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283 Versus Raid

유지웅에게 일본은 주는 것 없이 미운 나라다. 당연히 단칼에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행한 비서실장이 급히 말렸다.

“회장님, 잠시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간곡한 요청에 유지웅은 거절하려던 것을 보류했다. 외부인을 물린 뒤에야 비서실장이 이야기를 꺼냈다.

“제 소견이지만 받아들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회장님의 국제적 인망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일본은 당장 식량이 없어 전 국가적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식량 수송선이 단지 동행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거절한다면 회장님 위신에 흠이 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

“세상 사람들은 회장님이 냉혈한이라고 비난할 겁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일본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건 사실이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동행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일본이 밉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하면 세상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비서실장은 일본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를 위해서 한 말이었다.

“망할.”

그렇게 투덜거린 유지웅은 비서실장에게 다시 물었다.

“동행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좀 그렇겠죠?”

“네. 아무래도……. 대신에 단순 동행일 뿐 어떤 사고가 일어난다 해도 책임을 지거나 보호할 의무는 없다고 분명하게 못을 박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선단 책임자를 불러오라 하세요.”

그가 부른다고 하자 일본 관료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관료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유지웅은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생각해서 할 수 없이 승낙의 뜻을 비쳤다.

“동행을 허락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큰 위험을 감수하고 가는 항해입니다. 우리 선박을 보호하는 것만 해도 벅차니, 일본 선박을 보호해야 할 의무는 제게 없습니다. 사고가 일어나도 제 책임이 아닙니다. 아시겠지요?”

“동행만 하게 해주셔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일본측 선박은 각각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보다 더 큰 대형 수송선이었다. 모두 5척이었으며, 그 안에 실린 게 전부 식량이라고 한다. 어마어마한 양이었지만 일본 인구가 1억임을 생각하면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한국 선박들이 앞장을 서고 일본 선박들이 후미에 따라 붙은 채 항해를 시작했다. 선단 중심 상공에는 브라우니가 느릿하게 날고 있었다.

“써,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갑판에 나와 있는데 쿤겐이 다가왔다. 그녀는 근심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유지웅은 조금 의외라는 눈으로 봤다. 그녀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걱정되나요?”

“예. 겨우 바다를 이용할 수 없게 된 것 때문에 세상이 망할 수도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하얀 얼굴을 살짝 가린 짧은 은발이 탐스럽다.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는 에메랄드 원석을 생각나게 한다. 만난 지 2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마치 몸의 시간이 처음 만났던 그 순간에 멈춘 것처럼.

탱커에게는 흔한 일이라고 한다. 육체가 최적화된 이들답게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시기를 오래 유지한다는 것이다. 만약 정효주가 없었다면 쿤겐한테 프로포즈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쿤겐은 왜 여자를 무시하는 거예요?”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니까요. 아이를 낳아서 대를 잇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존재 아닙니까.”

당신 스스로 당신을 보잘것없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나?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주변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쿤겐은 정말 자기 스스로를 남자로 믿는 것 같다고 한다. 여자가 아닌 척 연기를 한다기에는 너무 진솔한 태도라는 것이다. 왜 그런 건지 의아한 적도 많지만, 유지웅은 한 번도 대놓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개인적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회장님이 세상을 구하실 거죠? 그렇지요?”

어느새 나타난 메이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왠지 표정이 질투하는 것 같은데?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유지웅은 설마 하고 넘어갔다. 메이는 자신이 유부남이란 걸 안다.

“글쎄요. 난 별로 영웅 행세는 취미 없는데.”

“그래도 핍박 받는 중국 레이더를 위해 나서주셨잖아요? 회장님은 레이더의 수호신이세요.”

“수호신?”

“그럼요. 중국 레이더들은 회장님한테 정말 엄청나게 감사하고 있어요.”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걸 보니 참 열여덟 소녀답다. 그는 조용히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늘에 숨겨진 사정 같은 걸 알면 저런 소리를 못할 텐데.

“난 영웅 놀이엔 취미가 없어서, 세상을 위해 날 희생하진 못해요. 내 가족을 위해 희생할 몸뚱이를 남겨둬야 하거든요.”

“멋있어요! 어쩜 그렇게 가정적이실까.”

나름대로 소녀의 꿈을 걷어내기 위해서 한 말인데 오히려 또 다른 꿈을 덧칠한 것 같다. 그는 픽 웃고 말았다.

그때 선장한테 긴급 연락이 왔다.

「선장입니다! 소나에 뭔가 잡혔습니다! 대단히 거대한 어종입니다! 괴수 같습니다! 11시 방향, 거리 15km입니다!」

“왔구나!”

15km면 브라우니의 위협 거리 밖이다. 유지웅은 급히 브라우니를 불렀다.

“브라우니!”

너무 멀어서 들릴까 걱정이 들었으나 브라우니는 용케 알아듣고 재빨리 내려왔다. 유지웅은 11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가 봐! 괴수가 나타나면 쫓아내든가 죽이던가 해. 알았지?”

―끼잉!

알았다는 듯이 브라우니는 힘차게 외치고는 다시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유지웅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브라우니의 몸이 작은 점으로 사라질 무렵, 수평선 근처에서 조그만 물 분수가 튀었다. 거리를 생각하면 엄청난 높이로 물이 튄 것이다.

“써,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브라우니는 결정도가 1만이 넘는 녀석이에요. 웬만한 레드 몹은 상대도 안 돼요.”

