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042 I am the commander

“왜 이렇게 늦었어?”

장을 본 것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정효주가 귀가했다. 문턱에서 맞이한 유지웅이 보자마자 타박했다. 그녀가 든 짐들을 뺏듯이 내려놓은 그는 굶주린 개처럼 달려들었다. 거칠게 끌어안자 그녀는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어머! 왜 이러니?”

“나 못 참는다! 안 참을 거야!”

최현주의 유혹은 효과가 있었다. 바로 그의 욕망에 제대로 불을 지펴놓은 것이다. 그는 오매불망 정효주가 귀가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침실로 갈 틈도 없이 그녀를 부둥켜안고 소파에 쓰러뜨렸다. 착 달라붙는 청바지를 낑낑거리며 겨우 벗겼다.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뺨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도 조심스러웠다. 마치 아이의 칭얼거림을 달래는 어머니 같다.

급한 대로 일단 둘 다 바지만 벗었다. 그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효주는 튼튼한 탱커니까 좀 거칠게 해도 되겠지? 그렇게 합리화한 그는 힘껏 진입했다. 그녀의 배에 힘이 딱 들어가며 가볍게 경직되었다.

거친 몸부림. 달아오르는 열기.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짚고 맹렬히 내리 찍는다. 그녀의 호흡도 빨라졌다. 마침내 쌓인 욕망을 그녀의 안에 쏟아낸 그는 천천히 앞으로 넘어졌다.

둘은 말없이 서로 꽉 껴안았다.

“혹시 현주 만났어?”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평소와 달라서.”

무섭다. 여자의 감. 순간 유지웅은 왜 남자들이 와이프한테서 비상금 통장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감이 좋은데 어떻게 숨겨?

정효주가 그를 품은 채로 빤히 올려다봤다. 뺨을 만지는 손길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싫었다.

“현주가 왔었어. 내가 만들 정공에 자기도 딜러로 넣어달라고 하더라.”

“그게 다야?”

마음대로 갖고 놀라는 것, 최현주가 내건 대가. 그것도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유지웅은 그건 관두기로 했다. 민감한 주제인 데다가 어차피 거절한 것이다. 쓸데없이 정효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응. 그래서 거절했어. 끝난 사이인데 내가 왜 받아주냐고. 나 잘했지?”

“아까 그 문자가 그런 뜻이었구나? 난 네가 더위라도 먹었나 했어.”

“아직 봄 안 끝났거든!”

정효주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몸을 가볍게 당겼다. 둘은 다시 서로 꼭 끌어안았다.

“현주도 대원으로 받지 그러니? 현주가 딜은 최고잖아.”

“……!”

순간 유지웅은 움찔했다. 왜 효주가 이런 말을 하지?

침착하자.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승자라는 자신감에서 현주한테 아량을 보이는 걸까? 그러니 그런 여유쯤은 부려도 된다는 느긋함? 그게 아니면 설마…….

‘나 시험하는 거?’

유지웅은 고개를 들고 정효주를 빤히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빛이 참 맑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작으면서 속눈썹도 길고 눈동자도 크다. 내 여자친구지만, 참 예쁜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읽을 수가 없어!’

효주의 속마음을 도저히 모르겠다!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공사구별의 여유? 아니면 남자에 대한 시험?

“현주는 안 돼.”

“왜? 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난 괜찮아. 한 명이라도 딜 좋은 딜러가 있어야 레드몹 잡기도 편할 거 아냐?”

“좋은 딜러는 넘치니까 괜찮아. 그것보다 팀의 화합과 안정이 중요해.”

“겨우 그런 이유?”

“물론 제일 중요한 건, 효주 네가 이해해줘도 내가 미안할 거란 거야. 두고두고 바가지 긁히긴 싫어.”

“어머? 우리 지웅이, 촉이 좋다?”

정효주가 싱긋 웃으며 뺨을 만졌다.

“눈앞에서 먹이 흔들어도 냉큼 안 물고 생각할 줄도 알고. 만약 덥석 물었으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정수리가 쭈뼛 섰다. 역시 시험이었어! 수호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정답이었어!

“아하하! 효주 네가 있는데 내가 왜 현주한테 넘어가? 현주 걔, 너보다 가슴도 작고 볼 것도 없어. 그럼그럼, 효주 네가 최고야, 최고!”

“아부는 싫거든? 비켜 줄래?”

“왜? 왜? 나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안 돼. 장 봐온 거 냉장고에 넣어야 돼.”

