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446 Spring, spring, spring

나미는 거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언제나처럼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은 강한 위화감을 준다. 이 모습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병아리를 떠올리게 하는 색상 아래로 하얀 다리가 날씬하게 뻗은 각선미를 자랑하고, 찰랑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여인의 요염함을 내뿜는다.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

불현듯 그 남자가 해주었던 칭찬을 떠올렸다. 이해가 되지 않아 혼자 고개를 갸웃거려 본다.

이 모습 어디가 그리 특별하다는 것일까.

눈도 두 개고, 코는 한 개며, 입이 한 개다. 다른 사람, 다른 여자와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이 보는 미의 관점, 아름답다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이 뭐가 특출하다는 건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이트하러 가?”

“데이트?”

“그래. 데이트.”

언제 왔는지, 레지나가 팔짱을 끼고 비스듬하게 벽에 기댄 채 주시하고 있었다. 입가에는 짓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패션 감각도 좋아지고, 데이트도 하고, 이제는 누가 봐도 어엿한 인간인데? 그것도 사랑에 빠진 소녀.”

“…….”

나미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아직 인간의 감정을 모른다는 증거다. 만약 인간의 감정이 그녀의 가슴에 피어났다면, 필경 부끄러워하거나 수줍게 부정했을 것이다.

“괜찮은 남자야. 가지지 못한 게 없는 사람이니. 너랑 의외로 잘 어울릴지도 몰라.”

“난 그 사람과 번식할 마음은 없어.”

“아내가 둘 있다는 것만 빼면. 하긴, 이건 인간이 아닌 너한테는 상관없겠지?”

“진심으로 우리가 번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아니.”

“그럼 왜?”

“그냥.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재미도 있고.”

“…….”

레지나는 피식 웃으며 나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 그만 가 봐. 나도 약속이 있어.”

* * *

호텔 레스토랑에서 바이러스 괴수 폭발을 겪은 이후 나미와 안슐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물론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관계가 그랬다는 뜻이다.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 나미는 안슐이 보이는 호의에 ‘교과서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멋진 남자가 구애를 청하면 그에 수락한다. 그것이 나미가 아는 상식이었다. 나미는 그에 따라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 사회의 틀에 맞추어 연기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오셨습니까.”

아파트 밖을 나오니 검은 리무진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행비서가 에스코트를 위해 문을 열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본래 안슐 회장님께서 맞이하러 나오려 했으나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마 약속 장소로 바로 가실 겁니다.”

“늦나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나미는 리무진에 탔다. 수행비서가 문을 닫고 조수석으로 이동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을 했다.

리무진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지배인이 입구까지 나와서 직접 안내했다.

나미는 안내를 받아 상층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홀은 텅 비어 있었다.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에 안슐 혼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안슐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오셨군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뭐,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무슨 말인지 나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안슐이 웃으며 덧붙였다.

“나미 씨가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도 큰 즐거움일 테니까요.”

“……?”

“앉으시죠.”

둘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안슐이 지배인을 불러서 주문을 했다. 손님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을 보면 또 전체를 예약한 모양이다. 그에게는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이후로 안슐은 더욱 친근해지고, 다정다감함을 드러냈다. 그것이 구애의 시작임을, 나미는 지식으로 배워서 알고 있다.

처음부터 딱 잘라서 거절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나미는 인간의 감정 구조에 흥미가 있었다.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그가 신기했다. 그래서 호기심 충족을 위해 그에 응했다.

몇 번이고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레지나가 말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 나미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레지나가 자신보다 인간을 더 잘 알 것이기에 그녀의 말대로 따랐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레지나의 허락이 떨어졌다. 물어봐도 좋다고 했다.

“안슐 씨는 제가 좋으세요?”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정곡을 지르는 질문에 안슐은 잠깐 흠칫 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대는 무척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나미는 신기했다. 어째서 레지나가 짚어준 예상 답변 중 하나에 저리 딱 들어맞는 걸까.

‘이게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별 것 아닌 질문인데, 왜 그동안은 안 된다고 했을까? 때가 아니라는 둥, 지금 물어보면 싸 보인다는 둥, 별별 말을 다 했는데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그래서 자꾸 그의 만남 요청에 응하게 되는 것 같다.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

“사실 나미 씨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이요?”

“네. 마음에 드시면 좋겠군요.”

선물을 준비했다면서 줄 생각을 안 한다. 나미는 이 말과 행동의 모순은 뭔가 하고 고민에 빠졌다. 남자가 여자한테 흔히 한다는 거짓말?

“아쉽지만 들고 다닐 수 있는 선물이 아니라서요.”

나미는 무슨 말인가 했다. 상대는 그것을 기대감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방긋 웃으며 손을 내민다.

“일어나실까요?”

* * *

출산일이 다음 달로 임박했다. 정효주는 둘째, 셋째를 맞을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저택 고용인들의 표정에도 요즘 들어 긴장감이 어리곤 했다.