“만약 해금현상이 블랙 몹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브라우니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때는 얄짤 없어요. 인류가 바다를 포기하는 수밖에요.”

해양 레이드 자체가 대책 없는 짓인데, 바다에서 블랙 몹을 상대로 싸운다? 하룻강아지도 자기 집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간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다. 아무리 괴수를 봉쇄하는 결계 능력이 있다지만 물속에서 블랙 몹과 싸워서는 승산을 기대하기 힘들다. 무의미하게 죽을 싸움은 절대 안 할 것이다.

저 멀리 브라우니가 솟구쳤다. 사실 직접 본 건 아니고 쿤겐이 말을 해줘서 알았다. 탱커의 눈이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물고기처럼 생긴 괴수 한 마리를 입에 물고 뜯어먹고 있습니다. 괴수 크기가 상당합니다. 브라우니보다 두 배는 큽니다.”

사실 결정도에 비하면 브라우니는 몸집이 꽤 작은 편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잡았던 레드 몹이 브라우니보다 체격이 더 크고 좋은 편에 속했다.

어쨌거나 잡았다는 것에 유지웅은 안심했다. 생각했던 대로다. 브라우니를 이용하면 괴수가 날뛰는 바다라 해도 항해가 가능할 것이다.

‘아예 레드 몹을 떼로 길들여서 쓰는 건 어떨까? 아냐, 브라우니처럼 생각할 줄 아는 레드 몹이 또 어디 있겠어.’

다른 레드 몹 길들이기를 시도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니, 성공할 엄두조차 안 났다. 정효주만 보면 레드 몹들은 겁에 질려서 도망가거나, 혹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궁지에 몰린 쥐처럼 달려드는 게 전부였다. 브라우니처럼 납작 엎드려 목숨을 구걸한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쿠우웅!

그때였다. 요란한 충격음이 울리며 배 전체가 뒤흔들렸다. 우지끈거리며 철판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렸다.

“써!”

쿤겐이 재빨리 유지웅을 부축했다. 하마터면 갑판 밖으로 떨어질 뻔했던 유지웅은 겨우 살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의 옆구리를 쥐고 있었다. 손에 잡힌 허리는 부드럽고 날씬했다.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무슨 일이죠?”

“뭔가 배에 부딪쳤습니다. 이 해역에 암초가 있을 리도 없을 텐데…….”

배가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배 전체에 요란한 비상 사이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유지웅은 급히 무전기를 켰다.

“선장님? 무슨 일인가요?”

「소나에 반응이 있었습니다! 뭔가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부딪쳤습니다!」

“가까이 접근하는 데도 여태 몰랐단 건가요?”

「변온층 밖에 있어서 탐지가 안 됐던 것 같습니다! 탐지되자마자 순식간에 달려들었습니다! 배 하부에 침수 중입니다!」

“배를 버려야 하나요?”

「아직은 아닙니다만…… 으아악!」

쿠웅, 하고 또 다시 충격음이 들렸다. 배가 또다시 흔들리며 더욱 심하게 기울어졌다. 철판이 우지직거리는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는 메이를 쉔이 재빨리 붙잡았다. 그녀는 겁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젠장! 호크아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그렇게 이를 갈아봤지만, 사실 호크아이는 일정 수심 너머는 탐지할 수 없었다. 해양 괴수를 상대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안 가져왔다. 또 항속거리 문제도 있고.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검푸른 수면 아래를 지나가는 거대한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배 바로 아래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물고기를 본 것이다. 어림잡아 길이가 50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개체였다.

“괴수다! 괴수가 나타났다!”

겁에 질린 선원들의 비명이 시끄럽게 울렸다. 유지웅은 침착하게 쿤겐을 돌아봤다.

“쿤겐, 궁극기로 저거 맞출 수 있겠어요?”

“해보겠습니다.”

쿤겐은 결연한 표정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신 집중을 채 끝내기도 전에 검푸른 그림자는 수심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유지웅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이지 않아서야 맞출 수가 없지 않은가.

“브라우니! 빨리 와!”

그렇지 않아도 브라우니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유지웅은 급히 외쳤다.

“저기 아래에 있어! 가서 잡아 와!”

브라우니는 수면 아래쪽을 흘끗 보더니 망설였다. 들어가기 꺼려하는 것 같았다. 녀석이 왜 저러지?

“왜 그래? 물이라서 싫다는 거야? 아까는 잘만 들어가서 사냥했잖아?”

―끄으응…….

“아! 답답해! 뭐라는 거야! 말을 해, 말을!”

―끼이잉…….

오죽 다급했으면 되도 않는 말을 해버렸다. 말 못하는 녀석에게 말을 하라고 외치다니. 스스로도 창피해서 얼굴이 그만 벌게졌다.

“저 아래 있다니까! 빨리 물속에 들어가서 잡아 오라고!”

그러나 브라우니는 난처해할 뿐 섣불리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왜 저러지? 설마 예상보다 강력한 녀석이라서? 너무 깊이 잠수해 있어서? 아니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어서?

그때였다. 후방 5km 지점에서 따라오고 있던 일본 선단 쪽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놀란 유지웅은 급히 뒤를 돌아봤다.

「일본 선박 두 척이 당했습니다! 침몰 중입니다!」

============================ 작품 후기 ============================

대격변이 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