정효주는 그를 밀어내고는 주섬주섬 장 본 것들을 정돈했다. 그녀가 정리를 끝내자 그는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또 한 차례 거실이 달아올랐다.

며칠 뒤 정부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유지웅은 김장호 변호사를 대동하고 초능력 관리 본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뜻밖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강우석 국회의원이 직접 교섭을 위해 나온 것이다. 그가 초능력 관리 위원회 의장인 것을 생각하면 못 나올 것은 없지만, 하인을 불렀는데 정승이 나온 셈이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습니까?”

“아, 네. 의원님은요?”

“조금 바빴어요. 결정체 대금 문제를 처리하느라 여기저기 진을 좀 쓰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군요.”

웃으면서 말하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나름 기선 제압? 아니면 의례적으로 상대에게 지우는 부담?

한 번 만난 적도 있는 상대고 해서 유지웅도 강우석을 여러 면으로 조사했었다. 3선 의원인데도 특별히 드러난 비리도 없고, 공사구별이 엄격하다는 세간의 평이 많았다. 청렴결백까진 아니지만 최소한 부정부패 척결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그러니 첨예한 재정 문제와 깊이 얽힌 초능력 관리 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겠지. 그런 정치가가 있다는 건 나라 입장에서 본다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유지웅 입장에서 보자면 좋은 일이 아니다. 그는 지금 나라와 협상 중이니까. 누가 갑이 되고 누가 을로 전락할지를.

“유지웅 군이 말하는 바는 잘 알겠어요. 그러나 레드 타입 괴수의 레이드 금지 조치를 수정하는 것은 여러 문제가 많아요.”

김장호가 대신 협상을 시작했다.

“의뢰인은 레드 타입을 잡을 능력이 있습니다. 레드 타입을 잡고 블루 결정체를 얻을 수 있다면 국가 입장에서도 큰 이득일 겁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블루 결정체가 단 한 개밖에 없죠. 그것도 힐러한테 귀속돼서 레이드 장비로는 활용할 수도 없는 그림의 떡이지만.”

강우석은 서류를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레드 타입은 국가 안보 문제와 정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돈 때문이라면 옐로 타입을 사냥하는 지금도 충분해요. 세계 어느 나라도 레드 타입을 잡으려고 먼저 쳐들어가진 않아요.”

레드 타입은 매우 위험하다. 통상 공격대는 레드 타입과 싸우면 반드시 희생자가 나온다.

물론 블루 결정체의 가치를 생각하면 욕심이 날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사망자가 나오는 레이드에 기꺼이 참여할 공격대원은 없다. 그러니 레드 타입은 잡지 않는 게 낫다. 솔직히 가끔 서식지를 벗어나 인간 구역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버거운데, 미쳤다고 잡으러 갈까?

“세계 국가가 레드 타입 레이드를 꺼리는 건 사망자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와 달리 옐로 타입 레이드를 허용하는 것은 레이드가 안정적으로 보편화돼서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의뢰인이 포함된 공격대는 레드 타입 레이드를 안정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미 울릉도에서 검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도전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위험한 건 위험한 거라……. 전례가 없는 일이기도 하고…….”

강우석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레이드 허용의 곤란함을 설명했다. 김장호는 굴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반박하며 이쪽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치열한 설전이 오가는 와중에 유지웅은 하마터면 꾸벅꾸벅 졸 뻔했다.

“좋아요. 일단 시범적으로 특별 허가 조치를 취해줄 순 있습니다. 대신에 사람 거주 구역에서 적어도 20km 이상 떨어진 곳에 사는 레드 타입에 한하죠.”

하품을 할 뻔했던 유지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디어 허가가 떨어지는가?

“하지만 알아주세요. 정부 입장에서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결정입니다. 나도 다른 관계자들을 설득하려면 그만한 뭔가가 있어야 해요.”

뭘 바라느냐고 묻는 것은 초보가 하는 짓이다. 김장호는 살짝 긴장해서 강우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적어도 뇌물을 바라는 어투는 아니었다.

“유지웅 군은 종합 감세 혜택을 받고 있지요? 레드몹에 한해서는 당분간 그 혜택 적용을 중지할까 하는데요.”

그는 하마터면 게거품을 물 뻔했다. 아니, 왜 그 좋은 걸 안 해준다는 거야!

“물론 힐러로서 받는 개인적 면세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유지웅 군이 포함된 공격대의 탱커와 딜러들도 세금을 내야 합니다.”

“아니, 그건…….”

유지웅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반응했다가 김장호의 눈빛을 받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김장호가 대신 말했다.

