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211 Land grabbing

―키에에엑!

―캬아아악!

철판이 시끄럽게 부딪치는 듯한 귀곡성을 터트리며 괴수 떼들이 달려들었다. 가장 작은 녀석도 20미터가 넘어간다. 한 자루 검에만 의지해서 대항하는 정효주의 모습은 차라리 애처로웠으며, 비장하기까지 했다.

말도, 기합도, 무엇도 필요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가까이 접근하는 대로 마구 베어 넘길 뿐이다. 붉게 빛나는 검날이 궤적을 그을 때마다 굵직한 나무줄기가 썰려 나간다. 이를 악물고, 조금이라도 많은 괴수를 베어 넘기기 위해 그녀는 고군분투했다.

수십, 수백 가닥의 딱딱한 나무줄기가 촉수처럼 그녀를 때렸다. 그때마다 몸에 걸린 보호막이 충격을 흡수하며 막아냈다. 그녀는 최대한 맞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숫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키아아아악!

무려 40미터가 넘어가는 거대 식물 괴수가 쿵쾅거리며 달려왔다. 굵고 짧은 고목처럼 생긴 녀석이 잔뿌리가 가득한 뿌리로 뛰는 모습은 섬뜩하리만치 기괴했다. 무수한 뿌리 중의 하나를 발을 치켜들듯이 높이 쳐올린 녀석이 그대로 내리찍었다.

정효주는 피하려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당황해서 내려다보니 어느새 발아래를 가득 메운, 손가락 굵기의 나무줄기들이 발을 꼼짝도 못하고 옭아맨 채였다.

“안 돼!”

유지웅이 비명을 지르며 보호막을 재차 걸었다. 정효주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묵직한 체중이 실린 발뿌리가 빠르게 내리꽂히며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까강!

순식간에 보호막이 깨져나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적지 않은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그만 입에서 피를 토했다. 무릎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효주야!”

“오, 오지 마!”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신랑은 자신과 달리 평범한 육체를 가졌다. 만에 하나 보호막이 깨져나가서 직접 몸에 타격을 받으면, 사소한 충격으로도 죽고 만다. 어떻게든 괴수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모아둬야 한다. 바로 지금처럼.

거대 괴수가 다시 발뿌리를 들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발을 옭아맨 줄기들을 잘라냈다. 그리고 힘껏 옆으로 몸을 굴렸다. 거의 간발의 차이로 발뿌리가 그녀가 있던 곳을 내리찍었다.

쾅!

크레이터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정효주는 왼손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적지 않은 충격에 속이 울렁거렸다. 이럴 때 힐러가 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 지켜보는 유지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주먹을 쥐었다. 차라리 힐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보호막을 걸었지만, 보호막은 다친 부상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보호막이라고 만능은 아닌 것이다. 이제부터는 부상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몸을 이끌고 싸워야 한다.

막막해졌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콜록! 콜록!”

피를 토하며 그녀가 억지로 일어섰다. 괴수들이 가지를 채찍처럼 휘둘러댔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피했으나 고작 몇 가닥의 가지만 피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공격을 고스란히 얻어맞고 만 것이다.

보호막이 충격을 흡수했지만 저만치 나동그라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며 속이 울렁거렸다. 겨우 상체를 일으킨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돼!”

유지웅의 뒤에서 서서히 올라가는, 굵고 날카로운 잎사귀를 보고 만 것이다. 그녀는 다급해졌다. 있는 힘껏 날뛰어서 어그로를 먹었는데, 하필 한 녀석이 신랑을 보고 말았다.

“지웅아! 피해!”

하지만 어디로?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뛰어올랐다. 그를 향해 힘껏 달렸다. 허공을 뚫은 잎사귀 끝이 유지웅의 등을 힘껏 가격했다. 그는 힘없이 고꾸라졌다. 그 위를 다시 잎사귀가 내리쳤다. 까강 하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보호막이 손실되고 있는 것이다.

“광역 보호막! 광역 보호막을 쳐!”

다급한 나머지 그렇게 외치다가 퍼뜩 깨달았다. 그는 이미 리타이어 직전이다. 대인 보호막으로 비거를 아끼고 아껴서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이미 기적이었다.

