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304 Bite the Beast

정효주는 휴학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유지웅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왜 휴학을 해? 그냥 다녀.”

“하지만 금동이랑 같이 있어주고 싶어. 가장 중요할 때 엄마가 같이 있어줘야 하잖아.”

“어디 멀리 출장 가? 아니잖아. 그냥 낮에 잠깐 학교 갔다가 오는 건데. 주5일 내내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치만…….”

“애가 중요하다고 졸업 미루고 그러면 계속 미루게 돼. 유치원 들어갈 때는 유치원 때문에 미루고, 초등학교 때는 초등학교 때문에, 중고딩은 다를 것 같아? 대학 들어가면 대학 뒷바라지 한다고 또 미루고. 다 그렇게 된다고.”

유지웅은 나름대로 논리 정연하게 설득했다.

“금동이가 소중한 건 알겠는데, 우리가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지 애가 가정의 중심이 되면 안 돼. 너 잠깐 집 비울 때 애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없는 정도가 아니라 넘쳐 난다. 당장만 해도 장모님과 시어머니가 서로 돌봐주겠다고 난리도 아니다. 고용인을 써도 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만 맡겨두는 건 안심이 안 된다나.

가십지에서는 간혹 금동이가 세상에서 몸값이 가장 비싼 아이라고 떠들어댄다. 유괴만 하면 팔자가 핀다며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도 했다. 장모님과 시어머니 모두 그것을 본 지라 생판 남남인 고용인에게 맡기는 걸 불안해했다.

“알았어.”

결국 정효주가 순순히 물러났다.

“우리가 졸업 같이는 못해도 학교는 같이 다녀야지. 그러려고 나도 일부러 학교 들어간 건데.”

“응. 미안해. 내가 너무 아이 생각만 했어.”

“그나저나 금동이 이름은 뭐로 짓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결국 유세현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라갔다. 하지만 열 달 동안 금동이라고 불렀던 습관이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이모도, 조부모도, 심지어는 부모도 유세현을 금동이라 불렀다.

금동이는 태어나자마자 세계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2,000만 헥타르에 달하는 미국 대농장을 증여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역시 혈통을 잘 타고 나야 한다며 많은 이들이 시샘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지웅이 그간 사회에 기여한 점이 워낙 크고, 또 정효주도 상당한 재원을 투자해서 빈민층을 대상으로 자선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그 비난은 힘을 얻지 못했다.

“유지웅 회장만큼 가장 깨끗하게 돈을 벌고, 가장 재산 내역이 투명하며, 가장 많은 자선 사업을 벌이는 부자는 어디에도 없다.”

굳이 그가 나서지 않아도 맹목적인 지지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며 비방을 퍼트리는 자들을 공격했다. 또한 사실이었다. 유지웅이 모은 재산은 대부분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뤄졌으며, 완전 면세 혜택을 받은 그가 재산을 불법으로 은닉할 필요도 없었다.

* * *

“쿤겐, 그럼 잘 부탁해요.”

유지웅 커플은 OT에 참석했고, 집을 비우는 동안 얼떨결에 테레사가 아이를 맡게 되었다. 아이를 보살피는 가정부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테레사만큼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없다.

졸지에 테레사는 갓난아기를 안고 대저택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뭐 애초에 별로 돌아다니질 않으니 불편함은 없다. 아이를 맡겨준 게 그만큼 자신을 신뢰한다는 뜻이니 오히려 감사하다.

다만 얼떨떨한 건 아이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테레사는 아이를 보살펴 본 적이 없다. 갓난아기라면 특히 더욱 난해한 문제다.

게다가 아기가 젖을 빨았을 때 느꼈던 그 감촉―사멸한 줄 알았던 모성애―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종류의 감촉은 겪어본 적도, 겪을 일도 없었다.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으며,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쿤겐님, 수유를 할 시간입니다. 여기 젖병을 물려주세요.”

정효주는 가기 전에 충분한 모유팩을 만들어놓았다. 건강한 탱커라서 그런지 그녀는 젖이 풍부하게 나왔다. 가정실장이 모유팩을 데워서 담은 젖병을 가져왔다.

