 일어난 그녀와 유지웅의 눈이 마주쳤다. 유지웅은 내심 그녀가 부축을 뿌리치고 자신에게 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거부 없이 김서웅의 부축을 받았다. 그는 그게 크게 서운했고, 마음이 무거웠다.

“22억입니다.”

“우와!”

공격대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다. 22억이면 거의 25인 사냥물에 버금가는 감정가였다.

“결정도가 아주 좋네요. 이런 몹은 정말 드물죠.”

“22억이면 두 당 대체 얼마야? 우와아…….”

딜러들은 저마다 즐거워했다. 죽은 줄 알았던 공격대장도 살아있겠다, 감정가도 높겠다, 흥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김서웅 힐러님.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 표정이 좀 안 좋으신데.”

어느새 기력을 차린 최현주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김서웅 곁에 꼭 붙어 있었다. 유지웅은 쓰린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나서서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꼴이 우스워질까 봐 그럴 수가 없었다. 공격대장이 힐러와 친하게 지내려고 인맥 관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뭐라고 하면 자신만 속이 좁아 보일 것이다. 게다가 자칫 김서웅의 불쾌함을 살 수도 있고.

“현주가 좀 유난하죠?”

어느새 다가온 최성주가 그렇게 말을 걸었다.

“저 애, 힐러를 끌어 모으려고 백방으로 노력 중이거든요. 남자친구로서 기분 안 좋은 건 알지만 그래도 이해해줘요. 김서웅 저 분도 앞으로 계속 나올 거예요.”

“최진주 씨가 이제 더 이상 안 나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공격대 규모를 더 키우려고 그러는 거예요.”

“무슨 말이죠? 원래 10인 정규 공격대를 한다고 했잖아요?”

“사업이 잘 되면 회사 확장하는 건 당연한 거죠. 최현주 쟤가 보기엔 가냘파도 꿈이 야무지거든요. 야망도 있고.”

“…….”

김서웅이 계속 나온다고? 자신과는 한참이나 비교가 되는 저런 잘난 힐러가? 그럼 앞으로도 저 꼴을 계속 봐야 한다는 건가?

그때 김서웅이 다가왔다. 그는 한손에 PMP처럼 생긴 물체를 들고 있었다. 힐 측정기였다.

“우리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네요. 힐러진에 문제가 있어요.”

그 말에 유지웅은 찔끔했다. 저건 자신을 말하는 게 아닐까? 힐량이 남들의 절반이니 말이다. 최성주가 반문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힐량이 너무 적어요.”

유지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녀석, 지금 설마 시비 거는 건가?

‘현주한테 마음이 있나? 이 녀석? 그래서 날 견제하는 거야?’

불쾌했다. 아무리 자신의 반쪽짜리 힐러라지만, 엄연히 최현주는 자신의 여자친구다. 자연히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제 힐량이 남들의 절반이라서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무슨 뜻이죠?”

“전 레이드 경험도 많고 그만큼 감이 좋습니다. 이 정도 전투라면 힐 총량이 적어도 20만 hps는 되어야 하는데, 힐 측정기에는 15만 hps밖에 잡히지 않았어요. 이건 단순한 오차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요. 이 중에 문제될 만한 사람은…… 아무래도 유지웅 씨 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시비를 거는 거야? 아니야? 유지웅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김서웅이 훑어보듯 쏘아보며 재차 물었다.

“당신, 정말 힐러가 맞긴 해요?”

============================ 작품 후기 ============================

너는 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