마침내 보호막이 깨져 나갔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보호막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약간의 딜레이가 치명적인 빈틈을 만들어냈다. 보호막이 벗겨진 아주 짧은 순간을 노리고 뾰족한 줄기가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그때 정효주가 와락 달려들어 그를 몸으로 감쌌다. 보호막이 순식간에 깨져나가며 척추에 줄기가 꽂혔다.

“아아악!”

등이 짜르르 마비되는 듯한 통증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만 비명을 질렀다. 보호막이 버텨줄 줄 알았는데, 이미 상당량의 피해를 흡수한 뒤라 금방 깨져나가고 만 것이다.

그녀는 그의 위로 엎드렸다. 가늘고 좁은 어깨가 비에 맞은 새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유지웅은 이를 악물고 보호막을 걸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텅 빈 그릇처럼 아무 것도 나가지 않았다. 모든 힘을 완전히 다 써버리고 만 것이다.

“……미안해.”

“아니야. 내가 미안해…….”

“오지 말 걸……. 내가 왜 와서…….”

“……네 탓이 아니야. 운이 나빴을 뿐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

유지웅은 작게 울먹였다. 그녀도 자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덮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얼굴을 보면서 죽고 싶었는데.

미국에 온 게 잘못은 아니다. 만약 미국 사태를 놔두었다가는 결국 다른 나라들도 연쇄적으로 망했을 것이다. 종래에는 그 피해가 한국에까지 닥쳤을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를 집어삼킨 식물 군단을 한국에서 단독으로 상대했다면, 아마 몇 백 배는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명료하다. 인간은 괴수한테 완전히 패배했다. 괴수를 가축처럼 이용했다고 여겨왔지만 그것은 명백한 착각. 괴수는 꾸역꾸역 힘을 쌓아 마침내 인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둘이 여기서 죽으면 과연 누가 이 식물 군단을 막을 수 있을까? 핵을 쓴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이미 이것들은 완전히 박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형태로 번식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예정된 운명이 둘에게만 좀 더 빨리 찾아왔을 뿐이다. 둘은 여기서 죽고, 그리고 전 세계의 다른 인간들도 이 식물 군단에게 죽을 것이다.

더듬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체온이 만져지자 왈칵 눈물이 났다. 머리가 핑 돌았다.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날카로운 나뭇가지들이 마치 환상처럼 멍하니 보였다.

저게 꽂히면, 아프겠지? 그리고 죽겠지? 효주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을 테고, 더 이상 웃지도 않을 테고, 더 이상 예전처럼 상냥하게 안아줄 수도 없을 테지…….

그 순간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터질 듯이 흰자위를 덮은 붉은 핏발이 섬뜩하게 꿈틀거렸다.

‘싫어!’

가만히 흔들거리던 나뭇가지가 빠르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느릿느릿하고 분명하게 보였다. 아니, 눈에 각인되고 있었다.

‘그건 싫어!’

보호막도 없이 힘없이 노출 된 효주의 등으로 내리 꽂히는 나뭇가지가, 핏발 선 각막에 또렷하게 맺혔다.

“그런 건 싫다고!”

잠긴 목이 댐처럼 터져 나갔다.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눈에 선 핏발이 터져 나갔다.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온몸에 짜릿한 전기가 통하며, 살갗이 터져 나갈 듯이 부글거렸다.

짙은 휘광이 뻗어 올랐다. 막 정효주를 찌르려던 나뭇가지가 그대로 마비되었다. 끝없이 응축되던 빛이 갑자기 별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무한대로 뻗는 빛의 폭풍에 휩싸인 괴수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

“이, 이게 어떻게…….”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던 둘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온 세상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물처럼 복잡하고 정교하게 뻗어나간 파란 빛이, 세상 모든 것을 촘촘히 옭아매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정화하는 빛처럼, 기이한 신성함마저 느껴졌다.

빛을 맞고 마비된 괴수들의 표면이 파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정효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호, 혹시?”

“왜 그래? 뭐 짚이는 거 있어?”

“괴수들…… 방어막이 사라진 거 같아.”

“뭐?”

“방어막이 안 보여! 봐봐!”

