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316 Subsea

통신이 끊겼다. 시종들이 나서서 벽면 스크린의 전원을 끄고 마이크를 껐다. 아랍 전통 복장을 한 안슐은 가죽 소파에 몸을 깊게 묻으며 컵을 쥐었다.

공손하게 시립해 있던 지하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미국은 경제대국입니다. 굳이 부딪쳐서 유지웅 님께 득이 될 것은 없습니다. 조금 과한 충고가 아니었는지요?”

“자네도 친구의 자문단과 같은 생각인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안전지대를 들먹이면서 강하게 요구하면 미 정부는 CIA를 폐지할 겁니다. 관련자도 전부 한국에 송환할 테고요.”

“그게 생각의 차이지. 세상에는 합의를 봐선 안 될 분쟁도 존재하는 법일세. 바로 왕의 싸움이 그렇지.”

지하크는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안슐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물론 한국에는 왕이 없네. 하지만 내 친구는 실질적인 한국의 왕인 셈이네. 그런 존재가 거느린 재산에 테러를 가했네. 그것도 사전에 관리에 유의하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말일세. 소실된 재산은 배상하면 그만이지만, 실추된 왕의 자존심은 무엇으로 갚아야 하겠나?”

“…….”

“게다가 수백 명이 넘는 인명이 사망했네. 이런 상황인데 배후에서 적당히 배상하고 합의를 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세. 이 일을 수면으로 끌어내고, 미국을 맹비난해야 하네.”

지하크와 자문단은 실리적인 면만을 보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실리 외의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존재한다.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극소수의 사람들이다.

명예, 자존심, 혹은 체면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재산상의 손실보다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

“평민의 뺨을 때렸다면, 사과를 하면 그만이지.”

“…….”

“하지만 왕의 뺨을 때린 것은, 무엇으로 사죄를 다할 수 있겠는가?”

왕의 체면. 그것이 구겨졌다. 지하크는 비로소 안슐의 강경한 조언을 납득했다. 절대로 다쳐서는 안 되는 것을 미국은 건드렸다. 그 책임은 무제한적으로 져야만 한다.

“하지만 두 거인이 전면전을 벌이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세상에 닥칠 겁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 점은 염려 말게. 친구는 현명한 사람이야. 왕의 분노를 표출하고 나면 알아서 수습할 걸세.”

* * *

“타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안보회의장에서 유지웅이 강경한 뜻을 나타내자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무위원들이 깜짝 놀랐다.

“이번 테러는 CIA가 저지른 짓입니다. 증거를 제시할 순 없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저는 철저한 제재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몰아붙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여객기를 납치해서 우리나라 기업 빌딩에 테러를 가했습니다. 그 바람에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엄청난 재산 피해를 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고요. 그런 몰상식한 짓을 저지른 나라를 상식적인 수위로 대응하려고 하시나요?”

“…….”

유지웅이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자 외교부 장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돼서 입을 다물었다.

“저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문명사회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세계의 경찰이라고 자부하던 미국이 우리나라에 테러를 했어요. 당연히 그에 합당한 응징을 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미국을 응징할 힘이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입니다.”

“왜 힘이 없어요? 충분히 응징할 힘이 넘치는데.”

유지웅은 속으로 혀를 찼다. 관료들이라서 그런가? 패권 구도가 바뀐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다니.

“우리나라는 미국과 수교를 끊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한 말이 아니라 박사님들이 한 말씀이니 맞을 겁니다. 피해는 좀 보겠지만 국가 체제 유지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래요. 오히려 미국이 더 큰 손해를 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재무 수석이 동조하듯이 힘차게 끄덕였다.

유지웅의 존재 덕분에 한국은 비약적인 발전을 꾀했다. 미국과 결별하면 타격이야 있겠지만, 국가 경제가 흔들리지 않는다. 블루 결정체를 전 세계에 독점 공급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쉬운 건 미국 측이다.

식량? 이미 전 국민이 먹을 수 있는 10년치 식량과 가축 사료를 비축 중이다. 정 급하면 호남산 곡물을 먹으면 그만이다. 단순 수치상으로는 호남만으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이다.