“그건 의뢰인을 국내에 유치하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특별 수혜인 것으로 아는데요.”

“레드몹에까지 그런 수혜를 적용할 순 없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도 매우 위험한 일을, 귀측의 제안으로 할 수 없이 시도하는 것이니까요. 경우가 달라요.”

잠시 생각하던 김장호는 한 발짝 물러났다.

“조금 전에는 당분간이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요, 의원님?”

“물론입니다. 레이드 운영을 충분히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 다시 수혜를 주어야지요.”

“잠시 의뢰인과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강우석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둘만 남게 되자 김장호가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은 조건입니다. 받아들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금 억울한데……. 다른 나라에서 레드몹 레이드하겠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강 의원도 알고 있을 겁니다. 레드몹을 안 잡는 건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니까요. 하물며 검증되지 않은 외국인의 주장을 수용해서 허가를 해줄 나라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레드몹을 잡아봤자 제 값 받기는 매우 힘듭니다.”

“하지만…… 돈이 얼만데…….”

“레드몹 레이드의 시험적 허가는 나라 입장에서도 큰마음 먹고 내리는 결정입니다. 실패로 돌아가면 정치적 부담도 매우 큽니다. 이 정도는 저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영구적인 것도 아니고 한시적인 조치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될까요?”

“대신 당분간이라는 기한을 명확하게 설정해야겠죠. 그게 정말 중요합니다.”

“알았어요. 할 수 없죠.”

레드 타입을 잡으면 비싼 블루 결정체가 떨어진다. 근데 잡는 게 너무 위험하다. 반드시 사망자가 나온다. 그러니 잡고 싶어도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 아무리 유지웅이 울릉도에서 활약을 보였다고 해도, 한 번의 활약으로 대뜸 오랜 정책을 수정하는 것은 나라 입장에서도 큰 결심이었다.

“의원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명확한 기한이나 레이드 횟수를 사전에 설정했으면 합니다.”

“그건 간단하게 하죠. 사망자가 한 명도 안 나올 때까지로 합시다.”

“사망자가 나올 거라 생각하시는군요.”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공격대를 모집할 때 그런 위험성을 분명히 공시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사망자가 한 명도 안 나올 때까지라고? 유지웅은 오기가 생겼다. 이렇게 된 이상 첫 레이드에서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안정적으로 레이드를 마치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교섭을 끝내고 둘은 본부를 나섰다. 김장호의 안색은 꽤 밝았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솔직히 조금 억울해요. 으으, 그 면세되는 돈이 얼만데!”

“허가 조치가 떨어진 것만 해도 어딥니까? 저는 솔직히 반 년 이상 끌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엑? 반년이나요?”

“국가안보와 밀접한 문제다 보니 이해관계가 복잡하거든요. 그래도 강 의원이 우리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아마 여러 모로 알아서 손을 써줄 겁니다.”

레드 타입 괴수 레이드 허가를 위해서는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설득해야 할 관계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안보와 사망에 관련된 문제에서 정부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위험한 시도는 그 과실이 탐스러워도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레드 타입 레이드 해외 진출을 하고 싶다면, 먼저 국내에서 실적을 쌓아야 한다. 옐로 타입을 레이드하듯이 안전하게 레이드를 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허가도 떨어졌으니, 이제 공격대 모집만 하면 된다 이거지?”

유지웅은 부푼 가슴을 안고 귀가했다. 정효주가 간식을 만들었다며 케이크를 가져왔다. 한 조각을 잽싸게 먹어치우고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모집글 초안을 잡기 시작했다.

“여기 이 문구는 빼자. 너무 장난스러워.”

“그래? 딴에는 가볍게 보이려고 그런 건데.”

“이런 글은 공문처럼 작성하는 게 좋아. 괜한 사견이 들어가면 가벼워 보이기만 해.”

“그런가?”

정효주의 감수를 받고, 김장호의 최종 검토를 받아 드디어 모집글이 완성되었다. 김장호는 탱커와 딜러의 면세 혜택이 없다는 걸 명시해야 한다는 등 법률적인 조언을 주로 했다.

「……이와 같이 레드 타입 괴수만 전문적으로 레이드하는 정규 공격대를 창설하고자 하니, 뜻이 있는 모든 클래스 분들의 많은 지원을 바랍니다.」

마침내 유지웅은 정규 공격대 모집 코너에 글을 올렸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정효주를 끌어안고 잤다. 쪽지함이 터질 거란 건 상상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