테레사는 한 팔로 아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젖병을 잡았다. 젖병을 가까이 가져가자 아이가 덥석 물었다. 눈은 빤히 뜬 채 테레사를 응시한다. 초롱초롱한 눈빛에 가득 담긴 순수함에 테레사는 부담스럽고,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조그맣지만 투명한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자애롭게 젖병을 물리는 모습 따위, 남자다운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멀다. 그런데 싫지 않다는 게 문제고, 혼란스럽다.

젖병을 다 물리고 가정부장이 등을 쓸어 트림을 시켰다. 가정부장이 나가고 테레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밖에 나갈까 했으나 아직 쌀쌀한 것을 생각해 관두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한쪽 벽을 차지한 커다란 쇼윈도를 통해 정원을 내다봤다. 품에 안긴 아기가 신기한 듯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채 밖을 구경했다.

7개월 만에 태어난 것 치고 아이는 지나치게 건강했고, 성장 속도도 빨랐다. 의사는 벌써 백 일은 지난 것 같은 건강한 아이라며 극찬을 했다.

다만 테레사의 옷을 찢었던 악력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아마 갓난아기의 호기심에 그랬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힘을 보일 수 있었을까? 금동이가 그 뒤로 다시 그런 악력을 보인 일도 없었다.

“저는 남자라서 젖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 제 옷을 찢으시면 안 됩니다.”

금동이가 칭얼거리듯이 가슴을 더듬자 테레사는 질겁해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토닥였다. 옷을 찢을까봐서가 아니다. 아기가 젖을 물었을 때 느꼈던 그 짜릿함, 그 기이함에 또다시 이상해질까봐서다.

금동이가 허우적대듯이 두 팔을 뻗었다. 입을 옹알이는 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하다. 이제 몇 주 된 아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만은, 테레사는 마치 귀를 기울이듯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순간 금동이가 그녀의 은발을 움켜쥐었다.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머리카락을 잡고 싶었던 모양이다. 머리카락을 꽉 쥐고 연신 잡아당긴다. 물론 갓난아기의 힘이 세어봐야 얼마나 세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탱커다. 아프기는커녕 귀엽기만 하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신기한 듯 은발을 잡아당기는 아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테레사는 저도 모르게 아기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어째서인지 정효주가 부러웠다. 이 사랑스러운 존재와 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 * *

OT에는 정혜주도 참석했다. 그녀도 당당히 합격해 연주대학교 학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출산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유지웅은 합격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았다.

아무튼 처제가 대학, 그것도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입학했는데 세계 제일의 부자가 선물도 안 해줄 순 없지 않은가. 대학생인 점을 고려해서 소형차 한 대를 사줬다.

“신입생을 위한 선물이라면 마이바흐가 최고지. 안전하고 저렴해서 받는 쪽도 부담 없으니까.”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안목을 뿌듯하게 여겼다. 물론 그 빼고 온 집안이 다 뒤집어졌다. 그의 입장에서야 싸고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소형차지, 남들 눈에는 몇 억을 호가하는, 구경 한 번 해보기 힘든 고급 세단이다.

처가에서는 좋아했다. 사위가 딸에게 비싼 선물을 사주는 걸 싫어할 리가 없다. 갓 대학에 입학한 아이 씀씀이가 커지는 건 아닌지 염려하긴 했으나, 그래도 일단 좋아했다.

반면 친가 쪽에서는 사촌 형제들에게는 차 한 번 사준 적 없으면서 처제에게는 비싼 차를 사줬다고 질시했다.

“아니, 마이바흐가 뭐 비싼 차라고.”

솔직히 유지웅은 어이가 없었다. 그깟 마이바흐, 비싸봐야 대체 얼마나 한다고 저 난리란 말인가. 그는 친척들이 징징거리는 게 싫어서 그냥 사는 김에 마이바흐 몇 대 더 사서 사촌형제들에게도 선물로 줬다. 그제야 말이 쏙 들어갔다.

정혜주도 사양 않고, 크게 기뻐하며 넙죽 받았다. 정효주는 좀 염려스러워하긴 했으나 결국 아무 말 안 했다. 동생 가슴에 헛바람 드는 게 걱정이긴 했는데, 20년을 지켜본 바로는 동생이 그럴 여자애도 아니었다.

아무튼 OT를 가기 위해 모인 신입생 및 재학생들은 관광버스에 차례차례 탔다. 정혜주도 버스 중간쯤에 앉았다.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웅성거렸다.

“제니스 회장님 있잖아, 그 분도 이번 오티에 오실까?”