호남산 곡물을 자국민에게 공급하지 않는 건 아직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부작용도 나타난 바 없었다. 일본과 중국은 잘만 먹고 있었다.

“수교를 끊고 경제 제재만 가해도 미국이 우리한테 뭘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전쟁을 하자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미국이 한국을 타격하려면 장거리 폭격 혹은 대륙간탄도 미사일 같은 원격 공격뿐이다. 원양함대를 보내 타격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에 함대를 보내려면 베링 해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베링 해역은 유지웅이 지금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우리나라를 우습게 봤으면 CIA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테러를 했겠습니까? 이걸 적당히 사과 받고, 적당히 배상 받고 물러난다고요? 아무 죄도 없이 사망한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피눈물을 흘릴 겁니다. 저는 그 꼴 절대 못 봅니다.”

그들의 죽음에 유지웅은 간접 책임이 있다. 아니, 책임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본인이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적당히 사과 받고, 적당히 배상 받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테러만큼은 절대 아닙니다. 모든 전말을 공개하고 국민들의 생각을 한 번 물어볼까요? 국민들이 뭘 원하는지?”

“…….”

겨우 스물 세 살의 청년의 주장에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논리에서 밀린 게 아니라 힘에서 완벽하게 밀린 것이다.

* * *

한국에 테러를 한 게 CIA라는 보고를 받은 비시는 펄쩍 뛰며 놀랐다. 효웅산업에 CIA가 화재를 저질렀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미 로버트에게 강력한 경고를 했는데, 설마 하니 그런 짓을 저지를 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이번 건은 방법도 기절초풍할 만한 것이었다. 세상에, 한국 비행기를 납치해서 그대로 갖다 박았다니.

“이게 사실인가! 정말로?”

“사실입니다, 각하.”

루딘이 침중하게 대답했다. 비시는 대통령 체면도 잊은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야말로 미치기 직전의 모습이다.

“오, 마이 갓! 이 미친 것들! 내가 그렇게도 자중하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세상에! 비행기를 하이잭해서 갖다 박았다고! 그 상상력으로 영화나 찍지 무슨 첩보 작전을 한다는 거야!”

EIS가 비시에게 제시한 정황 증거는 너무나 확실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AM-1이 요코스카 미군 기지에 보급된 것, 반출된 기록, 그리고 그 모든 게 CIA의 요청이었다는 기록 등 모든 것이 명백했다.

한참을 펄쩍 뛰던 비시는 겨우 진정하고 물었다.

“그럼 한국은? 한국은 CIA의 짓이란 걸 알고 있나?”

“증거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심증은 갖고 있겠죠.”

“무슨 일이 있어도 부정해야 돼. 절대로 그들에게 증거를 줘선 안 돼.”

비시는 곧 한국에서 들어올 항의가 두려웠다. 지금 미국은 여러 모로 한국, 아니 제니스의 눈치를 봐야 할 처지였다. 아직 3대 대도시 외에 안전지대 설치도 다 안 끝났고, 블루 결정체도 한국이 독점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민주당과 제니스의 협력 관계를 좀 과하게 비방하면서, 유지웅의 심기도 많이 거북하게 만든 상태였고.

막말로 한국이 화가 나서 모든 거래 관계를 끊는다면, 한국보다 미국이 더 큰 손해를 본다. 물론 최악의 경우 미국은 자국 폐쇄 경제 체제 유지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건 후진국으로 후퇴하는 지름길이다.

“각하!”

그때 비서실장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비시는 또 무슨 일이 터졌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바로 CNN 속보를 보십시오! 한국 정부에서 대국민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대국민 발표?”

비시는 급히 TV를 켰다. CNN에서 대통령의 대국민 발표를 보도 중이었다.

「……하여, 저는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오랜 동맹국에 그런 끔찍한 테러를 가한 미국의 파렴치함을 비방합니다.」

“여객기 테러를 가한 게 우리 미국의 짓이라며 한국 대통령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난리도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증거도 없이 어떻게? 한국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마지막 말은 틀렸다. 루딘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은 이제 저런 배짱을 부려도 될 만큼 성장했다. 그게 전부 단 한 명의 개인 덕분이다.