태교를 한답시고 뜨개질을 하는 와이프 옆에 누운 유지웅은 부푼 배를 슬슬 만졌다.

“세현이 들어있을 때보다 배가 더 큰 거 같아.”

“둘이니까 그렇지.”

“아, 진짜 아들일까? 딸일까? 너무 궁금하네.”

“난 딸이면 좋겠어. 아들은 있으니까.”

“나도 이번엔 딸이면 좋겠네. 하나쯤은.”

배가 남산 만하게 부풀었지만 그래도 예쁘다. 아니, 자기 아이를 품고 있으니 더 그런 걸 수도.

“애들 태어나면 이름 짓고 유언장 다시 고쳐야겠다.”

“나도.”

“네가 뭐 하러? 네 명의로 된 재산 없잖아?”

“……왜 없니. 내 명의로 된 것도 몇 조는 넘는데.”

“적은데, 뭘.”

“피. 이게 뭐가 적니?”

정효주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둘이 같이 레이드해서 사냥한 결정체라든가, 안전지대라든가, 그런 것들은 같이 노력해서 번 거니까 사실 공동소유다. 편의상 유지웅 명의로 해서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정효주 명의로 된 재산도 있긴 한데 말 그대로 용돈 수준이다. 물론 그 용돈 수준의 재산으로 그녀는 국내 부자 서열 10위 권 안에 가뿐히 든다. 개인 현금 보유량으로는 국내 서열 2위다. 1위는 당연히 유지웅이고.

“엄마. 여기에 정말 동생이 있어?”

아장아장 다가온 유세현이 물었다. 정효주는 웃음을 머금고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두 명이나 들어있으니까, 나중에 태어나면 사이좋게 지내야 돼? 동생 울리거나 때리면 안 돼.”

“동생이 여기서 어떻게 숨 쉬어? 숨 막힐 거 같은데.”

“……그건 그러니까…… 에…… 탯줄? 아니, 이건 못 알아들을 테고…… 아, 자기가 빨리 뭐라고 말해 봐.”

“탯줄 메커니즘을 아이 눈높이에 어떻게 맞춰서 설명해?”

난감해진 둘은 서로에게 설명을 미뤘다. 어느 정도 커서 그런지 요즘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던진다.

아이는 사물을 직관적으로 본다. 통찰력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사전 지식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그 자체로 생각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쩔쩔매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답을 해주려 해도 아이가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부모 노릇 힘들다. 정효주가 겨우 생각해서 대답했다.

“엄마랑 동생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엄마가 숨을 쉬게 해줘. 산소를 보내주거든.”

“산소가 뭐야?”

“산소는 그러니까 대기 중에…….”

“대기는 뭐야?”

“대기는…….”

정효주도 쩔쩔 맸다. 다행히 구세주가 나타났다.

“도련님. 간식 드실 시간입니다.”

테레사가 나타나자 둘은 반색을 했다. 유세현은 얼른 그녀에게 달려가서 매달렸다.

“간식? 테레사가 직접 만들었어?”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쿤겐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왜? 테레사가 이름이잖아?”

“그래도 저는 쿤겐이 좋습니다.”

“테레사라고 부르면 안 돼?”

짐이 테레사에게 넘어가자 정효주와 유지웅은 안도했다. 테레사는 끊어지지 않는 유세현의 질문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참 신기한 재주다. 자신들은 한 번 질문이 시작되면 그 질문 공세에 난감해져서 항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테레사는 유세현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정효주가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쿤겐이 있어서 다행이야.”

“근데 쿤겐도 참 나이 안 먹는다. 처음 만났을 때랑 똑같은 거 같아. 아, 물론 너도.”

“몇 년 더 지나면 사람들이 너랑 나랑 삼촌 조카로 보는 거 아니니?”

“좋네. 막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관계를 맛보는 그런 기분일 거 같아. 기대 된다.”

“자기도 참.”

배시시 웃던 정효주가 문득 궁금함을 띠고 말을 꺼냈다.

“참, 그러고 보니 안슐 씨가 세종시에 공터 하나 매입하시지 않았어?”

“그랬던 거 같다. 작년 겨울이었나? 그때였던 거 같은데.”

“밤 바이러스 사건 전후니까 아마 맞을 거야. 그 공터 가지고 뭐 하시고 있대?”

“아! 혹시 우리 활주로 지어주는 거 아닐까?”

얼마 전 활주로가 없는 좁은 집 때문에 아이 앞에서 체면을 구겼던 경험이 있는지라, 당장 생각나는 건 그거였다.

“물어봐야겠다. 되게 궁금하네.”

유지웅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활주로면 좋겠다.

============================ 작품 후기 ============================

30분 동안 후기 머 적을지 고민하다가 오늘은 그냥 안 적기로 했어요.

영감이 안 떠올라요.