“온다고 하던데? 그래서 교수님들도 전부 참석하신다고 들었어.”

“위세가 장난 아니다. 우리보다 세 살 많다던데 어쩜 그리 사는 세상이 다를까?”

“저 버스에 탄대.”

“와, 나도 저 버스 타고 싶었는데.”

어쩐지 저 버스 앞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게 이상하긴 했다. 유지웅이 탄다고 하니까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괜히 기웃거리는 아이들은 모양이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에 정혜주는 왠지 자기가 뿌듯해졌다. 고작 형부인데도 이런 기분이다. 언니는 그럼 어떤 기분일까? 그걸 생각하니 또 부러워졌다.

“진짜 내가 먼저 태어났어야 했는데.”

가볍게 투덜거리지만 말 그대로 투정이다. 형부를 놓고 언니와 다투며 아침드라마를 찍을 마음은 없다. 그냥 그런 신랑을 잡은 언니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지. 어쩌면 언니는 어려서부터 앱서버 능력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지금까지 내숭을 유지해온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니.

신입생들이 전원 탔다. 관광버스가 차례차례 출발했다. 어느 정도 속도가 접어들자 학생회 선배가 버스 복도 중앙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12학번 박현준이라고 합니다.”

신입생들이 와 하며 박수를 크게 쳤다. 열성적인 환호가 기분 좋은 듯 잠시 듣고 있던 그가 다시 마이크를 입에 댔다.

“자, 우리는 이제부터 4박 5일의 즐거운 오리엔테이션을 하러 갑니다. 근데 그거 아시나요? 작년 오티 때 모 대학에서 신입생들이 강제로 과음을 하다가 그만 사망을 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어요.”

“진짜요?”

“네. 즐거운 오티에 그런 끔찍한 사고가 있어서는 안 되겠죠? 선배로서 미리 당부드릴 것은, 술 적당히 마시세요. 술을 정말 먹을 줄 모르는 후배님들은 분위기만 맞춰주세요. 술에 물만 타서 마셔도 부담은 상당히 덜어집니다.”

“네.”

“당부는 여기까지 하고, 모두 초면일 텐데 그럼 간단하게 자기소개부터 시작할까요?”

맨 앞줄부터 차례차례 일어나서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박현준은 선배의 지위를 남용해, 좀 예쁘다 싶은 여후배들은 말을 좀 더 길게 하게 유도했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본인도 꺼려하지 않았다.

마이크가 돌고 돌아 정혜주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정혜주라고 합니다. 현역이구요, 여러 선배님들과 동기들과 함께 즐거운 학창 생활을 만들어나가는 게 꿈입니다. 반가워요.”

정혜주는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마이크를 넘기려 했다. 그런데 박현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의아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그가 왜 저러나 했다.

“후배님, 이름이 정혜주라고요?”

“네.”

“혹시 언니가 있어요? 우리 과에 다닌다던가.”

정혜주는 그가 무슨 말을 묻는 건지 알아차렸다. 언니와 자신은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다. 거기다가 이름도 거의 흡사하다. 언니를 아는 과 학생이라면, 자매 아닌가 하고 호기심부터 품을 것이다.

“네. 맞아요. 세 살 위 언니가 과 선배예요. 지금 3학년이고요.”

속 시원하게 정혜주는 인정했다. 숨길 일도 아니었고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박현준은 뒤집어졌다.

“지, 진짜? 후배님이 진짜로 효주 누나 동생?”

“네, 맞아요.”

“우와, 세상에…….”

신입생들은 그가 왜 놀라는지 몰라서 눈만 껌벅거렸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유지웅의 개인사에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알아봐둔 신입생들도 있었다. 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박현준의 경악에 동참했다.

“그, 그럼 쟤가 유지웅 선배님 처제라는 거잖아!”

“유지웅 선배님? 제니스 회장님 말이야?”

“맞아! 유지웅 선배님 와이프가 같은 과에 다니는 정효주라는 분이라고 들었어! 그 분 동생이면 처제가 맞잖아!”

“와, 세상에!”

버스가 뒤집어질 뻔했다. 정혜주는 괜히 민망했다.

============================ 작품 후기 ============================

금동이는 그냥 아기입니다. 환생자나 그런 거 없습니다. 계승 드립은 그냥 제가 작품 외적인 입장에서 친 거죠. 아청법이 시퍼렇게 두 눈을 뜨고 있는데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