‘이래서 진작 미국 시민으로 끌어들여야 했는데!’

새삼 빌클런의 장기 유화 전략이 원망스러워졌다. 빌클런은 지나치게 강하게 접촉하면 유지웅이 거부 반응을 일으킬 거라 보고,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루딘도 그게 옳은 전략이라고 생각했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다 보니 그때 왜 그랬는지 후회가 되었다.

여론은 난리가 났다. 테러 때문에 뒤숭숭한 한국 국민들은 정부의 발표에 불같은 분노를 표시했다. 대대적인 반미 움직임이 일었다.

비시는 자국의 짓이 아니라고 즉각 반박 성명을 내려고 했으나 백악관 참모진이 일단 말렸다.

“왜 반박을 하지 말라는 건가? 한국은 지금 아무런 증거도 없이 우리 미국의 짓으로 몰아붙이고 있어! 이럴 때야말로 강하게 나가야 한단 말일세!”

“하지만 각하, 자칫 제니스 회장의 심기를 더 자극했다가는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이미 세계 패권은 한 명의 개인에게 넘어간 지 오래입니다. 중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안전지대와 앱서브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결국 한 명의 개인일 뿐이야! 전면전을 펼친다면 절대 한국은 미국을 이기지 못해.”

“전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미국은 테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일단 성명을 냈다. 그것도 반박 성명이라기보다는 ‘우리는 그런 거 몰라요.’라는 뉘앙스에 가까운, 조심스러운 회피 성명이었다.

회피 성명을 내고 즉각 폭탄이 되돌아왔다.

「미국 선박은 베링 해역을 지나갈 수 없다.」

미국 국적의 선박, 미국에서 출발한 선박, 미국으로 들어가려는 선박, 이 세 종류의 선박은 베링 해역을 지나갈 수 없다는 경고가 떨어졌다.

현재 북대서양과 남대서양은 괴수 출몰 때문에 연결이 끊어진 상태다. 아메리카 대륙을 출발한 선박이 이용 가능한 항로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북유럽행 항로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대륙을 북으로 우회하거나 캐나다와 알래스카 연안을 지나 베링 해역을 통과하는 것이다.

베링 해역은 현재 전 세계 바다를 하나로 잇고 있는 대동맥이었다.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면 바다를 금지당한 것과 같다.

헌데 한국이 미국을 위한 선박을 지나갈 수 없다고 경고하고 실질적인 조치에 들어갔다. 명분은 테러 혹은 선제공격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다급해진 미국은 청와대에 핫라인으로 연락을 해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래, 무엇을 달라고 하던가?”

“죄송합니다, 각하. 미국의 무조건적인 사과와 테러 책임자 전원 송환, 그리고 한국이 요구하는 피해배상에 무조건 합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무조건 합의?”

“예.”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비시는 마치 임기가 다 끝난 것처럼 폭삭 늙어 있었다.

한국의 요구는 생각보다 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테러 사건이 공표된 이후 미국의 체면은 땅으로 떨어졌다. 세계는 불신의 눈으로 미국을 보았고, 정의의 수호자라 자처하던 미국의 위신은 먼지처럼 구겨졌다.

비시는 이를 갈았다. 이 모든 게 CIA 때문이다. 만약 유지웅의 영향력이 조금만 약했어도 비시는 그를 탓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력한 개인이었고, 원망은 CIA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망할 것들!”

로버트 국장은 줄곧 호출에 회피하고 있었다. 비시가 드디어 그를 경질하고 수배령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각하. 큰일입니다.”

“……또 무슨 큰일인가?”

“베링 해역을 통과하던 수송 선단이 괴수에 의해 모조리 격침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정부가 모비딕 1호를 시켜서 한 짓 같습니다.”

* * *

같은 시각.

“뭐라고요? 미국 선단이 전부 격침당해요?”

「네, 그렇습니다.」

“설마 모비딕 1호가 저지른 짓인가요?”

「아닙니다. 모비딕 1호는 그 시각에 귀항 중이었습니다.」

============================ 작품 후기 ============================

왕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