그렇게 말해도 솔직히 유지웅은 모른다. 방어막이 눈에 딱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때였다. 얼어붙은 괴수들의 표면 여기저기서 파란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무수한 점점이 반짝이는 모습은 영롱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파란 빛은 마치 관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촘촘히 얽힌 빛의 맥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수맥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무수한 파란 빛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한 지점을 향해 몰려들었다. 바로 정효주였다. 파란 빛은 순식간에 그녀의 온몸을 덮으며 등으로 몰렸다.

놀라운 일은 그때 일어났다. 그녀의 등에 뭉친 파란 빛이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두 개의 빛의 맥이 뻗어나가며 순식간에 파란 깃털이 돋아났다. 파랗고 아름다운 두 개의 날개가 천천히 펄럭거렸다.

정효주는 무심코 일어났다. 아까 분명히 허리를 다쳤는데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날개를 펄럭여 보았다.

땅에 쓰러진 채로 유지웅은 멍하니 보았다. 파란 빛깔의 날개가 조용히 펄럭이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처럼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괴수들이 움찔거렸다. 마비가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효주한테는 보였다. 취소된 방어막이 조금도 회복되지 않고 있음을 말이다.

방어막이 없는 괴수는 흉포한 장갑 전차가 아니라 커다란 맹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장검을 쥐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내려놓았다. 어째서인지 지금은 이런 장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자신감이, 그녀가 두 손을 맞잡게 유도했다.

깍지 낀 두 손을 하늘로 들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맹렬히 회전하며 맺히기 시작했다. 완전히 마비에서 풀린 괴수들이 그제야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까보다 현저하게 느리고, 둔했다.

푸른 구체가 그녀의 손 안에 생겨났다. 구체는 회전을 멈추지 않았다. 속도가 정점에 달하는 순간 구체에서 날카로운 푸른 실이 뻗어나갔다. 실은 무한대로 뻗어나가며 사방 모든 것을 휘젓고 할퀴고 꿰뚫었다.

―키에에엑!

―캬아악!

여기저기서 단말마가 울렸다. 괴수들은 제대로 된 항거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빛의 실은 무자비했다. 결코 회전을 멈추지 않고, 모든 것을 베어냈다.

빛의 실이 베어낸 것은 괴수뿐만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공동의 벽마저 잘라낸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아주 멀리서 들려온 듯한 비명이 울렸다. 어쩌면 그들을 삼킨 이 거대한 괴수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깨져나가듯 그들을 가둔 벽이 쩌적거리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푸른 구체가 흩어지듯이 사라졌다. 푸른 구체에 힘을 불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등에서 돋아난 푸른 날개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천사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온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무릎에 힘이 풀렸다.

모든 것이 부서져 내린다. 그들을 삼킨 괴수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둘은 아무래도 좋았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서로의 망막을 언제까지고 멍하니 들여다보기만 했다.

한참 후 유지웅이 입을 열었다.

“예뻤어. 아주, 아주 많이…… 예뻤어.”

괴수의 방어막을 취소한 것. 그 에너지를 모아 원하는 대상에게 불어넣는 것. 그 신성한 결계가, 아마 보호막이 한 단계 더 진화했다는 증거인 모양이다. 퍼플 결정체와 보호막의 진정한 융합 형태에 둘은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중 일. 지금은 그저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서로 살아있음에, 앞으로 함께 미래를 계속 설계하고, 같이 걸어갈 기회가 주어진 것에 마냥 행복했다.

정효주가 무릎을 꿇은 채 상체를 서서히 낮췄다. 부서진 괴수의 파편이 눈처럼 떨어지는 가운데, 그녀는 살며시 그의 입에 입술을 포갰다. 단단히 잡은 손등 위로 푸른 돌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을 둘러싼 사방에서 무수한 숫자의 푸른 돌, 블루 결정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블루 결정체 밭의 중심에서, 둘은 언제까지고 그렇게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보호막이 혹시 대인보구인가요?”

-넹, 그렇습니다.

“그럼 광역 보호막은요?”

-대군보구입니다.

“그럼 보호막 결계는요?”

-당연히 대성보구죠.

“A 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